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궁지에 몰린 송버드의 허리에 백기사의 검이 박혔다.
“커헉!”
그리고 송버드의 다리를 낚아챈 거대한 크라켄의 촉수가 그를 들어서 반대쪽 바다로 패대기쳤다.
꽤 어려 번 패대기치자, 송버드는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 검을 들어서 자신의 다리를 잘랐다. 촉수로 잡힌 다리가 잘려나가 속박에서 벗어나자, 송버드는 그 즉시 자신의 몸을 불꽃으로 만들었다.
불꽃은 허공을 날아서 마치 길다란 선처럼 쭉 이어지면서 자신이 왔던 일렁이는 공간을 통과했다.
그의 뒤쪽에 일렁거리는 포탈로 뛰어들자 샤를은 계속해서 그를 추격했다.
‘역시 한 번에 두 수호자를 유지하는 건 어렵네.’
샤를은 성배 조각품의 영성 공급을 받고 있음에도 한계에 달했다는 걸 느꼈다.
영성이 부족한 것은 아니고, 샤를의 정신력이 모자라다. 현기증이 오고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백기사와 크라켄의 소환을 취소했다.
“리지안. 저 녀석을 쫓을 수 있겠어?”
“모래사막에 있다면 말이지.”
리지안과 함께 승강기 포탈을 역순으로 타고 이동, 모래사막이 가득한 이계로 도착했으나 송버드는 역시 온데 간데 없었다.
쓰러진 제나 헵번과 레플리카는 건드릴 겨를이 없었는지 그대로 포탈을 통과해 도망친 것 같다.
‘다리 한 쪽인가.’
이번엔 방심한 송버드의 다리 한쪽과 옆구리 뭉텅이를 가져갈 수 있었으나 완전히 죽이진 못했다.
‘그 정도 부상이라면 신성의 씨앗을 흡수할 수도 없겠지. 온전한 상태여도 불가능해서 존 도우의 신체를 쓰려고 한 걸 텐데.’
어쨌든 최후의 마무리를 지어야 하므로 샤를은 왔던 길로 빠져나갔다. 바깥은 여전히 탈피 클럽이었지만 분위기가 달랐다.
샤를은 놀라서 춤도 음악도 멈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웅성거렸다.
“바, 방금 봤어? 불꽃이 허공을 날아오르면서 이동했잖아!?”
“누군가 준비한 쇼 같은 거 아니겠어?”
“근데 그럼 저건 뭔데?”
그곳에는 외투 어딘가가 불이 붙어서 깜짝 놀란 사람들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면서 바닥에 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 글쎄다.”
“진짜 불 붙은 거야?”
‘저 방향으로 도망쳤군.’
불꽃의 형태로 도망치니 너무도 빨라 잡기 어려웠다. 헥센 가문의 저택에서 봤던 하얀 유령의 속도와 비슷할 정도였으니.
대신 샤를에게는 도와줄 사람들이 있었다. 심상 세계를 통해서 플로나와 에세나에게 이야기를 전달했다.
제롬은 샤를의 심상 세계에 아직 출입하지 못했으므로, 플로나에게 이야기를 전해두라고 말해뒀다.
“이제 우리 둘끼리 할 얘기가 남아있네 잘생긴 형씨.”
“그러게 말이지.”
리지안은 자신의 포탈 밖으로 빠져나오면서 샤를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리지안은 완벽한 무용수를 길러내겠다는 망상을 실현시켜줄 중요한 도구가 바로 존 도우였다.
존 도우를 해결하려면 리지안을 가장 먼저 해결하는 게 옳다. 존 도우가 싫다고 하더라도 리지안이 달라붙을 게 뻔했다.
“내가 하나 맞춰볼까? 당신은 정황상 내 제자를 추적하면서 아까 봤던 그 노인네를 노리고 있었지?”
“정확해.”
“그런데 내 제자에게도 따로 볼 일이 있고?”
“그렇다.”
“그건 뭐지?”
“보증.”
샤를의 말에 리지안이 말을 더 꺼내보라는 듯 눈을 번뜩거렸다.
“당신 제자는 헬파이어 클럽에서 중요하게 실험하고 있던 변이의 종자를 투약받았다. 그 뒤 보호관찰되고 있었다가 도망쳤다.”
“오홍홍. 그래서?”
“변이의 종자를 투약받은 뮤턴트는 높은 확률로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다. 존 도우는 에드먼드 피셔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원한을 갖고 있었지. 그리고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에드먼드 피셔를 우발적으로 살해했어.”
샤를은 존 도우가 에드먼드 피셔를 우발적으로 살해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고, 그건 사실이기도 했다.
“그럼 아까 그 가면 쓴 노인네 말인데, 왜 존을 노리는 거지?”
리지안의 물음에 샤를이 순순히 답했다.
“그는 존 도우의 신체를 빼앗을 생각이다. 두개골을 가르고 뇌를 이식할 생각이지.”
“뭐!? 그 완벽한 신체에서 뭔가를 더 빼가겠다고!?”
“그래.”
리지안은 골똘히 생각하듯 턱을 괴었다. 샤를이 그에게 말했다.
