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 천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세레스는 처음으로 육지를 밟았다. 꼬리 대신 사람처럼 다리를 만들고, 사뿐사뿐 흙 위를 걸었다.
“여기가, 아버지의 고향. 육지구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고향은 매우 이색적이었다. 바닷속의 고요함과 파도의 흐름도 없었고 폐 속으로는 신선한 공기가 들어가고 산들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육지는 고요함과 평화로움만 가득한 공간은 아니었다. 위험이 가득한 공간이었다. 동식물들이 아니라 인간들도 그랬다.
육지를 구경하던 세레스의 앞에 나타난 것은 칼을 들고 나타난 도적 떼였다. 그들은 세레스를 빙 둘러싸고 자기들끼리 말했다.
“두, 두목님. 저는 이렇게 예쁜 여자는 처음 봅니다.”
“왕에게 진상하면 엄청난 돈을 받을 수 있겠어.”
“근데 그냥 주기에는 좀 아까우니까 우리가 먼저 좀 놀아볼까?”
세레스는 주문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것 같은 인간들이 그녀를 공격하려고 하는 걸 느꼈다.
그녀가 주문을 쓸 새도 없이, 누군가 나타나 그녀를 구했다.
슉. 슈슈슉.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들이 비처럼 도적 떼에게 쏟아졌다.
“도적 떼를 소탕하라!”
한 무리의 병사들이 나타나 도적들을 공격하고 그들 사이에서 지휘하던 한 남자가 백마를 타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아주 잘생긴 청년, 비스타 헥센테르프를 세레스가 처음 만났을 때였다.
“레이디. 괜찮으십니까?”
친절한 태도. 사글사글한 눈매. 빠져들 것 같은 검은색 눈동자. 그녀는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백마 탄 왕자는 아니었지만,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난 비스타도 세레스의 외모에 이끌렸다.
“괜찮아요.”
“제가 당신이 안전한 곳까지 모시겠습니다. 레이디.”
그때만 해도 세레스는 잠시 나온 여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가 되면 바다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감추고, 그 시대의 평범한 여인처럼 살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비스타와 함께한 시간이 길어졌다. 비스타가 세레스에게 청혼을 할 때쯤, 일이 터졌다.
에피마네스가 비스타의 조국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비스타는 에피마네스를 물리쳤지만, 치명적인 상처를 가슴에 입고 쓰러졌다.
세레스는 마법을 사용해도 그를 구하지 못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자발적으로 꺼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그 강력한 힘을 가진 석판 조각을 몸속에서 빼냈다.
정신과 육체가 분리되는 듯한 고통 속에서 세레스는 석판 조각의 힘을 사용해 비스타 헥센테르프를 구했다. 세레스는 그 석판을 ‘보물’이라고 칭했다.
비스타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둘의 사랑이 영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둘은 비밀을 공유했다. 비스타는 주문의 힘과 비밀 세계에 관한 것들을 알아갔다.
그리고 시간의 흐름속에서 그의 마음속에 점점 암귀가 들어찼다.
곧 비스타는 자신은 늙어죽고 세레스 혼자만 남게 될 것이었다.
인어는 불로불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왜 안 되는 것이지?
‘보물을 사용하면 불로불사가 될 수 있어. 그럼 세레스와 함께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될 거야.’
비스타는 보물을 사용해 불로불사가 되려고 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리고 늙어, 죽어갈 때쯤.
“세레스, 당신과 영원히 함께할 수는 없겠지.”
“미안해요.”
“사과하지 마시오. 그게 섭리니까.”
그렇게 세레스를 안심시켰던 비스타는 세레스를 잠재웠다. 그리고 사슬을 꺼내와 그녀의 손목에 채웠다.
“그럼 섭리를 거스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때까지. 영혼만이라도 남아서 어떻게든 세상을 살아가는 수밖에.”
비스타는 그렇게 육신을 버리고 영혼만이 남았다.
*
샤를과 유마는 지하의 비밀 통로를 걷고 있었다. 점술의 흔적을 쫓아가는 샤를은 어둠 속의 제단을 곧 찾아냈다.
제단 중앙의 공동은 넓었는데 주변에는 조명이 없어 어두웠다. 샤를이 인프라 비전으로 그것을 꿰뚫어 보자 그곳에는 특이하게 생긴 길쭉한 짐짝 들이 놓여 있었다.
제단 중앙에는 피를 흘린 채 죽어 있는 세 마리의 동물들이 있었다.
각각 셰퍼드, 앵무새, 원숭이로 세 헥센 형제자매들이 기르던 애완동물들이었다.
그 옆에는 심장, 뇌가 담긴 플라스크, 피가 담긴 약병이 있었는데 그것도 역시 그들의 신체 일부였다.
