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 그 뒤로 주문을 전수 받은 샤를로테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공간을 찾아냈다.
그리고 배운 주문을 사용해 ‘문’을 열었다. 자신의 수명을 바친 대가였다.
-정말 고마워.
다른 곳에 ‘탈출구’를 만들어놨다. 이제 사슬을 자르고 도망치기만 하면 된다.
“사슬을 자르는 방법도 내가 준비해뒀어.”
샤를로테는 씨익 웃으면서 어떤 책을 꺼냈다. 그곳에는 광명자의 창이라는 주문이 적혀 있었다.
-주문서?
“응. 내가 헥센가의 장서고에 있던 걸 꺼내왔어. 독학했지!”
광명자의 주문은 광명 교단에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었으나, 헥센 가의 장서고에는 광명자의 주문이 적혀 있는 책도 있었다.
그 사실은 둘 다 몰랐으나 둘에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사슬을 자르기 전에 세레스가 샤를로테를 잠시 멈췄다.
-잠깐만. 기다려봐.
세레스는 정신을 집중해서 다른 ‘위상’에 감춰두고 있었던 물건을 꺼냈다.
황금색 선이 여러 갈래로 뿜어져나오는 ‘판 조각’이었다. 재질은 돌이었으니 이건 석판 조각이 분명해보였다. 석판에 적힌 글자는 너무 오래된 언어라서 샤를로테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게 렘 시대의 문자라는 것만 추측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건? 300년 전에 사라졌다는 보물?”
-그래. 에단 헥센이 잃어버린 물건이야.
정확히는 세레스가 의도적으로 감춘 물건이었다. 300년 전 에단 헥센은 세레스를 죽이려고 했었다.
그것에 대항해 세레스는 보물을 자신의 위상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사용해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에단 헥센은 세레스를 추궁하고 고문했지만 끝내 입을 열게 할 수 없었고 제풀에 지쳐 늙어 죽었다.
“이걸 왜 내게 주는 거야?”
-석판을 갖고 있으면 내가 다시 널 찾을 수 있어. 이 석판은 내 정신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날 찾아올 거야?”
-그래. 잃어버린 수명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어.
“정말 고마워 세레스.”
샤를로테는 세레스를 잠시 안아주었다.
그때였다. 번뜩하고 번개같이 어떤 미래가 세레스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기나긴 세월 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통찰력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깃들었다.
이 통찰력은 너무도 먼 곳에서 바라보는지라, 미래마저도 읽을 수 있었다.
세레스는 샤를로테의 계획이 실패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샤를로테가 언제, 어떻게 죽는지까지 볼 수 있었다.
세레스는 이 탈출이 실패할 것을 짐작했다. 주문을 사용해서 이 사슬을 끊는 순간 ‘헥센 가주’에게 들키게 되고 도망치는 순간 세레스와 샤를로테 모두 잡힐 것이다. 그리고 보물도 빼앗긴다.
-보물을 먼저 숨기고 와.
“왜?”
-중요한 물건이니까. ‘문’의 옆에다 두는 게 좋겠어. 그리고 다시 와서 쇠사슬을 끊어줘.
“어……. 그렇게 할게.”
샤를로테는 내키지 않지만 먼저 비밀통로를 지나서 나와 그녀만 홀로 알고 있던 비밀스러운 공간에 도착했다. 보물을 ‘문’옆에 두고 나와 다시 지하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세레스의 탈출계획이 마무리되었을 때. 샤를로테는 요하네스에게 붙잡혔다.
“어디가지?”
“어, 그. 그게 말이에요 당신…….”
전대 가주였던 제임스가 죽고 난 뒤에 요하네스는 상냥했던 이전과 달리 매우 냉혹한 인간으로 변했다.
원래는 샤를로테를 매우 아끼고 사랑해주는 사람이었으나 지금은 전혀 그런 기미도 없었다.
“지하로 내려갈 생각은 그만두는 게 좋아.”
“!?”
샤를로테가 당황하면서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요하네스는 샤를로테가 인어가 있는 지하실을 왔다갔다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샤를로테가 인어를 빼돌리려 한다는 것도 알아냈다.
다만 알아내지 못한 것은 저택 내부에 어디론가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이 열려 있었고 그 옆에 그들 가문이 그토록 원하던 ‘보물’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 당신이 설마.”
“그래. 내가 세레스를 가둬두고 있었지.”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당신은 변했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 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샤를로테. 넌 추방이야. 이제 이 저택에 들어오지 못해.”
이 뒤로 세레스는 샤를로테를 만나지 못했다.
봉인 재단에서 파견 온 연구원들이 대거 들어섰고 엘리자베스가 나타났다.
