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 “당신은 살 수 있을 것 같아? 하얀 유령은 명령권을 가진 사람 이외는 다 죽인다고! 네게도 명령권이 없는 건 알고 있다.”
“그래서?”
“그러니 같이 이 인어를 설득해서 떠는 게 어때? 당신은 인어의 피로 영원한 불로를 얻고싶어하지? 피를 정제하는 기술은 우리 연구진들만 알고 있어. 그, 그러니까 내가 인어의 피를 정제해주지. 나랑 같이 떠나는 게 어떤가?”
“바보구나? 잘 생각해봐. 주문을 되찾은 세레스가 우리를 찢어죽일까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둘까?”
그나저나 인어의 피라……. 샤를은 인어의 피를 특별한 방법으로 정제하면 불로불사의 묘약이 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불로불사가 되기 위해선 지난하고 고된 연구가 동반되어야 한다.
추가로 완전한 엘릭시르를 손에 넣기 위해선 인어의 거의 모든 피를 뽑아내야 한다.
이들은 그 영역까지는 도달하지 못했지만 불로의 영역을 개척한 것 같았다. 하지만 자세한 건 연구 자료가 없으니 알 수가 없었으니 샤를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여기서 도망치게? 인어가 가진 주문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인어는 거래를 받아들인 선례가 있었다고 들었다.”
“잊었나 본데. 그 선례는 샤를로테가 한 일이야. 샤를로테는 세레스와 매우 친했지. 근데 넌? 세레스를 실험동물로 보는 게 고작 아닌가?”
엘리자베스가 서서히 열쇠총을 들어 올렸다.
“자, 잠시만 기다려. 교, 교섭하자.”
“잘 가.”
탕.
엘리자베스의 총이 연구원의 두개골을 관통했다. 태엽이 돌아가면서 두 번째 재장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천천히 인어의 앞에 있던 계기판을 향해 걸어갔다.
샤를이 나선 건 그때였다. 어차피 연구원의 목숨이야 샤를도 별로 관심이 없었다.
“멈춰.”
권총을 앞으로 치켜세우고 엘리자베스를 겨누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엘리자베스가 샤를을 돌아보고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쪽문으로 침입한 게 너였구나? 샤를. 왜 자물쇠를 부숴버리고 들어왔니? 나중에 복구하기 귀찮게.”
“당신은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내게 제대로 말해줘야겠어.”
“이젠 고모님이라고 부르지도 않네.”
“말해. 비밀 관리인인지 뭔지 그게 뭔지도 말하고. 아님 당장 머리통에 구멍을 내주지.”
철컥.
샤를은 권총 뒤의 코크를 뒤로 잡아당겼다. 언제든 쏴버리겠다는 신호. 엘리자베스가 말했다.
“음. 언제부터 말해야할까.”
엘리자베스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우리 어릴 적 얘기부터 해줄게.”
“우리?”
“그래. 우리 가족과 네 엄마 샤를로테의 과거 얘기 말이야.”
엘리자베스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아버지는 원래는 자상한 사람이었지.”
전대 가주 제임스의 자식은 셋이 있었다. 요하네스, 엘리자베스, 데인이었다.
샤를로테는 오래전부터 이 저택에 들어온 시녀로 일하고 있었다.
샤를로테는 시녀인데도 어째서인지 제임스의 사랑을 받고 있었으므로, 넷이 함께 놀아도 무어라 체벌이 오지는 않았다.
샤를의 할아버지, 제임스는 원래는 자상하고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정신이 이상해졌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굴었다고 한다.
“어느날 아버지는 혼이 바뀐 것처럼 변했어.”
제임스는 요하네스를 제외한 친족들에게 냉혹하게 굴었다. 여러 방면에서 사람들을 시험 한 뒤.
제임스는 엘리자베스가 쓸모없다고 여기면서 ‘폐기처분’하기로 했다.
그걸 알아챈 건 엘리자베스가 이 지하 실험실로 끌려왔을 때였다.
“그 지하가 실험실이라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래도 내가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
엘리자베스는 울부짖으면서 제임스에게 잘못했다고 빌었지만 내려온건 싸늘하고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제임스는 실험에 쓸 자신의 ‘친족’을 찾고 있었다.
실험이란 불로불사에 관한 것이었다. 오래전 선대 가주인 비스타 헥센테르프가 잡아두었던 인어가 저택 지하에 있다는 걸 알고 있던 제임스는 불로불사에 관한 실험을 했다.
