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 신년 휴가 및 겨울에는 이 도시는 꼼짝도 안 하고 아무것도 안 한다. 특히 샤를 같은 외래교수들은 4월까지는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샤를은 이 여유를 이용해서 메인 스토리 라인 중에서도 중요한 사건 하나를 미리 예방할 셈이었다.
그는 심상 세계에서 가져온 물건을 꺼내들었다. 그건 조그만 유리병이었다. 알약이 들어있는.
저택에서 봤던 앵무새, 암흑성도회 그누사 일파의 신도 안토니오 세스파데스는 어떤 알약을 갖고 있었다.
이름은 ‘변이의 종자’.
이건 협력하던 헬파이어 클럽의 영성자를 뒤통수 치고 얻어낸 물건이었다.
그땐 상황이 너무 급박한지라 간단히 넘어갔었지만 이건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가서는 안 되는 물건이었다. 이게 바로 칼튼 교수의 이계의 문을 여는 사건 이후의 ‘뮤턴트’ 사건의 시발점이기 때문이었다.
‘뮤턴트’ 사건이 시작되는 것은 올해 봄. 몇 달 남지 않았다.
헬파이어 클럽과 암흑성도회에는 주력으로 삼는 장기의 차이가 있다.
암흑성도회는 어딘가 다른 이계에서 무언가를 ‘소환’해내는데 주력한다면 헬파이어 클럽의 마법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것에 주력했다.
‘생물 변화’와 ‘영적 변화’가 그들의 주력이었다. 그중에서도 생물 변화는 극적이고 무차별적인 인체실험을 통해 만들어졌다.
그 정수가 바로 이 변이의 종자였다. 처음에는 평범하게, 인간이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에 관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그 사건의 이면에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신성의 씨앗에 관한 문제였다.
신성의 씨앗은 너무도 강력하고 위협적인 물건이라, 각 교단은 서로 대처 방안이 달랐다.
암흑성도회에서는 지금은 아니지만, 곧 씨앗을 쪼개서 여러 계파에 나눠가지도록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여러 명의 교주를 양산한다.
조각구원회는 샤를이 박살냈던 그 특별한 기계 장치를 이용해서 씨앗을 몸에 받아들인다.
어부형제단은 깊은 심해로 향해, 그곳의 특별한 장소에서 오랜 시간 수양하는 방식으로 씨앗을 받아들이게 된다.
헬파이어 클럽의 클럽장은 처음에는 평범하게 자신이 신성의 씨앗을 받아들이려고 했으나 너무도 거대했던 힘으로 인해 도저히 보통 인간의 몸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이 변이의 종자를 실험에 사용해서 씨앗을 받아들이고도 견딜 수 있는 육체를 완성하는 것에 도전하게 된다.
그걸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완성된 것이 바로 ‘변이의 종자’라는 알약이었다.
이 변이의 종자를 몇몇 사람들에게 투여해 최상의 육체를 형성한 뒤, 헬파이어 클럽의 클럽장은 그 육체로 자신의 뇌를 물리적으로 옮겨 갈아탈 셈이었다.
비스타 헥센이 영혼을 갈아치우는 방식으로 타인의 몸을 빼앗았다면 헬파이어 클럽은 외과적인 방법으로 몸을 빼앗는 셈이었다.
그걸 위해 변이의 종자를 투여받은 실험체들이 양산된 것이 바로 ‘뮤턴트’ 사건이었다.
샤를은 책상을 톡톡 두들겼다. 사건이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게 사건이 되는 이유는 간단했다.
변이의 종자를 먹은 실험체 하나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변이에 적응하며 그를 만든 이들의 예상을 뛰어넘었던 것.
그래서 혼란을 틈타 탈출한다. 이후에는 그걸 막으려는 헬파이어 클럽, 그리고 다른 교단들이 끼어들면서 결과적으로 메트로폴의 질서는 난장판이 된다.
“절대 그 꼴은 못 보지.”
메트로폴의 분위기가 지금 이상으로 흉악해질 것이다. 샤를은 그 시발점이 되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칼튼 교수의 차원문은 항상 열리는 운명을 맞이하니 막기 어렵지만, 이번 사건은 언제 어디서 열리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막기가 어렵다.
온갖 장소에 무작위로 시작된다. 이건 게임 플레이마다 랜덤이어서 도저히 그 근원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샤를은 자유롭게 행동하면서 메트로폴 전체의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합법적으로 관여할 수 있으면서 그에게 정보가 쏠리게끔 만들고 싶었다. 생각을 좀 하다가 돌파구를 찾아냈다.