울부짖던 엘리자베스는 인어의 피를 받아들이고 불로가 되었다. 그리고 실험체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적극적으로 요하네스에게 협력하게 되었다.
샤를로테는 밖으로 추방된 이후 몇 번이고 돌아오려고 했으나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가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랫 동안 저택에서 함께 해왔던 자수정 목걸이였다.
밖에 나가 살던 샤를로테는 샤를을 낳았으나 젊었을 적에 일어난 암으로 지독한 고통을 받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
폭풍처럼 몰아치던 기억의 흐름이 마지막 장면과 함께 사라지자 샤를의 생각이 돌아왔다.
“무슨…….”
“넋을 놓고 있네?”
샤를이 몰아치는 기억의 폭풍 때문에 잠시 넋을 놓고 있는 동안 엘리자베스는 열쇠총을 들어서 샤를을 겨누고 있었다. 그리고 서서히 뒷걸음질 치면서 뒤쪽의 계기판에 있는 레버에 손을 얹었다.
“보아하니 나랑 협력할 생각이 없는 것 같네.”
서서히 수조 내부의 장치가 움직이면서 해제되었던 기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원복할 생각이었다.
탕!
샤를의 가슴 한편에 총알이 적중했다. 샤를은 그 위력에 뒤로 밀려났다.
‘단순한 총이 아니야.’
샤를은 에메랄드 브로치가 물리적인 위력을 상쇄했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그 뒤에 탄환이 샤를의 영성을 갉아먹고 있었다.
“어때? 영성을 빼앗기는 기분은?”
이런 에너지 드레인 류의 기술은 영성자 세계에서는 흔한 편에 속했다.
상대방의 영성을 빼앗아서 더 이상 주문을 사용하지 못하거나 기기묘묘한 속도로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방법 같은 것.
엘리자베스는 샤를의 품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걸 봤다. 깜짝 놀라 소리쳤다.
“뭐, 뭐야!?”
“씨발 난 도망친다 병신들아!”
혼란을 틈타 앵무새, 안토니오가 샤를의 주머니 속에서 빠져나갔다. 여태 사로잡혀서 조용히 있어서 별문제 없는 줄 알았는데 기회만 노리고 있던 거였다.
그 앵무새는 환풍구를 타고 좁은 틈새 사이로 사라졌다.
-앗! 통조림이 도망갔어!
-내버려 둬 파기.
샤를은 조각구원회의 성물인 ‘성배 조각품’에서 원격으로 영성을 보급받고 있었다.
영성의 총량이 늘지는 않지만 소모해도 계속해서 복구할 수 있다.
손가락을 들어서 옷을 깊게 파고든 탄환을 집어서 빼냈다.
“……뭐야?”
샤를은 잠시 눈을 감았다. 샤를의 손에서 하얀색 나비들이 날아오르면서 검의 형상을 만들었다.
백기사의 검을 실체화했다. 모노클에 연동된 검이 생명을 얻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잠시 굳은 채 도망치려고 했다.
-어디가? 이 아줌마야!
엘리자베스의 뒤편에 파기나레코르가 떠올랐다. 은폐기능이 해제되었으므로 엘리자베스의 눈에도 보일 것이었다.
검과 책이 앞뒤로 포위하고 있자 엘리자베스가 샤를을 바라보았다.
“이런 영성자끼리의 싸움은 익숙한가 보구나. 내 생각보다 더 강한 것 같네.”
“그렇죠? 얌전히 항복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 순 없지.”
“항복 안 하면 죽어요.”
“내가 널 모르듯, 너도 날 모르지.”
엘리자베스는 바닥에 열쇠총을 꽂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바닥을 문처럼 활용해서 밀어제치더니 그대로 그곳으로 빠져나갔다.
“뭐야!?”
-도망쳤어!
샤를은 그대로 바닥을 만졌다. 엘리자베스가 떠난 자리는 그대로 바닥이었다.
-저 열쇠총 단순히 무기는 아닌가 봐 쭈인.
-내 생각도 그래.
샤를은 열쇠총의 능력이 단순히 총의 기능과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어쩌면 헥센가 내부를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는 물건일지도 모른다.
‘조금 전에 쪽문에 관해서 말했었지. 저 열쇠총은 마스터 키를 겸하는 겸 저택 내부를 순간이동해서 움직이게 해줄 수 있는 물건일지도 모르겠어.’
엘리자베스는 저택 관리인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공간을 이동하게 해주는 특별한 유물은 대게 제한이 걸려 있었으므로 저택 밖까지는 나가지 못할 거라는 게 샤를의 추측이었다.