그리고 제단의 옆에는 산채로 묶여 있는 ‘괴물’도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샤를을 구해줬던 ‘괴물’이었으나 어느새 이곳에 잡혀 있었다.
제단의 앞에는 하얀색 옷차림을 한 요하네스 헥센이 서 있었다.
“어서오거라. 아들들아. 그녀보다 너희가 먼저 올 줄은 몰랐군. 유마 너는 용케도 살아남았구나. 줄을 잘 잡는 것도 실력이라면 실력이겠지.”
“……아버지.”
“네 삼촌이 죽을 때도 그렇고 운이 좋구나.”
요하네스는 유마에게는 희미한 애정을 일말 보이고는 무심하게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이 입을 열었다.
“불로불사에 대한 연구를 찾았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은 건가? 요하네스 헥센? 아니지, 비스타 헥센테르프.”
샤를의 눈이 빛났다. 그는 여러 번 생각했었다. 왜 요하네스가 이랬을까, 왜 대체 요하네스는 그랬지?
질문을 아무리 던져봐도 소용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요하네스가 아니라 비스타 헥센이라면, 추측들이 들어맞는다.
몇 번이고 힌트가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 같다고 했었다.
그리고 세레스의 과거 회상에서, 샤를로테도 요하네스가 갑자기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굴었다고 했지.
그럼 샤를은 이렇게 생각했다. 비스타 헥센이, 후손들의 몸을 빼앗는 것으로 살아온 것이 아닐까?
인어가 비스타 헥센에게 사로잡혔다. 샤를이 영생의 욕구를 가진 비스타 헥센이라면, 당연하게도 영혼 만을 다른 곳에 이식해서 불로불사의 기회를 노리는 것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에게 ‘빙의’되는 것을 몇 번이고 이어져 나가는 방식을 사용하면 그것도 일종의 불로불사일 것이었다.
“후후후. 알고 있었군. 역시 똑똑해. 자네의 뇌를 꺼내야 했는데.”
“하나 궁금한 게 있다. 넌 영혼의 형태로 살아오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새로운 의식이 필요한 거지? 이미 영생의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가?”
본래라면 적을 보자마자 문답무용으로 총부터 뽑는 게 샤를의 특기였지만, 이번만큼은 묻지 않고 버틸 겨를이 없었다. 대체 왜 이런 방법으로 구해야 했던 거지?
“인간의 육신이란 한없이 나약하지. 그래서 강대한 영혼이 깃들면 쉽게 바스라진다. 내 영혼은 천 년도 더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강해졌고, 내 후손들은 내 영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육신이 금방 시들어버리지. 기껏해야 50년? 그렇다면 그건 불로불사가 아니다.”
비스타는 한 번 숨을 고르고는 말했다.
“엘리와 그 ‘괴물’ 놈의 연구 결과, 영생불멸의 신체를 형성하는 이 의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지. 좋은 정보였다.”
“그래서 자손들의 신체와, 저 동물들을 제물로 바쳐서 영생불멸을 갈구하는 것인가? 겨우 그런 것 때문에? 그렇게까지 살고 싶나?”
“하하하. 웃기는구나. 누가 죽고 싶은 사람이 있다더냐? 100살 넘은 노인도 다시 젊어져서 영원히 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걸 선택하지 않고 버티겠느냐? 너라면 어떠냐? 막상 죽음이 다가왔을 때,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데 고르지 않겠다고?”
“적어도 다른 사람을 실험대에 올리고, 타인의 몸을 빼앗가면서 불로불사가 되고 싶진 않아.”
“참으로 무욕한 인간이로고. 욕망 앞에 도덕이 어디 있지?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대가로 한다면 말이야.”
샤를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었다. 그렇다. 요하네스는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된다면 친구건 인척이건 관계없이 모두 수단으로 삼는 남자였다.
“비앙카에게는 피를 받았단다. 아들아. 네게는 뼈를 받아갈 예정이지. 뼈는 사실 없어도 된다만, 있으면 제단의 의식이 더 정교해지겠지.”
“히, 히익. 딸꾹!”
유마가 그 소리에 너무 놀라서 딸국질을 하자 비스타도 낄낄거렸다.
“걱정말거라, 유마 너는 영성자의 재능이 없으니 네게서 건질 것은 없겠어. 모든 제단에서 제물이 완성된다면 나는 영생불멸의 신체를 얻게 된단다.”
비스타가 웃자 샤를이 답했다.
“그래, 당신이 제단에서 의식을 치러서 영생불멸의 육체를 얻는다고 가정해보자. 그 다음엔 얼마나 살아남을 것 같나?”
“얼마나라니? 앞으로 영원무궁토록 살아남을 수 있겠지.”
“이 세상이 사라진다면?”
“사라져? 이 세상이?”
