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6화 - ‘완벽하군.’
샤를은 완벽하게 구현된 백기사를 보면서 흡족함을 느꼈다. 하얀 갑옷, 보기만 해도 가슴이 웅장해지는 백색 판금 갑옷과 서 있기만 해도 느껴지는 압도적인 위용.
재차 격렬한 검술이 펼쳐진다.
쾅! 쾅! 쾅!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송버드와 대등함을 넘어서 압도하면서 찍어 누르고 있다.
심상 세계에서 싸웠던 때보다는 약화된 듯했지만 그것만으로도 헬파이어 클럽의 클럽장을 몰아붙이고 있다.
‘여차하면 송버드의 약점을 공략할 생각이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겠어.’
누구에게나 약점은 있다. 송버드에게도 그가 취약해지게 되는 약점이 있었고. 하지만 그걸 꺼낼 필요가 없어 보인다.
조지아의 석검은 백기사의 전투에 개입하면 방해가 될 것 같아서 원래 목적인 방어로 돌렸다.
모노클의 능력은 원래 적에게서 방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 와중에 은근히 모래를 사용해 디디고 있는 땅 아래를 흐트러트리는 방법으로 교묘하게 리지안이 송버드를 괴롭히고 있었다.
모래바닥이 살짝 기울어진다. 원래라면 백기사의 검에서 완벽한 가드를 해낼 화천지옥검의 궤도가 뒤틀리면서 온 힘을 다해내지 못했다.
불꽃으로 이뤄진 보정이 있긴 하지만 그걸 넘어서는 강력한 백기사의 일격에 송버드는 뒤로 물러나면서 낭패를 본다.
“이대로라면 여섯 합 안에 끝나겠군.”
헬파이어 클럽장인 송버드는 검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어렸을 적, 2차 발목 전쟁에서 살아남았다는 제먼 왕국의 유명한 기병대원에게서 검술을 사사받을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스스로 검술을 갈고 닦아 스승도 뛰어넘게 되었다.
연륜과 경험이 쌓이게 되자 안목도 늘었는데, 눈앞에 소환된 하얀색 갑옷을 입은 그 기사가 검술에도 엄청난 조예를 가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천지옥검의 불길에도 전혀 그을리지 않는 마법저항력.
혈주찬상이 그에게 화천지옥검을 내려준 이후로, 검술에서는 누구도지지 않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합을 나누면서 이대로 어떻게 될지 미래를 읽을 수 있었다.
화천지옥검의 불꽃의 능력에 도움을 받더라도 여섯 합 안에 목이 베이고 죽는다.
첫 번째 검을 받고 몸의 불균형이 심해지고, 그 다음에는 비틀거리면서 균형을 잃다가 여섯 합째에는 완전히 방어도 하지 못하고 목이 달아난다.
그는 자신이 상대를 얕보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이런 존재를 소환할 수 있을 정도라면 상대를 경시하지 않았어야 했다.
그러니 진심으로 상대하기로 했다.
가장 처음으로, 상대가 가진 지형적 어드밴티지를 없애기로 했다. 이런 모래로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저 대머리 마도사가 사용하는 모래 주문에 매우 취약하다.
그럼 공간 자체를 바꾼다. 모래가 없는 이계를 떠올리면서 품에서 흰색 큐브를 꺼냈다.
정사각형의 무늬 없는 큐브가 꺼내지자 샤를이 깜짝 놀랐다.
송버드는 검을 크게 휘둘러서 백기사를 밀어냈다. 여섯 합안에 목이 베일 것을, 세 합만에 목이 베이는 악수로 전환했다.
하지만 충분했다. 지금의 전투에서 얻은 불리함을 초기화할테니까. 송버드가 화천지옥검을 들어서 하얀색 큐브를 베어버리려고 하자 샤를이 외쳤다.
“저것부터 막아!”
“어따 대고 명령이야!”
리지안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착실하게 손을 뻗어서 모래의 사슬을 형성한 뒤, 송버드의 팔을 감쌌다.
뭔지 모르겠지만 위험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낸 것이었다. 하지만 그도, 백기사도 검으로 큐브를 내려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그 순간 공간이 일렁거리면서 파동이 퍼져나갔다.
샤를은 그 큐브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 재료는 꿈 조각으로 이뤄져 있다.
‘이계에서 다른 이계로 이동시켜주는 물건이잖아.’
통칭 승강기라고 부른다. 진짜 승강기는 아니고, 이계의 하층에서 중층으로 올라간다거나 하는 식의 조절이 가능해서 그렇다.
