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 이 유물에 깃든 소환수의 힘이 사용하기 전에도 전해지는바, 이 녀석을 소환하기만 하면 낙승이라고, 시드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다면체가 빙글빙글 돈다.
소음과 함께 빙글빙글 돌고 있는 유물이 달깍거림을 멈추자 한 가지 형태로 그 모습이 확정되었다.
정이십면체 변한 그것은 허공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쏟아냈다. 물속에서 거대한 독두꺼비 한 마리가 소환되었다.
머리에는 어울리지 않는 황금 왕관을 쓰고 있었으며, 피부는 병에 걸린 것처럼 우둘투둘했다.
봉인이 풀린 독두꺼비가 주변을 쓱 훑어보았다.
-하찮은 것들 밖에 없군.
“자! 소환수여! 저자들을 제압해라!”
독두꺼비는 그렇게 외치는 시드니를 보고 눈알을 내려다보았다.
-난 나보다 약한 녀석의 말은 듣지 않는다.
“뭐?”
-심지어 네놈은 내 이름조차 모르고 있지 않느냐? 어딜 마도사도 아닌 게 함부러 날 다루려고 하는 거지?
이게 아닌데……. 시드니는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다. 위대한 수몰왕께서 내려주신 ‘유물’이 주인을 거역할 리가 없다.
“나는 수몰왕님의 가호를 받는 자! 내 명령은 그분을 대신해서 내리는 것이다!”
-조까거라. 수몰왕은 모든 수생생물의 왕이 아니다. 바다왕이야말로 수생생물의 왕이시다.
독두꺼비는 혀를 내밀어서 오히려 주인에게 독이 잔뜩 담긴 거품을 내뱉었다.
“제기랄!”
뒤로 훌쩍 물러난다.
소환수를 대비하고 있던 샤를은 갑자기 독두꺼비와 그 유물의 주인이 서로 다투는 걸 보고 손을 멈췄다.
-쭈인, 쟤네 뭐 하는 거야?
-소환물이 주인의 명령을 듣지 않는 건 이 바닥에선 의외로 흔한 일이지.
하지만 티마이오스의 다면체는 평범한 마도사라도 고위급 소환수를 강제로 다룰 수 있게 해주는 유물일텐데, 시드니는 그 소환수를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근데 저 생물의 격이 너무 높아서, 시드니가 통제를 못하는 것 같군.
시드니는 며칠 전까지만해도 비밀 세계에 대해 잘 알고 있던 평범한 인간이었을 뿐. 영성자는 아니었다. 어인이 되면서 비로소 영성자가 된 것이고.
-잘됐네 쭈인.
허공에 떠올라서 전투 준비 만만인 파기나레코르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다가 다가오는 어인 하나에게 무존자의 창 주문으로 활활 불태워버렸다.
-어찌 됐든 그동안 이 물고기들부터 없애버리자!
-그러자.
하늘에 불꽃이 튀면서 어인들을 향해 주문이 난사되었다.
어인 무리를 아작내자 슬슬 보이는 어인의 수가 현저하게 줄어 있었다.
“내 말을! 들으라고!”
-싫어!
시드니는 요리조리 독두꺼비의 공격을 피하면서 통제를 시도하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제기랄! 그럼 다시 들어와라!”
티마이오스의 다면체를 뻗어서 독두꺼비를 빨아들인 시드니는 이를 갈면서 다른 속성을 고르기로 했다.
‘수속성 소환수라면 통제가 쉬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그럼 다음 놈을!’
이번에는 통제가 쉬울 법한 녀석을 찾기 위해 제일 힘이 약해 보이는 소환수를 찾았다. 그것도 상대적으로 느껴지는 것이었지만.
다면체를 빙글빙글 돌려서 정십이면체로 전환했다. 우주를 뜻하는 그 다면체가 소환한 생물은 처음보는 생물체였다.
마치 공간이 휘어지는 듯 보이면서 튀어나온 생물은 해파리처럼 하늘거리는 촉수를 늘어트리고 떠 있었다.
그것은 얼굴이랄 것이 없었다. 단지 몸통에 빛나는 단추 같은 것들이 잔뜩 달렸을 뿐이었다.
-티마이오스의 다면체인가. 이번 사용자의 자질이 떨어지는군. 좋다. 사용자여, 대가를 지불하면 협력해주겠다.
“무슨 대가를 원하지?”
-후후. 자네에게서 중요한 것을 가져갈 생각이라네. 예를 들어, 기억 같은 것 말일세.
“어, 얼마나 가져가는 거지?”