“그러니, 존 도우를 무명교에 입교시켜라. 당신도 마찬가지로.”
존 도우를 입교시키지만, 결코 제자로 삼지는 않을 것이었다. 일종의 외부 협력자 정도로 남겨둘 것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샤를은 무명자를 믿고 기도를 하는 사람들의 내면을 살필 수 있었다.
그 방법으로 존 도우가 무슨 일을 벌일 때, 혹은 그가 위험에 처하게 될 때, 샤를은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오홍홍. 무명교? 처음 들어보는 이름인데. 만약 거부한다면? 어떻게 되지?”
“이건 최후통첩이야.”
거부하면 존 도우는 제거될 것이다. 샤를의 눈이 차갑게 빛나자 리지안 특유의 웃음소리도 커졌다.
*
불길로 화해 도망친 송버드는 샤를의 부하들의 눈을 피해 도망치는 것에 기어코 성공했다.
부상은 심각했고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리고 뼈가 부러진 곳이 한 두군데가 아니었다.
과다출혈에 다리 하나는 스스로 잘라서 없다. 그럼에도 아직 송버드는 살아 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면서 좁디좁은 골목 한쪽에 숨어든 그는 즉시 천을 찢어 자신의 다리를 지혈했다.
“상대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어.”
존 도우를 보호하고 있던 영성자는, 혼자라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옆에 있던 그 남자. 엄청난 힘을 가진 영성자였다.
화천지옥검의 힘을 썼는데도 전혀 밀리지 않고 무한한 것 같은 영성을 바탕으로 주문을 시전한다.
“놈은 대체 뭐지? 마치 교주급 능력자 같았어.”
하지만 그가 알기로, 메트로폴의 4대 교단에서 그런 능력을 가진 교주는 없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교단이라고 지칭하는 사이비 교의 존재를.
“무명 교단…….”
무명 교단이라는 아주 작은 사이비 교단에 대한 정보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길, 무명자라는 신을 믿는 다는데 무명자라는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규모도 겨우 포도농장의 창고 하나 정도에 중하류층 사람들이 가는 곳이었다. 그래서 전혀 신경쓸 가치도 없다고 여겼다.
“조사해봐야겠군.”
툭. 툭. 툭.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경험상 상처 입은 채로 비를 맞으면 오래 정양해야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 이 장소를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라, 송버드는 지팡이를 들고 바닥을 짚었다.
자신의 부하에게 신호를 보내는 주문을 사용하려는 찰나에, 그의 앞에 누군가 나타났다.
“누구지?”
그건 처음보는 젊은 남자였다. 인자해보이는 눈매와 선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는데 긴 머리카락은 묶고 사각형의 안경을 걸치고 있었다.
영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아서, 일반인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직 비가 본격적으로 내리지도 않았는데 그는 우산을 쓰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당신은 누구요?”
그러나 어째서일까. 송버드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검술을 단련할 때, 절대적인 강자 앞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위압감을 느꼈다.
“아주 먼 미래까지 엿보았지만 당신이 가장 약해지는 때는 지금이더군요. 방심해서 준비를 덜한 나머지 작정하고 함정을 판 무명 교단의 교주에게 패배했을 때.”
“……!?”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요. 당신의 안에 있는 걸 가져갈 생각입니다.”
“뭐……?”
“신성의 씨앗 말이에요.”
송버드는 화천지옥검을 꺼내들었다. 신성의 씨앗의 존재를 알고 있는 일반인이라고? 그럴 리가 없다!
그러나 그 뒤, 어째서인지 송버드는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고, 심장은 그대로 튀어나와 있었다.
“바, 방금 꺼낸 것이 뭐지?”
찰나의 순간에 눈 앞의 남자는 무언가를 ‘열었다.’ 그 뒤에 기억도 시간도 사라져 있었다.
송버드의 심장에서 신성의 씨앗을 추출해낸 남자는 손에 넣은 것을 자루에 담으면서 말했다.
“이제 당신에게는 의미가 없는 것이죠.”
시체가 된 송버드를 뒤로 한 채 남자는 발걸음을 옮기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약해졌나보네요. 저런 자에게 일순간이나마 간파를 당하다니. 음. 어쨌든. 목적은 완수했군요.”
남자는 다음 목적지를 떠올렸다.
“이제 재단을 정리할 차례인가요.”
*
존 도우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낯선 방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곳에는 드레스를 입은 에세나가 있었다. 그녀의 앞 식탁에는 대량의 ‘케이크’와 차가 놓여 있었다.
에세나는 홍차를 들이마시면서 눈인사를 했다.
“이제 일어났나보네요?”
“여긴…….”
“근처 호텔이에요. 배고프지 않나요?”
배가 고프다. 미치도록 배가 고픈 존은 일어나자마자 에세나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케이크를 집어삼켰다.
무시무시한 칼로리가 몸에 채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먹으면 먹을수록 정신 없을 정도로 포만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대략 30인분의 케이크를 먹어치운 존은 그때쯤 제정신을 되찾을 수 있었다.
“꽤나, 게걸스럽게 드시네요.”