승강기가 터지자마자 리지안이 만든 사막에서 또 다른 세계로 이동되는 임시 포탈이 또 형성되었다.
샤를도, 리지안도, 송버드도 그 포탈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오아아아아! 이게 뭐야아앗!”
“썩을!”
“하하하! 그곳에서 보자고! 친구들! 다시 싸워보자!”
재차 이동되는 것을 보면서 샤를은 밝은 빛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어? 여긴 어디지?”
송버드가 준비한 또 다른 이계 어딘가 한복판에 떨어질 거라고 생각한 샤를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 곳은 단절된 공간 사이로 들어온 것처럼 목소리도 형태도 없었다.
그 사이에 촛불이 넘실거리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다.
샤를은 상대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단번에 보고도 알 수 있다.
“광명자……?”
마치 공허처럼 아무 것도 없는 공간이 있었다. 별 하나 없는 어둠만이 가득한 공간은 하늘도 바닥도 없어 보였다.
붕 뜬 채 주변을 살피던 샤를은 어딘가에 촛불처럼 빛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거대한 힘에 전율했다. 마치 ‘사악한 신’들에게서나 느껴질 법한 엄청난 힘의 파동이 그 불꽃에서 보인다.
불꽃 사이로 희미하게 인간의 형상이 보이지만 정확한 형태를 가늠할 수 없었고 계속 직시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강한 빛이 흘렀다. 그것은광배(光背)였다.
그 존재의 허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어서 한 눈에 봐도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이 타오르는 것 같은 착각을 느끼면서 샤를이 본능적으로 말했다.
“광명자……?”
광명 교단의 주인이자 현 시대 인류에게 가장 많은 추종을 받는 신인 광명자가 그 앞에 있었다.
그리고 샤를은 왜 자신이 이곳으로 끌려왔는지 알았다.
‘승강기’의 강제 효과로 샤를이 이계에서 이계로 이동하는 동안 마치 하이재킹 하듯 어떤 존재가 그를 끌어당겼음이 확실했다.
【찾고 있었다.】
“날 말입니까?”
마치 거룩한 존재가 읖조리는 것 같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송버드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납치되듯 광명자의 화신 앞으로 나타나게 될 줄은 몰랐다.
【예전부터 그대를 주시하고 있었지.】
“예전부터라니…….”
상대가 샤를을 먼저 찾고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샤를은 자신이 샤를 헥센이 되면서 광명자에게 관심을 끌 만큼 대체 무엇이 달라졌나 생각했지만 여전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게임 플레이를 할 때, 이런 식으로 이계에서 이계로 이동하더라도 광명자에게 하이재킹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짐작가는 일이 떠올랐다. 파기나레코르가 달란트를 먹고 주문서에 주문을 적을 때마다 광명자의 주문만 주구장창 나왔다는 사실을.
“왜죠?”
【이 영원한 반복 속에서 그대만이 다른 행동을 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게임 속으로 들어왔겠지?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샤를 헥센이었을테고.】
“어, 어떻게 그걸?”
【역시 그랬군.】
이런 당황스러움은 처음이다. 샤를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꿰뚫는 말에 엄청난 충격이 닥쳐왔다.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던 사실을 광명자가 알고 있었다. 그러자 동시에 여태까지 품고 있던 의문이 화산처럼 분출되었다.
“다, 당신이 절 여기로 보낸 겁니까? 대체 왜 여기로 보낸거죠? 그 게임은 대체 뭡니까?!”
【나도 그랬다.】
“……!?”
갑자기 내뱉어진 의뭉스러운 말에 샤를은 곧이어 이유를 알게 되었다.
“당신도 게임 속에 끌려왔다는 겁니까?”
【그렇다.】
샤를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신조차도 이 세계에 끌려왔다고?
【나는 본디 평범하게 게임을 즐기던 사람이었다. 사이비 교주 시뮬레이터라는 우스운 이름의 게임이었지. 하지만 그것이 현실이 되고, 그 결말의 끝에 나는 광명자라는 신이 되어 질서 그 자체가 되었다.】
“……!”
놀라움의 연속이라, 샤를은 계속 입을 벌리고 있었다. 그 이전에도 이 게임 속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때 주변이 공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느려졌던 감각이 마치 빨라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자 광명자가 말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내 마지막 조언은 이거다. 지금 하던 대로 하되, 누구도 믿지 마라. 내 사도가 그대를 도우러 갈 것이다.】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자 샤를이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아직 묻고 싶은 게 많이 있…….”
공허로 된 공간에서 역으로 빨려 나가는 것처럼 뒤로 쭉 당겨진 샤를은 어느새 또 다른 공간에 도착해 있었다.