-상대해야 할 적이 강할수록 많이 가져간다네. 기억은 착불로 받지.
“그거면 확실히 적을 처리할 수 있나?”
-물론이라네. 자네가 지불한 대가가 충분하다면 말이지.
시드니는 꺼림칙하지만, 지금 다른 다면체에서 생물들을 소환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했다. 벌써 어인들이 거의 다 쓰러져 갔기 때문.
촉수를 뻗어 시드니와 계약을 맺은 그 생물은 적으로 규명된 자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몸통의 절반에 가까운 거대한 눈을 떴다.
어인들을 거의 다 처치한 샤를은 고개를 돌려서 그 소환수를 바라보았다.
‘기억조작자!’
기억조작자는 이계 심층을 떠다니는 정체 모를 생물이었다. 어떻게 태어나고 죽는지 알 수 없었다.
심층에 사는 생물치고 육체 능력은 한없이 연약했다.
대신 그것들은 지성체의 기억을 빼앗고 조작하는 능력에 특화되어 있었다.
“더글라스. 생각을 비우십시오!”
“뭐? 생각을 어떻게 비워!”
마지막으로 달려드는 어인 하나의 머리통에 단검을 박아넣는 더글라스가 인상을 찡그리며 외쳤다.
“시드니가 기억조작자를 소환했습니다. 생각을 비울 수 없으면 유혹에 넘어가지 마세요!”
“그게 무슨.”
기억조작자의 촉수가 펼쳐지면서 주변의 모든 공간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샤를은 빠르게 명상상태로 진입하려 했으나, 대응이 늦었다.
-마인드 템테이션.
*
수현은 VR기기를 벗었다. 그리고 기지개를 켜면서 몸을 풀었다.
“게임을 너무 오래 했어.”
영 몸이 찌뿌둥한 게 요즘 게임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 분명했다. 슬슬 이 게임도 졸업하고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스마트폰에서 진동이 느껴지자 그는 폰을 잡고 전화를 받았다.
“어? 엄마.”
-얘는 이제야 전화를 받니?
“잠깐 할 게 있어서.”
-너 언제 새 직장 알아볼 거니? 그리고 집에도 좀 오고 그래. 김치 담근 것도 가져가고.
“어. 응. 그럴게. 다음 주 주말에 갈게.”
잔소리였어도, 오랜만에 엄마 목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좋다고 생각하면서, 수현은 전화 통화를 끝내고 내려놓은 VR기기를 바라보았다.
이 마성의 VR기기는 그의 시간을 삭제했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지만 현실을 도외시할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도 자성의 시간을 가졌다. 요즘 너무 게임을 많이 했다.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엔딩이 뭐라고 말이야.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 그 엔딩을 밝혀줄 사람이 있겠지. 상금이 뭐다냐.”
이렇게 폐인처럼 몇 달 동안 살아보니, 일에 치인 그때가 그립기도 했다.
“누가 그랬었지. 쉬고 나면 일하고 싶고 일하다 보면 쉬고 싶다고.”
이제 현생을 살 때가 된 것 같다. 돈도 슬슬 위험해질 때가 됐고.
아이디랑 커뮤니티 사이트를…… 음. 삭제하긴 아까우니 그냥 접자.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도 깎고 머리카락도 최신 스타일로 바꿨다. 전에 쓰던 정장은 너무 오래되어서 새 정장을 바꿨다.
공원 바깥으로 나가서 걸었다. 차가운 공기를 맡으면서 걸으니 무언가 주박에서 벗어난 것 같았다.
며칠 뒤에 수현은 구직활동을 시작하면서 그간의 폐인 생활을 청산하기 위해 인연 끊긴 대학 친구들과 만나서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얘들아 잘지냈냐?”
“와, 수현이고? 니 연락이 전혀 안 되어 가꼬 진짜 마 죽은 줄 알았다.”
“그간 일이 생겨서 좀 바빴다.”
술자리에 들어가 앉자 수현은 한동안 주목을 받아야만 했다. 술자리에서 서로 떠드는 소리도 VR기기에 관한 내용이었다.
“요즘 VR게임이다 뭐다 해서 회사 관두고 V튜버 한다는 놈들이 떼거지라더라.”
“아, 들었어. 현실이랑 완전히 똑같은 세계라며?”
“그것 땜에 우리 회사도 개판이야.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 이제 좀 살만해지나 했더니 새로나온 VR 때문에 여행사가 전부 망해버렸단다. 관광 도시는 다 망했고.”
“그래?”
이런저런 세상 얘기도 하고.
“너 여자친구는 있냐?”