“그 실험 끝에 나는 정제된 인어의 피를 공급받아서 불로를 얻게 되었지. 자, 봐. 난 그때 이후로 늙지 않았어.”
엘리자베스가 한 바퀴 돌면서 자신의 드레스 치마를 빙글빙글 돌렸다.
그녀는 최소 50대가 넘었을 텐데도 마치 소녀와도 같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 비밀이 여기서 풀렸다.
“대신 단점이 생겼어. 저 인어의 피를 공급받지 못하면 순식간에 늙어서 죽어. 조로증(progeria)에 걸려서 말이야.”
“…….”
흡혈귀 같다고 생각했으나 더 말을 하진 않았다.
“그래서 영원한 젊음을 얻기 위해서 나는 아버님의 명령을 따라 이 비밀을 관리하기로 했어. 봉인 재단에서 온 저 연구원이 있기도 전의 일이었지.”
“그래서 저 인어를 지킨 건가?”
“그래. 난 영생을 누릴 수 있어. 저 인어만 있으면 말이야! 그래서 난 비밀을 지키는 비밀 관리인이 되겠다고 내 발로 나섰어. 그건 아버지가 죽고 요하네스가 가주 직위를 받은 이후에도 똑같았지.”
그래서 샤를에게 제안했던 것이었다. 샤를은 고개를 돌려서 인어를 바라보았다.
“이 인어는 역시 초대 가주 비스타 헥센테르프가 잡아 온 인어가 맞았군. 죽었다는 기록은 거짓말이고 말이야.”
“그래!”
샤를은 잠시 엘리자베스의 뒤에 있는 거대한 수조통에 있는 인어를 바라보았다.
수조 속에서 인어의 입에서 물거품이 올라왔다.
샤를과 인어의 눈이 마주쳤는데 인어는 그간 있던 무표정한 표정을 버리고 놀랍다는 듯 샤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샤를의 손에 들린 자수정 목걸이도 알아챘다. 인어의 눈동자가 무언가 말하려고 하고 있었지만 엘리자베스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준 이유가 뭘 것 같아?”
“…….”
“당연히 협력하자는 얘기지. 넌 강해. 여태 유령에게 잡히지 않고 싸우면서 잘도 살아남았지.”
“당신 이야기는 잘 들었어. 그럼 이제 인어의 이야기도 들어봐야겠네.”
“뭐?”
계속해서 인어는 강렬한 사념을 샤를에게 보냈다. 정신을 열어달라는 호소였다.
조금 전부터 그 정신파를 차단하려던 샤를은 인어가 하는 말을 듣기 로 했다.
샤를의 정신력도 만만찮게 올랐으므로 인어에게 세뇌당하거나 하진 않을 거라는 확신이 섰으므로, 샤를은 정신을 열어서 인어의 기억을 받아들였다.
그 기억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샤를의 생모 샤를로테가 어린 소녀이던 시절이었다.
*
자수정 목걸이에서 빛이 난다.
인연(因緣)은 불가에서 말하는 모든 것이다. 모든 사물은 이 인연에 따라 생멸한다고 한다.
어릴 적 샤를로테가 세레스를 만난 것도 어떤 알지 못하는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둘은 서로 절대 만나지 못 했을 사이였으나, 어떤 운명이 둘을 만나게 했다.
어릴 적 샤를로테는 영특하고 귀여운데다가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다.
그래서 저택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저택 내부에는 비밀통로나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공간들이 있었으므로 보물과도 같았으리라.
제임스는 어릴 적부터 이 집에 들어와서 시녀가 될 샤를로테를 아꼈다. 저택 내부를 돌아다니는 일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늘 돌아오곤 했으니까.
제임스의 성격이 바뀌고 가풍이 엄격해지고 나서도 이런 풍조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샤를로테는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발견했다.
몇몇 가주에게만 직전 되어오던 비밀통로를 알아 내버린 것이었다.
이게 샤를로테에게 개인에게 있어서는 비극의 시작이었으나 인어, 세레스에게 있어서는 어떤 종류의 구원의 시작이었다.
비밀통로에 들어선 샤를로테는 쇠창살로 묶여있는 인어를 발견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첨단기기도 없었으므로 그냥 단지 묶어두고 가둬두기만 했을 뿐이었다.
샤를로테는 인어 세레스를 가엽게 여겼다.
“넌 누구야?”