샤를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운명의 꼭두각시. 메인 스토리에서 요하네스가 아무짝에도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이유를 알아냈다.
그는 세상이 망하건 말건 자신의 저택에서 의식을 치른 뒤에 은둔하며 살았겠지. 영원한 보신주의자.
“아무것도 모르는군. 당신 같은 인형과 대화하는 건 의미가 없겠어.”
“뭔가 감추고 있구나. 매우 불쾌하구나. 역시 잡아서 신문하는 것만큼 확실하게 정보를 습득하는 방법이 없겠지. 보마르.”
집사 보마르가 어둠 속 제단 뒤에서 숙련된 암살자처럼 나타났다. 그는 검은색 장갑을 끼고 있었으며 은색 와이어를 들고 있었다.
“유감이군요.”
샤를은 날카로운 눈동자로 그를 살폈다. 근접전에 능숙한, 수호자 타입의 영성자.
“떨어지지 마, 유마.”
“네, 네.”
순식간에 홀스터에서 권총을 뽑아서 당겼다. 눈 깜빡할 새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보마르는 사라지듯 시야에서 없어지면서 샤를의 뒤를 잡기 위해 한 바퀴 돌았다.
샤를의 총구가 보마르의 위치를 전혀 잡지 못하자, 보마르는 내심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생각지도 못한 것을 마주쳤다.
순백의 대검이 저절로 허공으로 날아올라 그의 진로를 방해하고 있었다. 거기다 그보다 빠른 속도로 따라오고 있다. 무지막지한 충격이 1차.
와이어를 세 겹이나 감아서 간신히 대검을 막아냈지만, 이번에는 총구의 사선에 들어와 있다.
타타탕.
삼 연발. 두 개는 피해냈으나 나머지 하나는 보마르의 어깨에 명중했다. 그의 오른팔이 치익, 거리는 무언가 증발하는 소리와 함께 통째로 사라졌다.
지혈할 필요는 없었다. 마탄의 위력 때문에 팔이 완전히 지져졌으니까.
백기사의 대검이 보마르를 쫓아가는 동안 샤를은 눈동자를 돌려 비스타를 바라보았다. 그는 씨익 웃고 있었다.
“아들아, 여기가 어디인지 아느냐?”
“난 댁의 아들이 아닌데.”
보마르에게 두 번 연속으로 사격한 뒤 샤를은 탄환을 재장전했다.
“여긴 네 선조들의 무덤이란다. 수많은 헥센테르프들이 묻혀있고, 또 성을 바꾼 뒤의 헥센들이 묻혀있기도 하지.”
비스타는 품을 뒤져서 무언가를 꺼냈다. 샤를은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꺼내는 마도서가 무엇인지 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자소생의 서 2권이다. 샤를은 1권을 정독했으므로 2권에 무엇이 수록되어 있는 지 알고 있었다.
2권에는 본격적인 시체를 언데드로 되살리는 주문이 적혀 있었다.
“내 부하는 보마르 뿐만이 아니야. 내 후손들 모두가, 나의 병사란다.”
“패륜아 새꺄.”
샤를은 기어코 욕설을 내뱉었다.
선조를 되살리는 악당들은 많이 봤어도 자기 후손을 되살리는 악당은 처음 봤다. 진짜 인성이고 뭐고 파탄 난 성격 장애자다.
샤를이 총구를 돌려서 비스타를 겨누자 그가 과장된 웃음을 짓더니 손을 뻗었다.
허공에 뼈로 된 벽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비스타의 마도서가 빛을 발하자, 제단 주변의 어둠 속에 있던 것들이 덜컹거렸다.
“저게 전부 관이었군.”
특이하게 생겼던 상자들은 죄다 관이었다. 관뚜껑을 박차고 튀어나온 헥센테르프 or 헥센들이 지하 공동에 가득 찼다.
하나같이 생전에 자신들이 사용하던 무기를 들고 있었다. 창이나 검, 거대한 원반을 들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는 플린트락 머스킷을 들고 있는 경우도 있었다.
시체는 하나같이 보존이 잘 되어 있었는지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스켈레톤이 아니잖아.”
“하하하. 그렇단다 아들아. 언제 실험해야할지 모르니 최선을 다해 보존해뒀지. 네 뼈도 다 빼내고 난다면 저렇게 보존해주마.”
“거부하지.”
-쭈인. 쭈인네 조상님들이 관뚜껑 열고 뛰쳐나오는데.
-그러면 다시 들어가게 해드려야지.
아마도 몰랐겠지만, 샤를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었다.
에브렌 린덴의 저택에서 얻은 사자소생의 서 1권. 미리 지배까지 해두고 있었다.
“부작용 때문에 별로 사용하고 싶진 않은데.”
샤를은 심상 세계 한곳에 보관해뒀던 사자소생의 서 1권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