제135화 - #135
궁금한 것은, 대체 누가 그걸 사용했느냐는 것이었다. 괴테의 만년필은 봉인 재단의 엄중한 감시 아래에 보관되고 있었다.
봉인 재단이 봉인물을 취급하는 것은 철저하고 엄중하다. 단순히 리처드 웹스 한 명의 변심으로 유물을 빼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저희가 봉인물이 탈취된 것을 알아낸 시점은 3일 전이었습니다. 봉인물이 탈취된 날짜는 6일전이었고요.”
프레데릭 웹스는 담배를 펴도 되냐고 잠깐 눈짓을 했고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도난되었는지 경로는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죄송스럽게도, 저희 측의 과실이었습니다. 리처드 웹스 재무 이사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넘겨준 듯합니다.”
“그게 가능합니까?”
“원래라면 불가능합니다. 한 명이 세뇌에 걸리거나 변심하더라도, 우리는 완전히 다른 방법의 안전장치를 마련해 두었습니다만, 저희의 다른 보안 기제가 전부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늦게 알아차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흐음. 샤를이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그 봉인물 이외에 다른 봉인물도 도난당한 겁니까?”
“아닙니다. 오직 괴테의 만년필만 도난당했습니다.”
“왜죠?”
“그건, 저희도 아직 조사 중입니다.”
“매우 불쾌하군요.”
샤를은 이번 섀터 섬을 그냥 살펴보러만 갔을 뿐인데 온갖 고생은 다 겪고 와야 했다.
근데 그게 재단 측 과실이라니. 열이 받는구나.
“하지만 대충 범인은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보시죠. 리처드 웹스 재무 이사와 함께 재단 입구로 들어올 때 찍힌 사진입니다.”
봉인 재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든 사람을 일일이 사진으로 찍고 있을 줄이야.
그가 내민 사진 한쪽에는 리처드 웹스가 있었다. 샤를은 이 세계에서 아직 만나본 적 없지만, 익히 그 캐릭터는 알고 있는바.
그리고 그 옆에, 리처드와 웃으면서 대화를 하고 있는 누군가가 찍혀 있었다.
“뭐지?”
사진에 완벽한 먹칠이 되어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진 위에 칠한 것처럼.
“이자의 이름은 프로메트 트리메스. 전(前) 제도 대학교수이며 지금은 자유 활동 중인 학자라고 하더군요.”
“흠. 이름이 좀 특이하군요.”
“트리메스 교수는 예전부터 리처드 웹스와 매우 친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단에 어느 정도 지분도 있긴 하고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리처드에게 매료를 걸고 세뇌했다고 합니다.”
프레데릭은 자기 친척도 마치 타인처럼 말한다.
“……그 결과 괴테의 만년필이 탈취되었고?”
“예.”
“이자에 대한 정보를 조금 더 풀어보세요.”
프레데릭은 눈하나 깜짝하지 않고, 정보를 읊었다.
“프로메트 트리메스 교수. 50세. 슬하에 자식 없음. 저명한 역사학자. 공산주의자. 동물애호가. 영성자이고, 마도사 전문화를 택했습니다. 특이사항으로는 굉장히 동안으로 보인다고 하더군요.”“공산주의……?”
‘아니 여기서 빨간맛이?’
솔직히 예상 못 했다. 이 게임 하면서 먼 외국에 콩산이 있다는 걸 알고 있긴 했는데 한 번도 본 게임에 등장한 적이 없어서.
“요즘 키에프 제국에서 태동하기 시작했다는 신학문입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가지 않더군요. 공평하게 모든걸 배분하자니.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프레데릭이 부연 설명을 했으나 그런 게 궁금한 게 아니다.
“가정사 같은 건 없습니까? 가족이라던가 연인이라던가.”
“젊었을 적에 보슈 백작 부인과 열애설이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하나도 없군요. 독신주의자로 봅니다.”
“응? 보슈 백작 부인이요?”
뜬금없이 튀어나온 단어에 샤를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과거의 기억이 빙글빙글 돌아서 들어왔다.
‘벡토 기자가 들고 가져갔던 그 펜던트에 전혀 모르는 남자 한 명이 있었지.’
이 게임의 미친 중독자인 샤를도, 전혀 알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인물이 그 펜던트에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가 트리메스 교수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했다.