푸르른 바다가 보인다. 바다 아래로 얕게 깔린 땅은 발목 정도만 찰 정도였지만 지평선이 보일 때까지 전부 바다로 이뤄져 있었다.
광명자의 하이재킹이 끝나고, 갑작스럽게 공간이 이동되어 있었다. 꽤 오랜 시간 동안 다른 공간에 있었던 것 같은데 이곳 시간으로는 전혀 지나지 않은 것처럼 타임랙이 없었다.
송버드의 뒤편으로 거대한 메아리 같은 것이 보였다. 원래 이계로 되돌아가는 포탈이었다. 그를 쓰러트려야만 저 곳을 넘어갈 수 있다.
“자, 여기라면 공평한 공간이 되겠지. 그렇지 않나 친구들?”
송버드가 하는 말에 리지안이 반박했다.
“여긴 모래가 없는데 뭐가 공평해!”
“나도 이곳에는 연관이 없다네 대머리 친구. 자네의 소환수도 없고 내 소환수도 없지.”
“내 소환수는 있네?”
샤를은 끼어들어서 송버드에게 백기사를 날려보냈다.
“그렇게 나와야지!”
송버드의 검을 쥐지 않은 손에서 광선이 쏘아진다. 백기사는 대검의 옆면으로 광선을 빗겨냈는데 빗겨낸 광선이 바닥에 쏘아지면서 거대한 수증기가 피어올라 연막을 만들어냈다.
그곳에서 엄청난 속도로 송버드와 백기사의 검이 격돌하고 있었다.
리지안은 궁시렁거리면서 자신의 발 아래에 있는 모래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주문을 외우고 있었지만 여전히 효과는 별로 좋지 않았다.
“젠장. 물에 젖은 흙 따위는 주문의 재료로 적합하지 않다고.”
그의 장점이 완전히 봉쇄되는 듯하여,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궁리를 짜고 있었다.
수증기 연막 속에서 미친 듯이 격전을 벌이던 백기사와 송버드의 틈 사이로 샤를은 무존자의 창 주문을 완성했다.
마구잡이로 쏘아내면서 샤를은 파기나레코르를 왼쪽으로 띄웠다.
-내가 사용했던 백기사 소환주문, 기억하고 있지 파기?
-그런데.
-그럼 그 주문을 네 주문서에 새겨넣어.
샤를과 파기나레코르의 주문은 링크되고 있었으므로 파기나레코르도 샤를이 사용하는 주문을 사용할 수 있었다.
-준비됐어?
-그렇다 쭈인!
파기나레코르는 샤를의 위쪽에서 또다른 주문을 형성하고 있었다. 새겨진 주문이 완성되면 파기나레코르가 다른 존재를 부를 것이다.
“원래는 내가 부르려고 했지만 지금 능력으로는 하나 밖에 소환할 수가 없네.”
파기나레코르가 주문을 새길 때 까지 샤를은 미친 듯이 무존자의 창 주문을 사용하고 있었다.
“방해를!”
“아, 이대 일도 된다면서?”
샤를은 히죽거리면서 그를 약올리면서 성배 조각품의 거의 무한해 보이는 영성을 계속 리필 하면서 창 주문을 멀리서 쏴버렸고 그 사이에 백기사가 달려들어 송버드를 조지고 있었다.
“그만!”
송버드는 그렇게 외치면서 백기사를 기어코 밀어서 넘어트렸다. 백기사의 왼쪽 허리춤에 검이 박혔다가 떼어졌는데, 본래라면 화상을 입어야 했지만 그곳에서는 나비들이 피가 흘러나와야 할 곳에서 대신 흘러나오고 있었다.
“내가 이겼다!”
“아닌데?”
-주문 복사 완료! 이제 시전한다구!
샤를은 심상 속에서 또다른 존재를 불러냈다. 샤를의 심상 세계에는 폭풍치는 바다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바다 아래에는 촉수를 가진 거대한 생물체가 있었다.
-전부 꺼내기는 어렵겠는데?
-역시 그럴 것 같았어. 크라켄의 덩치는 너무 커서 어차피 밖에 빠져나오기도 어려워.
이 공간은 얕은 바다로 되어 있어서 어차피 신체 전체가 나오는 건 어렵다.
기어코 나비들이 모여서 그 생물의 본체 전체를 꺼낼 순 없었고 일부분만을 구현할 수 있었다. 허공에서 거대한 문어의 촉수 다리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이, 이건 뭐냐!”
“다굴 만세다!”
마도사는 역시 소환 트리가 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