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 3개월 전.
“실험이요?”
“예. 신체에 어떤 영향이 있는지 확인할 신약 실험입니다. 감기약을 만들려고 하고 있거든요. 임상실험 때문에 피험자를 받고 있답니다. 신약 투여후 약 3달 정도 격리 관찰하는 내용입니다.”
잘 차려입은 옷에 각진 안경을 입은 한 남자가 존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각진 턱과 경제적으로 부유해보이는 옷차림, 당당한 태도는 그를 주눅들게 했다.
생활고 때문에 저녁에서 탈피 클럽이라는 곳에서 따로 겹벌이까지 하는 중인 존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 저녁에 일이 있는데…….”
“비용은 월급으로 나가고, 한 달에 500파운드입니다.”
“예, 예?”
낮에서 일하는 막노동 일이 주급 3파운드. 그리고 밤에 일하는 탈피 클럽의 일이 주급 6파운드.
엄청나게 고된 노동과 잠을 자지못해 쌓이는 피로, 그렇게 몸이 축나는 것을 생각하면 월에 겨우 36파운드를 벌어가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돈은 엄청난 유혹이었지만 동시에 존은 이런 일은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 지금 말씀드려야 하나요?”
“아닙니다. 이쪽에 명함을 드릴테니 전보를 주십시오. 지정된 위치에서 대기하고 있으면 저희가 데리러 갑니다.”
“……알겠습니다.”
“서둘러서 결정하는 게 좋을 겁니다. 이런 제안은 여기저기 하고 있고, 늘 정원이 존재하거든요.”
그렇게 인사를 남긴 남자가 떠나자 존은 탈피 클럽으로 출근했다.
‘약을 투여했다가 잘못 되면 어떡하는데? 그리고 빈민가에 와서 굳이 그런 사람을 구하다니 너무 수상하잖아.’
탈피 클럽에 도착하면서도 계속 그 생각 뿐이었다. 그는 콜르멜르 거리로 출근했다.
콜르멜르 거리는 콤포트 단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늦은 밤에 출근하는 그는 피로와 노동에 찌들어 퇴근하는 노동자들을 볼 수 있었다.
고된 일을 마치고 놀아보려는 불쌍한 하루살이들의 종착지가 바로 유흥가인 콜르멜르 거리였다.
거리 입구부터 화려한 조명이 그를 감쌌다. 이것이 극장 안의 스포트라이트라면……. 늘 그는 그런 생각을 하곤 했다.
“어이, 형씨 멍하니 있지 말고 비켜.”
그러나 그것은 망상일 뿐이고 현실은 한량들이 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이윽고 탈피 클럽에 출근한 존은 마담 엘레느가 입구 앞에서 담배를 뻑뻑 피우는 걸 발견했다. 동방에서 온 골동품이라는 곰방대를 입에 물고 있는 마담은 존을 보면서 말했다.
“늦었잖아. 얼른 뒤로 가서 옷 갈아입어.”
“예, 마담.”
존은 몸에 착 달라붙은 타이즈 옷을 입었다. 이게 저녁에 클럽에서 일하는 무용수들의 옷차림이었다. 지급된 가면을 들었다. 밋밋하고 눈 코 입만 뚫려있는 가면이었다.
전혀 특색이 없어서, 어쩐지 존은 이 가면이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된 극장에서 일을 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언제나 시궁창이었다.
댄스 공연을 마친 뒤에 땀에 흠뻑 젖은 존은 땀을 닦으면서 동료를 바라보았다.
몇몇 남색가들은 이곳에 와서 꼭 남자 무용수들을 원했다.
남자 무용수들이 들고 있는 가면을 지목하면서 그것을 사겠다고 돌려서 말한다.
그러면 무용수들은 그들에게 돈을 받고는 으슥한 곳으로 사라지곤 했다.
저런 곳까지 떨어지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존은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꽤 부유해 보이는 뚱뚱한 대머리 남자가 그가 가려던 길을 막아섰다.
“자네, 아까보니 춤을 정말 잘 추더군. 와서 술이나 한 잔 하고 가는 건 어떤가? 자네 가면은 내가 사지.”
“아, 저는 그런 걸…….”
“그래? 이건 어떤가?”
그 뚱뚱한 남자는 품에서 1파운드짜리 지폐 수십장을 들고 존의 앞에서 흔들었다.
존은 저곳까지 더 떨어지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러므로 필사적으로 거절해 밖으로 빠져나왔다.
“젠장.”
“어머, 얘. 안했어?”
밖으로 나오자 존처럼 평범하게 일하러 온 남자가 아니라, 진짜 여장을 한 게이인 리지안이 그를 보면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리지안?”
“네가 생활고에 시달리고 했다고 했잖아? 그래서 내가 사람을 좀 소개시켜주려고 했지.”
“도움은 고맙지만, 미안합니다.”