“거기다, 트리메스 교수는 20대로 보일 만큼 동안이라고 합니다.”
그럼 펜던트에 새겨진 그 얼굴 그대로 일지도 모른다. 찾아내기 쉽겠군.
“추가 정보는요?”
“트리메스 교수는 마도사이며, 자기 자신을 관찰한 기록을 지워버리는 유물이나 주문을 보유하고 있을 확률이 큽니다.”
“지금 행적은 어디로 갔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건 아직 조사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확신드릴 수 있는 것은, 반드시 회수해오겠다는 것과, 보관중에 일어난 이 일에 대한 배상입니다.”
“그렇겠죠. 보관 중에 탈취당했을 때, 배상에 관한 조항이 있었지.”
하지만 지금은 재물을 되돌려 받는 것보다, 괴테의 만년필을 돌려받는 게 급하다.
“그자가 그 만년필로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습니까. 추적에 나도 끼고 싶군요.”
“저, 하지만 그 추적엔 공개되면 안 되는 봉인물이 사용될 예정입니다.”
프레데릭은 샤를의 요구에 손사래를 치면서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어떻게든 금전적인 배상으로 끝 마치고 싶어했다.
“그 봉인물로도 추적에 실패한다면요? 계속 도난당한 채라면?”
“……그때는.”
“난 보상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단지 내 유물을 다시 돌려받고 싶을 뿐이죠.”
샤를이 싱긋 웃는 모습에 프레데릭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때는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금방 찾아올 테니. 유물을 되찾아온 이후에 합당안 보상안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끝마치자마자 프레데릭은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샤를과 엮이면서 계속 손해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프레데릭의 머릿속을 채웠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샤를은 프로메트 트리메스 교수라는 자를 머릿속에 기억해뒀다. ‘도둑놈!’
언제라도 그를 만나면 물건을 되찾아와야겠지. 문밖에 있을 플로나를 불렀다.
“플로나?”
“네. 샤를님.”
잽싸게 들어온 플로나가 허리춤에 서류를 들고 왔다. 샤를이 말하지 않더라도 착착 일정에 대해 말해주었다.
비서가 스토킹이 좀 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손발이 착착 맞으면 그건 그 점대로 좋다.
“오늘 일정은, 이번에 이주 완료된 크라이슬러 빌딩에 입주한 뒤, 교인들을 모아서 새 집회를 여실 겁니다.”
“음. 오늘은 바쁘겠네.”
내가 귀환하는 날짜에 맞춰서 짜인 정교한 스케줄을 보고 오늘 만날 사람이 여럿이라는 걸 확인했다.
사이비 교주 노릇은 요즘 하도 해서 이제 진짜 몸에 익어서 집회는 걱정 없다.
저택 밖으로 나오자 포드 차량이 있었고 그 앞에 두 사람이 있다.
오늘은 함께 크라이슬러 빌딩으로 가면서 만날 손님이었다.
포드를 설립한 빌트워치. 풀네임 유르겐 포드 빌트워치. 그와 꼭 닮은 젊은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다.
“오랜만이군요.”
“반갑습니다. 헥센 이사님.”
가볍게 악수를 마친 샤를은 뒷 자석에 앉았다.
이들과의 면담은 딱 크라이슬러 빌딩으로 향하는 도중으로만 잡혀 있었다.
“이 녀석은 제 아들입니다.”
“위버 포드 빌트워치입니다.”
“반갑습니다. 가면서 얘기하죠.”
젊은이인 위버 포드 빌트워치와 악수한 다음, 샤를이 차에 오르자 그들도 따라서 차에 탔다.
“신수가 훤해보이시는군요.”
“하하. 요즘 일이 잘 풀리다 보니 말입니다.”
확실히 그는 예전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샤를이 투자한 이후 메트로폴의 시장, 틸 크로포드와 협력해서 메트로폴 전역에 포드 차량을 공급했다.
“근래에 새로 개발된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해서 포드 차량을 대량으로 생산해내는 중입니다.”
“굉장하군요.”
“예. 근데 그것이…….”
“무슨 고민이라도?”
“후발 주자 때문입니다. 제너럴 모터스, 크라이슬러, 패커드 등등의 자동차 회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패커드는 위협적이죠.”
“수도에서 패커드가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비싼 차를 판다죠?”