샤를은 탐정 자격증이 있었다. 경찰서의 인맥인 루이스도 있겠다.
“겨울 동안에는 탐정 사무소를 열어야겠네.”
생각하자마자 실천에 옮겼다. 잠깐 3개월 정도 임대받는 식으로 도심지에 가까운 세인트 생시르 거리에 사무소를 하나 냈다.
돈은 문제가 아니었다. 자격증이야, 경찰서에서 발부받았고, 공식적으로 총포와 도검 소지증도 경찰서에서 얻었다.
정식으로 건 사무소 이름은 ‘헥센 가 탐정사무소.’였다.
사실 겨울 동안 할 것이 없어진 샤를이 소일거리를 찾을 겸 만들어둔 사무소였다.
옷은 새로 샀다. 디어스토커 캡에 흰 셔츠와 멜빵 바지. 그리고 줄무늬가 가득한 케이프 코트를 입으니 영락없는 탐정이었다. 아, 물론 파이프 담배도 잊으면 안 된다.
비흡연자인 샤를은 그냥 장식용으로 구매했지만.
*
“허억. 허억. 허억.”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오른 것 같다. ‘그 알약’을 먹고 나서 든 생각은 자신이 미쳤다는 생각뿐이었다.
온몸에 힘이 넘치고 워낙 살이 없어서 뼈만 앙상했던 그의 몸은 근육질로 변해 있었다.
하루에도 몇십 번씩 식욕이 돌고 음식이 있으면 전투적으로 먹어치웠다.
‘그 개 같은 놈’을 죽인 지 하루. 그동안 배를 곪았던 그는 그의 집에 있는 음식을 전부 먹어치우고 나서야 먹는 것을 그만두었다.
끔찍할 정도로 솟아나는 음식에 대한 탐욕과 호전적인 욕망. 하루에도 몇 번씩 온몸의 근육이 비틀릴 정도로 오는 경련과 고통.
왜 ‘그 알약’을 먹었을까. 그건 미친 짓이었다. 그날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절대 그 약을 받지 않았겠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더 있으면 경찰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도망쳐야 한다.
*
며칠 동안 샤를은 별 흔적을 못 찾고 죽을 쑤고 있었다. 뭐, 간단하게 찾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다.
도심지인 세인트 생시르 거리에 있지만 사무소 자체가 여러 건물 사이에 후미진 곳에 있어서 손님은 그다지 없었다.
가끔 플로나와 에세나, 그리고 모리가 잠깐 찾아온 것을 빼고는 한산함 그 자체였다.
오늘도 출근해서 매일같이 각종 신문들을 읽다가, 메트로폴 타임지 1면에서 살인 사건을 발견했다.
[충격, 겨울 휴가 중에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 사건.]
[예술의 거리 몽푀르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살인 사건. 피해자는 유명 오페라 배우, 고(故) 에드먼드 피셔. 너무도 끔찍하게 난자된 얼굴 탓에 알아보기 힘들었으나 그가 입고 있던 옷 때문에 겨우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은 곧 살인범을 잡아낼 수 있을 거라고 말하며……]
“…….”
이런 살인이 있었던가? 어쩌면 있었을지도 모른다. 샤를의 정보는 이 세계에서 메인 스토리에 극단적으로 편중되어 있었다.
그래서 수많은 일이 일어났음에도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유래 없이 강력한 영성을 지니게 된 지금, 이 사건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느껴졌다. 이게 어쩌면 샤를이 찾는 사건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사건에 개입할 생각이었다. 그때, 탐정 사무소 안으로 아는 얼굴이 나타났다.
“어라? 형사님?”
“이거, 안녕하십니까? 샤를 교수님. 아니지, 탐정님이라고 불러야겠군요.”
루이스 형사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사무소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 들어오시죠. 준비해 둔 것이 커피밖에 없네요.”
루이스 형사는 도검이나 총포 소지 허가를 딸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었다.
이전에 샤를이 그를 도와줬던 것을 계기로(반쯤은 광명자의 등불 주문으로 인한 매료의 효과였지만) 루이스는 샤를에게 여러 번 도움을 줬다.
그중에 하나는 에브렌 린덴을 소개해 준 것이었다.
‘에브렌 린덴을 소개해준 것도 도움이라고 하면 도움일 수 있겠지.’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커피를 꺼내와 그에게 대접하면서 루이스에게 오늘의 목적이 무엇인지 물었다.
“아, 이거 실례. 오늘은 몽푀르 거리의 배우 살인 사건 때문입니다. 그 일로 인해 조언을 얻을 수 없을까 해서요.”