어쨌든 샤를은 다시 레버를 잡아당겼다. 세레스를 향해 움직이던 기계들이 다시 멀어져갔다.
“세레스. 당신을 풀어주기 위해서 제가 뭘 하면 되죠? 전 이 기계장치를 다루는 법을 모릅니다.”
-아래쪽 빨간 버튼.
샤를은 인어를 풀어주기로 했다. 그의 생모인 샤를로테와 세레스의 인연도 있었고, 헥센 가의 아집이 만든 지옥에서 풀어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쭈인, 인어를 풀어주려고?
-그래.
샤를은 인어의 말을 따라서 그녀를 풀어주면서 파기나레코르에게 그가 읽었던 기억을 가르쳐줬다.
-좆간 네버 체인지.
-인간이 제일 쓰레기인 건 맞긴 해.
파기나 식으로 말하면, 이 인어는 좆간들이 만들어낸 무고한 피해자였다.
샤를은 세레스가 말하는 버튼을 모두 누르면서 기계장치를 조작해 제약을 풀었다.
모든 제약이 풀어지자 세레스의 눈동자가 파란색으로 빛났다.
특별한 색으로 빛나는 수조의 물이 빠져나나가고 평범한 물이 차올랐다. 인어는 완전히 풀려나서 샤를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해주었다.
-고맙다. 샤를로테의 아들아.
“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이제 문을 통해서 돌아갈 겁니까?”
-아니. 난 해야 할 일이 있다. 내 아들을 찾고, 날 이곳에 가둔 자들에게 복수하는 거야.
인어는 그동안 빼앗겼던 주문을 되찾은 뒤로 어마어마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봉인이 풀리자 그동안 묶어두었던 힘이 밖으로 개방된다. 인어의 주변에는 저절로 물이 차올랐다.
이 물은 바닥에 가라앉지도 않았고 저절로 움직였으며 허공에 떠서 세레스의 의지를 받아들였다.
“아들?”
세레스는 샤를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그대로 파도와 함께 입구 쪽으로 향했다. 철창을 부수고 파도를 몰아쳐 밖으로 이동한다.
‘아들이라니?’
샤를은 파도가 휩쓸고 간 장소를 향해 달렸다. 지하의 연구실을 초토화 시키면서 움직였다.
‘너무 빨라서 따라 잡을 수가 없어.’
샤를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따라가는 게 고작이었다.
지하실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1층으로 올라왔다.
하인들로 위장했었던 연구원들은 죄다 죽어 있었다. 저택을 나눴던 격벽들도 하나같이 박살나 있다.
‘이 난리통에서 요하네스 헥센은 어디있을까?’
그라면 아마도 본관 5층에 있는 자신의 침실에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단 유마부터 먼저 찾아야했다.
살려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
요하네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플라스크를 닫았다. 특수한 용액에 넣어진 심장은 전혀 상하지 않았는데다가 계속 뛰기까지 했다.
선반에는 뇌, 심장, 그리고 피가 가득 든 병이 있었다.
이제 남은 게 얼마 안남은 걸 알았다. 뼈다. 샤를을 죽이고 뼈를 취하고 ‘괴물’도 처리하고 눈을 뽑아내면 된다.
그의 선반 옆에는 셰퍼드가 있었고 또 그 옆에는 원숭이가 묶여 있었다. 셰퍼드가 입을 열어서 말했다.
“아, 아버지 저에요, 세바스찬이라고요. 지금 주문을 사용해서 개의 몸으로 피신한 것 뿐이에요.”
“개의 몸속에 들어간 인간이라니, 이색적인 영혼이로군.”
“아니, 진짜 왜 그러세요 대체?”
“너희는 모르겠지만, 이럴 목적으로 ‘제작’되었단다. 아들아.”
“그, 그게 무슨.”
그때 멀리서 악을 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악! 이 씹쌔들아! 당장 이거 놔!”
요하네스의 옆으로 집사 보마르가 나타났다. 그는 앵무새 한 마리를 쥐고 있었다.
그 앵무새를 보고 있던 세바스찬이 말했다.
“어, 너, 넌?”
“어? 샤이디! 야 나좀 구해줘!”
“개새꺄, 난 샤이디도 아니고 내가 지금 잡혀 있는 거 안 보여?”
“시끄럽군. 둘 다 입을 막아버리게. 보마르.”
“알겠습니다. 주인님.”
짐승 세 마리가 한 장소에 모였다. 이 정도면 제물로 바칠 ‘이색적인 영혼’은 충족되는 셈이었다.
그때 누군가 요하네스가 있던 지하실로 들어왔다.
또각. 또각.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구두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요하네스의 부인 에스텔라 헥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