“아직도 연극에 미련이 남아?”
“…….”
리지안은 팔짱을 끼고 희미하게 웃었다. 그의 립스틱이 보랏빛으로 반짝거렸다.
“배우는 굶어죽기 딱 좋은 직업이야. 알잖아? 몇몇 화려한 조명을 받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잊혀지기 마련이지.”
“압니다.”
“넌 역시 주연 배우가 될 사람은 아니야. 너무 특징이 없어.”
더 말하지 않아도 잊혀진 사람이 바로 존 도우였다. 그는 입을 다물고는 바닥에 철퍼덕 앉았다.
“그에 비해 무용수는 먹고 살기라도 하지. 저길 봐.”
존은 그가 빠져나왔던 탈피 클럽의 안쪽에서 벌어지는 분홍빛 불빛과 충격적인 광경을 직시했다.
아까봤던 그 뚱뚱한 남자가, 가면을 쓴 여러 남자, 여자 무용수들에게 포위당해서 마치 가죽이 벗겨지듯 벗겨지고 있었다.
“너 왜 우리 클럽 이름이 탈피 클럽인지 알아?”
“…….”
“저 사람들은 서로 나체가 되어서 현실의 모든 것을 잊으려하지. 남자고, 여자고 한데 할 것없이 뒤엉켜서 육체의 쾌락으로 말이야.”
“그렇게 해서 뭐가 남습니까?”
“동물은 성장하기 위해 허물이나 껍질을 벗고 무언가 ‘다른’ 존재가 되지. 인간도 마찬가지야. 얇고 붉은 가면 한 개만 벗어 넘길 수 있으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어.”
리지안은 존의 귓가에 다가가며 그렇게 귓속말을 했다. 존은 뒤로 물러나면서 말했다.
“저, 전 됐습니다. 먼저 가보겠습니다.”
떠나는 그를 향해 리지안이 말했다.
“저런, 진정한 무용수가 될 마음가짐을 아직 갖지 못했네. 안타까워라.”
다음날 존은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퇴폐적인 탈피 클럽을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막노동 일도 그만두기로 했다.
차라리 신약 실험을 받는 게, 그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일이었다.
전보를 보내자 검은색 정장을 입은 사람들 여럿이 나타나더니 존을 데리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자동차 바깥에 검은색 차양막이 있어서 밖을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가 밖으로 나오자 병원 같은 시설로 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존은 그와 비슷한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하나같이 현실에 찌든 인간들.
그런 사람들이 모두 있었는데 각자 깨끗하게 씻고 환복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 한 의사가 나타났다. 특이한 알약을 하나씩 꺼내 놓고 그들에게 먹으라고 지시했다.
“자, 경구 투약입니다.”
존은 알약을 집었다. 그리고 입으로 넘겼다.
*
생각해보면, 그런 일은 그만 뒀어야 했다. 현실에 치이더라도 그곳에 있어야 했다.
존은 자신의 팔이 울룩불룩 치솟아 오르는 걸 보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날’의 기억이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면서 잠에서 깨어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여긴 그가 잠들어있던 판잣집이었다.
“헉, 헉.”
그 미친 실험실을 탈출한지 이제 일주일이 조금 넘었다. 당연히 강제로 탈출했으니 한 푼도 받지 못했다.
무언가로 ‘변이’되던 자신의 신체. 얼른 소매를 걷어서 팔뚝을 보니 살구색이었다.
“…….”
그러나 지금은 잠시 잠잠할 뿐이지 또 때가 되면 마치 총알의 격철을 당긴 것처럼 격발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무언가 방아쇠 같은 시도가 있으면……. 그렇게 된다.
저벅. 저벅.
바깥에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그는 누군가의 방문을 받았다. 며칠 전부터 협력하고 있던 벡토라는 기자인가 싶어서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는 굳어졌다.
*
“여긴 언제나 시궁창 같은 냄새가 나는군.”
사자 가면의 영성자, 고든은 긴 추적 끝에 추적 대상이 다시 빈민가로 되돌아갔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리고 그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빈민가로 향했는데,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코를 찌르는 냄새에 가면 뒤로 인상을 찌푸렸다.
누군가 노상 방뇨하고 지나간 흔적, 싸구려 공업용 알코올 같은 술을 마시고 취한 취객들이 뱉은 전날 먹었던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토사물.
“이딴 곳에서 살다니.”
피험자 존 도우는, 이런 냄새가 나는 골목길 근처에서 판자를 가져와 집 비슷하게 만들어둔 채 살고 있었다.
고든은 그곳에서 손쉽게 존을 찾아냈다. 존은 고든의 얼굴을 보자마자 떠올랐다.
피험자를 모으겠다던, 그 남자. 안경을 쓰고 각진 턱을 가진 남자. 사자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 체형과 특유의 분위기를 잊을 리가 없었다.