“살인 사건? 이것 말입니까?”
샤를은 신문을 들어서 오늘 자 1면이 올라온 것을 보여주자 루이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저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도 일주일 전이군요.”
커피를 후루룩 마신 루이스가 말했다. 샤를로서는 오히려 환영이었다. 이 일에 끼어들 빌미를 오히려 만들어주니까.
루이스는 커피를 한 잔 마시고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이번 살인 사건이 그냥 살인 사건이 아닐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웬지 찜찜해서 말입니다.”
“어떤 점에서요?”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원래 사건 정보를 누설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지만 루이스는 정말로 이상한 경험을 한 탓에, 그의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살인범이 말입니다. 사람을 죽인 뒤에 그 집에 하루 정도 머물렀습니다. 뭐, 대담한 살인범이라면 그래도 이상하진 않죠. 그런데, 정말로 이상했던 건. 그 집 주방을 털었다는 겁니다.”
“배가 고파서 그랬다는 건가요? 어느 빈민의 소행일 수도 있겠군요.”
루이스는 커피를 내려놓고 착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빈민의 소행일 수는 없을 겁니다. 우리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살인범은 약 2.3톤가량의 음식을 하루 만에 먹어치웠습니다.”
“예? 제일 흔한 추리라면, 살인범이 혼자가 아니었을 수도 있죠.”
그 말에 루이스가 고개를 저었다.
“정황상 살인범은 한 명으로 보입니다. 흔적이 하나 거든요. 그리고 오래 머무르지도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까지는 피해자의 부인도 집에 있었거든요. 가족들과 함께 늦은 신년 휴가를 갔답니다.”
“…….”
“혹시 제가 잘못 추측한 것인지 확인이 필요한 것 같아서 자문을 구할까 합니다.”
“물론이죠. 제게 사건 현장을 보여주십시오.”
“그러죠.”
샤를은 직감적으로 이게 단순한 일반 살인이 아닐 거라는 것을 거의 확신할 수 있었지만, 자세한 것은 사건 현장을 찾아가 봐야 할 것 같았다.
현대 한국을 보면 이상한 일이었지만, 이 나라에서는 경찰이 탐정의 조언을 받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특히 그 경찰이 수사관이라면.
샤를은 오랜만에 경찰국에 들렀다. 메트로폴에는 특이하게도 치안청과 경찰국이 나뉘어 있었다. 경찰국장의 자리는 공석으로 발령되지 않아, 지금은 케인 치안청장이 제일 높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루이스는 케인 치안청장과 극도로 사이가 나쁘다. 서로 총질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견원지간이라는 말은 우스울 정도였다.
그래서 범죄현장에 들어서자 샤를에게도 좋지 않은 눈길을 가진 사람들과, 호의적인 눈빛을 가진 사람들 두 패로 사람들이 나뉘었다.
전자는 케인의 끈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었고 후자는 루이스와 사이가 좋은 사람들, 혹은 버나드 힙슨 경사과 매우 친한 사람들이었다.
몇몇은 교단에도 출근 도장을 찍는 사람들이었으니, 할말은 다했다.
“뭐야, 탐정?”
“누가 탐정을 데려와? 쯧쯧.”
“헥센 교수님을 모르다니 무식한 놈들이네.”
“그게 뭔데?”
“미스트위버 대학의 헥센 교수님이야. 유명한 탐정이자 교수님이시지.”
“교수? 하.”
“뒤에서 입방아 찧을 시간에 증거라도 하나 더 찾지?”
멀리서 서로 대화하는 경찰들 간에 어느 정도 알력이 있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샤를은 루이스의 안내를 받아서 범죄 현장으로 들어섰다.
루이스가 담당을 맡은지라, 오페라 배우 에드먼드 피셔의 침실은 일주일 동안 깔끔하게 현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었습니다. 일단 성인 남성인 것은 확실합니다만, 정확히 누가 범인인 지 알 수 없었습니다. 피해자는 남에게 원수진게 별로 없다던 사람이라.”
“흉기는요?”
“주방용 칼에 피가 잔뜩 묻어있지만 피해자를 살해한 무기는 아니었습니다. 저건 시체를 훼손할 때쓰던 거라고 추측됩니다. 아마, 들고 나가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샤를은 쭉 침실을 살폈다. 여기저기 튄 변색된 피, 난자된 시트, 부서진 축음기, 벽면 장식, 골프채…….
그 순간 샤를의 눈앞에 과거의 영상이 재생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