“아니, 아직 솔론데.”
“야! 수현이 솔로란다!”
“어? 나 아는 친구 동생있는데 걔랑 만나볼래? 내가 주선해줄 게.”
“그럴까.”
소개팅도 나가겠다고 약속도 했다.
수현은 그간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나, 이런 일상적인 삶이 계속 이어지자 좀 힐링이 되는 걸 느꼈다.
“참나, 게임에서 스트레스를 받을 줄이야.”
하긴 스트레스가 쌓일 수 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해야할 일은 많지 온갖 사건들이 떠밀려 오지. 아직 제대로 세력도 구축도 못했는데 끔찍한 일만 닥쳐오고.
끔찍한 방식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에, 인신 공양 제물로 바쳐지는 제물, 머리에 나사같은 걸 박아서 사람을 세뇌하지 않나, 가족이라는 것들은 하나같이 미치광이여서 그 놈들을 보며서 안 미친 것이 다행이다.
특히 인체 실험은 단골 소재기도 했다. 거기다 꿈에 나올까 무서울 정도로 끔찍한 어인을 마주치기도 했다.
‘일반인이었으면 이미 PTSD를 겪고도 남지 않았을까. 응? 일반인?’
그러고보니, 수현도 일반인이다. 갑자기 뜬금 없이 게임 캐릭터 식으로 사고하고 있었다. 그간 너무 캐릭터에 이입해 있던 것이 분명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면서 눈 앞에 있는 사람에 집중했다.
“제 말 듣고 있는 거 맞죠?”
“아, 네. 물론이죠.”
머리카락을 초록색으로 물들여둔 여자가 눈앞에 있었다. 평소라면 만나는 것만이라도 삼생의 영광이었을 만큼 예쁜 여자였다.
이선화라니, 이름도 예쁘네. 한동안 그녀와 데이트를 했다. 소개를 주선 시켜준 친구에게는 술값을 거하게 내서 갚았다.
선화는 조금 집착하거나,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면 귀신같이 물어보는 것만 빼면, 수현이 만나는 게 과분할 정도였다.
근데 닉네임을 자기 이름에 맞춰서 꽃으로 썼다더라. 좀 익숙한 닉네이이었지만 어디서 본 거겠지 하고 그냥 넘어 갔다.
[플로나 : 오빠? 뭐해?]
[플로나 : 오빠? 자고 있어?]
[플로나 : 7시인데 벌써 잘 리가 엇지? 그지?]
아, 가끔 톡으로 답장을 해주지 않으면 이런 질문이 한 백개쯤 오는 것도 단점이긴 했지만, 그래도 장점이 많다. 애교도 많고, 챙겨주는 것도 많고.
곧 취직에도 성공했다. 중소 규모의 무역 회사였는데 사장이 마음에 든다. 동료들도 괜찮은 사람들인 것 같고.
세상을 구하는 거? 그런 것쯤은, 행복한 삶에 비하면 아무래도 상관없는 거 아니냐.
수현은 그간 VR게임에 정신이 팔렸던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참나, 그게 뭐라고 말이지. 오늘도 선화의 톡을 확인하면서 출근 준비를 하는 도중에, 문득 현관문을 누군가 두들기는 것을 확인했다.
“뭐지?”
현관문 앞에 소포가 있었다. 집으로 가져와서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음. 책인가?”
책을 돌려보니, 파기나레코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책 이름인데.
그러자 정신이 확 들었다. 이게 왜 여기 있지?
“어, 그러고보니 나 전투 중 아니었나?”
그러니까, 분명히……. 거 이상한 섬에 가서 사교도 새끼들을 만나서.
찌릿, 하고 머리가 울렸다. 이상할 정도의 경고가 온다. 그냥 잊어라.
책은 잘못 왔으니, 다시 원래 보냈던 주소로 반송하거나 그대로 태워버리면 된다. 그럼 계속 이렇게 행복하고 느긋한 삶을 보낼 수 있을 거다. 기억을 되돌려 본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플레이 했던 캐릭터가.”
현기증이 와서 머리를 붙잡았다. 더는 생각하지 말라고 누군가 경고한다.
하지만 수현은 늘 하지말라면 더 하는 편이었다.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는 타입이란 말이다.
“샤를 헥센이었지. 그리고 이건 환상이구나.”
무언가에 쫓기듯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삶이라.
환상이어도, 기분 좋은 꿈이었다. 하지만 샤를은 이미 결심했던 것이다.
평범한 삶을 위해서, 이 세상의 끝을 보겠노라고.
순간, 보고 있는 화면이 조각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