그는 당장 움직여서 도망치려고 했으나 그의 앞을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나타나 가로 막았다.
“존 도우. 어딜 그리 급하게 가려고 하나? 실험은 마저 끝내고 가야지. 우리 계약했잖아. 계약서라도 보여줘?”
“계, 계약? 그런 불법 계약은 난 한적이 없어! 그 알약, 처음부터 감기약이라면서 거짓말 했잖아!”
“하, 이것 참.”
고든은 검은색 장갑을 벗어서 옆에 있는 남자에게 건넸다.
그리고는 존 도우의 멱살을 끌어당기면서 그의 면상에 주먹을 날렸다.
“네놈이.”
퍽.
“도망가서.”
퍽퍽!
“나만 좆 될뻔 했잖아.”
얼굴이 피범벅이 된 존 도우의 멱살을 놓자 그가 바닥에 쓰러졌다. 그런 그의 앞에 고든이 쪼그려 앉아서 사자 가면을 들이밀었다.
“잘 들어. 넌 그냥 실험체일 뿐이야. 불법 계약? 해지? 그런 건 힘이 있는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거야. 너같은 밑바닥 기생충 같은 놈들은 그냥 우리가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돼. 네놈이 사라진다고 해도 누구 하나 알아챌 것 같아? 아무도 몰라 병신아.”
꿈틀.
“하, 증말. 클럽장님께서 관대하게 용서해주셔서 다행이었지 안 그랬으면 진짜.”
몸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뭐해? 빨리 이놈 안 묶고.”
“예.”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존은 품에서 가면을 꺼내 들었다. 탈피 클럽에서 받았었던 그 하얗고 밋밋한 가면.
어째서이지 그것이 그의 오른쪽 손에 들려 있었다. 리지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얇고 붉은 가면 한 개만 벗어 넘길 수 있으면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어.
어느새 피처럼 붉어진 존의 가면이 그의 얼굴에 딱 달라붙었다.
“뭐냐?”
“응?”
검은 장정을 입은 남성이 그를 끌고 가려고 손을 뻗었다. 존은 그 손을 마주 잡아서 그대로 꽉 쥐어서 으깨버렸다.
손가락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마치 압착기로 사람 손을 뭉개버린 것처럼 그 사이사이를 파고들었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뭐야?”
고든은 담배를 피려다가 고개를 돌려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바라보았다.
“무슨?”
쾅!
옆쪽에서 달려드는 남자를 그냥 주먹을 뻗은 것만으로 날려버렸다. 수 미터를 날아간 남자는 벽면에 부딪혔다. 갈비뼈가 모두 부러졌고 내부 장기는 어육으로 분쇄되어 있었다.
“하, 이것 참. 열받네.”
존은 손을 잡고 있던 남자의 얼굴을 그대로 쥐더니 스펀지를 짜내는 것처럼 짓눌러 잡고는 다른 손으로 목을 돌려서 척추까지 뽑아냈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아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뭐, 뭐야!?”
“괴, 괴물이다.”
검은색 장정의 남성들은 너무도 놀라 총을 뽑아들었다.
“초, 총 꺼내!”
권총을 뽑아든 장정들이 하나같이 존을 겨누었다. 존은 아주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쏴 봐.”
타타타타타타탕! 타탕타타탕!
총알은 단 한 발도 존에게 맞지 않았다. 에워 싸고 있는 장정이 여섯이 넘는 데도, 하나같이 공포에 짓눌려서 바로 코앞에 있는 존을 맞추지 못했다.
존은 자세를 낮추며 달려 들었다. 맹수가 나타난 것처럼 상대방을 그대로 찢어버렸다.
악력만으로 팔다리를 찢는 걸 보고 장정들은 고성을 질렀으나 그들은 붉은색 가면을 쓴 존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흐음. 도망쳤나.”
존은 전신이 피로 범벅이 된 채 주변을 훑었다. 장정들은 모두 죽였지만 주범인 고든은 뒤도 보지 않고 도망친 것 같다.
존은 피로 범벅이 된 머리카락을 올백으로 넘겼다. 그리고 목을 양쪽으로 꺾으면서 몸을 풀었다.
“아, 역시 움직이고 나면 배가 고파. 식료품 사둔 게 얼마나 있지?”
가면을 쓴 존은 판잣집에 보관해뒀던 캔을 닥치는 대로 까서 입에 털어 넣었다. 가면이 거슬려서 벗을까 했지만, 벗고 나면 그는 더 이상 주인공이 아니게 된다.
“탐정과 기자 녀석, 분명히 날 쫓아오겠지.”
존은 자신을 탐정이라 밝혔던 샤를과 벡토를 떠올렸다.
“도망칠 곳이 필요하겠어.”
도망칠 곳이라.
생각나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도와줄지 안 도와줄지는 아직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