-세레스.
부드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 은은하게 퍼졌다. 현시점처럼 난폭한 정신파가 아니었다. 그때는 지독한 연구를 당하기 전이었다.
다만 묶여있던 인어는, 수백 년 동안 이 지하에 갇혀서 살아왔으므로 매우 지쳐 있었을 뿐이었다.
세레스에게 샤를로테는 300년 전, 그녀를 죽이려고 들었던 에단 헥센이라는 남자 이외에 처음으로 만난 인간이었다.
그래서 더욱 잘 대해 줬다. 매일매일 찾아오는 순수한 소녀와 지친 인어간의 우정은 점점 깊어졌다.
“오늘은 가주님이 더 화가 많이 나셨어. 데인이 가주님이 시킨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거든.”
-무슨 일?
“뒤뜰에 사는 짐승한테 먹이를 주고 오라고 했던가? 그랬는데 데인이 무섭대. 그래서 화가 나서 데인을 때렸어.”
세레스는 데인이 샤를로테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요하네스 오빠는 멋있어. 난 크면 요하네스 오빠한테 시집갈거야.”
-그래도 돼?
“응. 요하네스 오빠도 나랑 결혼한다고 했어.”
꼬마 샤를로테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세레스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일상과 삶이라는 것. 그간 지하에 갇혀서 살던 그녀에게는 이 작은 행복도 소중했다.
“근데. 세레스. 여기서 나가고 싶지 않아?”
-나가고 싶어.
“그치?”
-근데 아마도 안 될 거야. 나는 감시당하고 있거든.
“누가 감시를 해?”
-정확히는 모르겠어.
탈출시도가 있을 때마다 헥센 가의 가주들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찾아와 다시 도로 잡아서 이 지하실에 처넣었다.
“그럼 다른 방법이 없을까?”
-방법이 있긴 해.
그때였다. 어디선가 구두소리가 들렸다. 샤를로테는 황급히 비밀통로의 출입구로 가서 숨었다.
뚜벅뚜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지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건 샤를로테의 주인인 제임스였다. 그는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인어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다시 문을 닫고 돌아갔다.
“가, 가주님이야. 어째서 이곳에?”
-……
세레스가 탈출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을 해결해야 했다. 첫 번째는 묶인 쇠사슬을 푸는 것.
두 번째는 세레스가 탈출하는 것을 막는 제임스를 따돌리는 것.
세 번째는 탈출한 뒤에 마차를 타고 바다까지 도망치는 일이었다. 이 저택에서 바다까지는 마차를 타고도 며칠이나 걸린다.
하지만 세레스는 몇 가지 조건을 완화했다.
-나는 인어야. 바다로 통하는 ‘문’을 여는 주문을 사용할 수 있어. 근처 연안으로 이어지는 문을 열면 도망칠 수 있어.
“이곳에 문을 열 수는 없어?”
-문을 열려면 시간이 필요해. 그리고 이 쇠사슬이 내가 주문을 사용하는 걸 막고 있어.
이후, 쇠사슬을 자르기 위해 노력을 해봤지만 불가능했다. 어떤 마법에 걸려 있기라도 한 것처럼 사슬이 잘리지 않았던 것.
샤를로테는 그간의 사정을 듣고 긴밀히 생각했다. 인어를 밖으로 빼낼 방법을 고심했으나 아직까진 방법이 없었다.
자수정 목걸이가 빛나면서 시간의 흐름이 장면을 건너뛴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성숙해진 샤를로테가 보였다. 시간의 흐름에도 한 인어와 한 사람의 우정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내가 방법을 찾았어.”
-어떻게?
“내가 그 주문을 배우는 거야.”
제임스는 영성자가 되는 방법을 자식들에게 가르쳤다. 그 김에, 아꼈던 샤를로테에게도 영성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쳤었다.
-주문을?
“그래. 내게 그 주문을 가르쳐줘.”
세레스는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이 주문은 매우 위험해. 인어들은 ‘바다왕’의 가호를 받기 때문에 마음대로 사용해도 괜찮지만 인간이 사용한다면 수명을 잃게 될 거야.
“그래도 괜찮아. 내가 널 구해줄게.”
세레스는 샤를로테의 결의가 깃든 눈동자를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 그래, 한 번쯤은 믿어도 되지 않을까? 숫한 세월동안 그녀를 가둬두었던 인간 중에서도 믿을 만한 사람이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