넓은 범위에서 본다면 양산화 전략을 가진 포드와 고급화 전략을 가진 패커드가 서로 맞붙는 상황에 제너럴모터스와 크라이슬러가 끼어든 양상이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사님께서 크라이슬러 빌딩을 인수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제가 떠올린 생각이 있습니다.”
“떠올린 생각?”
“예. 그 빌딩에 저희 포드 사 지부를 설립하고 싶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흔한 청탁이나, 빌트워치는 샤를의 자산을 불려주는 협력자였다.
어차피 크라이슬러에게 빌딩을 인수받은 뒤에 뭘 어떻게 하든 샤를의 마음이다.
샤를이 고민하는 것을 보고 있는 위버 포드 빌트워치는 그를 바라보면서 신기함을 느꼈다.
평범한 청년 같은데 그 강직하던 아버지가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보이다니.
“저희는 메트로폴을 시작해서 이 나라 전체에 포드를 유통하고 싶습니다. 크라이슬러 빌딩에 포드사의 지부가 들어선다면, 다른 후발 주자들에게 가벼운 경고가 되겠지요.”
“괜찮은 제안이군요.”
어차피 경영에 관리하지는 않으나, 최대한 협조하는 것이 파트너 아니겠나.
“내 재무 관리사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두죠. 긍정적인 답이 나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크라이슬러 빌딩 앞에 내리자마자 앞 좌석에 타 있던 플로나가 내려서 차 문을 열었다.
빌트워치 부자가 먼저 내리자 샤를도 내려서 빌딩 앞으로 걸어갔다.
“아, 형님! 오셨습니까. 헤헤.”
미리 대기 하고 있던 유마가 꾸벅 인사를 했다. 이 녀석은 이제 굴리는 자본의 단위가 다를 텐데, 옛날 헥센 저택에 있던 그때랑 전혀 다를 게 없다.
“그래. 들어가자.”
플로나와 유마, 샤를이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엄청난 수의 일반 신도들이 그 안에서 샤를을 맞이한다면 상당히 번잡했으므로, 그들과는 따로 면담할 생각이었다.
거대한 승강기가 눈앞에 보인다. 고급스러운 승강기에 올라타자마자 엘리베이터 걸이 대기하고 있었다.
유마는 그녀에게 잠깐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샤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1층부터 30층까지는 일반적인 회사가 입주할 수 있도록 위장해뒀습니다. 31층부터 50층까지는 무명교단이 사용할 수 있게 해둘 생각입니다.”
“음? 10층 정도 남는데.”
“나머지 층, 51층부터 55층까지는 부자들에게만 개방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56층부터 60층까지는 전부 형님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두려고요.”
“흐음. 잘했다.”
이 빌딩에서 이익을 얻기는 어렵겠지만, 어련히 유마가 처리하겠지.
손해를 보더라도 메트로폴 한복판이라는 세인트 생시르 거리에 무명교단의 근거지가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었다.
이제 이 근거지를 바탕으로 메트로폴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거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대쪽이 훤히 보이게 유리로 되어있었다.
이 시대의 기술력은 진짜 상전벽해가 따로 없다. 엄청난 공업력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성장하는 것이다.
“여긴가.”
“네. 이 층부터 나머지 층은 전부 샤를님이 사용하시면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넓은 공간을 보고 유마가 말했다.
“이쪽은 휴게실을 만들어두려고요. 당구나 포커를 할 수 있게요.”
“흐음.”
돈 많은 놈을 슬금슬금 데려와서 도박으로 낚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샤를은 60층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승강기가 쭉 올라가자마자 샤를의 사무실이 보였다.
“여기가 형님 사무실이요.”
“좋은데?”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가서 그런지 하나같이 고급품이었다. 고급 원목으로 된 사무실 탁자는 샤를의 마음에 쏙 들었다.
이게 부르주아가 된다는 것인가. 자리에 탁 앉아서 부자의 느낌을 만끽하던 샤를은 5초만에 다시 일어났다.
여기서 안주한다면 앞으로 올 ‘엔딩’에 대비할 수 없을 것이다.
“해둬야 할 게 많을 거예요. 전담비서가 있어야할 자리부터. 사무실을 꾸미는 것까지요. 제가 도와드릴까요?”
“그러면 좋지.”
사실 샤를은 바지사장이나 다름없다. 사무실이 있어도 앉아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