“아, 죄송합니다.”
존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완전히 개판이 되어 있었다. 손은 케이크로 끈적끈적거리고, 여기저기 튄 크림이 보인다.
“제가 너무 배가 고파서…….”
“듣던대로군요. 가면을 쓰고 난 뒤에는 엄청난 칼로리를 소모하는 건가요?”
존은 그 말을 듣고나서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 그, 그걸 어떻게.”
에세나가 풋풋하게 웃었다.
“가면을 쓰고 있을 때랑 완전히 딴판이네요.”
“아, 어. 으. 그. 그게.”
반쯤 패닉에 빠진 존에게 에세나가 물에 젖은 수건을 내밀었다. 존은 그걸 받아서 손을 닦았다.
“다시 소개하도록 하죠. 전 에세나 플라크. 무명 교단의 제자 중 한 명이지요.”
“아, 예. 이 먹을 것도 전부 준비해주신 이유는…….”
“그야 존 씨의 스승님이 이제 무명교에 입교하기로 했으니까요. 물론 존 도우 씨도 무명교에 입교해야하지만요.”
“예에에에에?”
뜬금없이 갑자기 자신의 진로가 결정된 존은 당황스러움을 내비쳤다.
“곧 존씨의 스승님이랑 제 스승님이 같이 올때니, 이야기는 그때 나눠보세요.”
정말로 조금 뒤에 리지안과 샤를이 나타났다.
그동안 에세나가 사정을 설명해둔 결과, 존 도우는 무명교에 입교하겠다고 수락했다.
그는 광명교를 믿고 있긴 하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었고, 상대의 제안이 단순히 종교를 바꾸라는 것 뿐이라, 순순히 수락했다.
그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하면 지불해야 할 대가 중에선 아주 값싼 정도였다.
먼저 무명교에 입교하기로 결정한 리지안은 샤를이 내민 제안이 매우 괜찮은 조건이라고 그를 설득했다.
반쯤 무념무상의 무용수를 키워내겠다는 목적에 미친 광인이라도, 그 방해물(샤를)이 너무도 강력해보이면 옆으로 돌아가는 것을 선호하는 법이었다.
리지안을 거의 죽일 뻔했던 불타는 검을 든 그 노인을 손쉽게 쓰러트리는 것을 보면서 리지안은 상대와 자신의 경지를 가늠하고는 대적하는 것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리고 그의 목적에서도 벗어난 길은 아니었다.
샤를은 리지안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계속 존 도우에게 춤을 가르쳐도 되고 리지안이 무엇을 하던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걸로 이 혼란이 해결 됩니까?”
“물론이지.”
샤를은 무표정하게 존 도우를 바라보았다. 그의 내면에 있는 붉은 가면을 꺼내지만 않는 다면 존 도우는 매우 성실하고 평범한, 어디에나 있는 청년이었다.
“경찰 조사는 더 진행되지 않을 거다. 에드먼드 피셔의 살인에 대한 죄는 계속 남아있겠지만 미제사건이 될 거다.”
“…….”
그렇게 말하면서 샤를은 에세나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건넸던 죄악의 붕대는 상대의 죄를 알고 있는 경우 강력하게 작동한다.
속죄하지 않는 이상 이 에드먼드 피셔의 살해에 관한 죄는 영원히 그에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것도 한 가지 족쇄가 되겠지. 사용하는 에세나나, 당하는 존 도우 둘 다 정확한 내막은 모르겠지만.
거기다 루이스는 샤를의 주문에 걸려 있는 데다가 샤를을 믿고 있으니 그를 통제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도덕적으로는 문제가 되겠지만.’
범죄자를 숨겨주고 그를 관리하는 것은 물론 범죄가 된다.
‘하지만 법을 지키려고 했으면 사이비 교주도 안 했지. 이제와서 범법이고 뭐고 말랑말랑한 생각이라니.’
생각해보니, 이미 샤를은 범죄자 그 자체였다. 일단 세뇌에, 사이비교에, 다른 사이비 교단을 대상으로 살인도 저질렀다. 이제와서 그런 생각을 해도 뭐.
존 도우는 너무나도 위험한 존재라, 평범하게 죄수가 되어 감옥에서 관리되기에는 너무 위험했다.
쇠창살을 구부리고 그냥 탈주할 수도 있는 데다가 존 도우를 잡으러 온 헬파이어 클럽원들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도 없다.
차라리 샤를의 관리하에 놓이는 것이 오히려 낫다. 샤를의 처지에서나 아니면 존 도우의 처지에서나.
뭐, 존 도우가 선량한 일반인을 살해했다면 생각이 조금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으나, 조사해본 바에 따르면 에드먼드 피셔는 죽어도 마땅한 놈이었다.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배우들을 마구잡이로 패거나 심지어는 불구로 만든 적도 있었다.
‘누군가’가 계속 비호해주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미 감옥에 갇혀 있었을 거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높은 확률로 보슈 백작 부인이 되겠지.’
에드먼드 피셔와 전혀 관계가 없는 것 보이지만 함께 다정한 사진을 찍은 것. 조사해볼 필요는 있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