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 엘리자베스와 헤어져서 밖을 나서는 순간 미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굳이 그런 표현을 사용했지? 분명히 요하네스는 이렇게 말했다. 『헥센』이라는 성을 가진 누구든. 보물을 찾는다면 가문과 유산을 물려주겠다고.’
이 수수께끼가 풀리기에는 아직 단서를 덜 모은 것 같다. 샤를은 자리를 일어서서 방부터 바꾸기로 했다. 미리 방에 되돌아간 다음 함정을 싹 제거했다.
본관을 지나는 하인 하나를 불러서 세웠다.
“방을 바꿔줬으면 좋겠는데.”
“어딘가 불편하십니까?”
“그래. 기분이 나빠.”
하인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본관에 남는 방은 하인들이 묵는 방밖에 없는다고 했다.
“그럼 그 방으로 하지.”
“알겠습니다.”
샤를은 늘 무표정했던 하인에게서 감정의 변화를 느꼈다. 그건 불편함이었다. 그리고 불안함도 섞여 있다.
방을 옮기는 동안 옆 방에 머물던 유마가 밖으로 나왔다.
그는 첫날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지만, 아직까진 멀쩡해 보였다. 짐을 옮기는 하인들을 보면서 그가 샤를에게 물었다.
“형님? 뭐하세요?”
“잘 됐다. 너도 나와라. 본관으로 방을 옮기자.”
“……왜요?”
“밤에 들리는 소리. 더는 들리지 않게 될 거다.”
“아, 알겠습니다.”
샤를의 충고를 받아들인 유마도 방을 옮겼다. 샤를은 새 방을 다시 완벽하게 요새처럼 보수했다.
기존의 방보다는 훨씬 작지만 그래도 이곳의 벽면은 뚫려 있지 않았다.
*
요하네스가 머무는 본관 5층 침실. 보통 부부가 머무는 곳이겠지만 에스텔라와 요하네스는 별거 한지 오래 되었다.
요하네스는 조명도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지팡이를 짚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때, 아무도 없었어야할 5층 침실에 딸린 화장실의 손잡이가 돌아갔다.
손잡이를 다 돌리고 나자 엘리자베스가 걸어 나왔다. 늘상 입는 베이지색 드레스에 챙 넓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요하네스는 전혀 이상할 것 없다는 듯 엘리자베스에게 물었다.
“그래, 누가 제일 괜찮더냐?”
“제일 강한 건 샤를 헥센이야.”
“그 아이가? 교수라고 하지 않았었나?”
요하네스는 샤를을 떠올렸다. 추방된 샤를로테가 낳은 자식이다. 요하네스의 씨를 받은 것은 확실했다. 생김새도 그렇고 영적인 재능도 그렇고 그를 쏙 빼닮았다.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정보. 재단에게 정보 공유를 요청했더니, 그 애가 메트로폴의 비밀 세계에서도 유명하다고 하더라고 그 이상의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면 기여를 더 하라는데.”
“흐음.”
“제일 약한건 비앙카야. 비앙카는 자기 아들이 죽은 이후로 조각구원회에게서 후원을 받고 있었거든? 근데 조각구원회가 무슨 사건 이후에 망해버렸대. 그 뒤로 주문에는 손 대지도 못해.”
“흥. 그깟 사이비 교단 놈들이야.”
엘리자베스는 담배를 꺼내서 담배 집게로 집었다. 성냥에서 불이 나고 곧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궐련의 냄새를 빨아들이고 내뱉었다.
“후우우우. 그깟이라고 할 정도는 아닐걸. 에드워드에게는 암흑성도회라는 교단의 끄나풀이 붙었고 세바스찬에게는 헬파이어 클럽의 끄나풀이 붙었어. 그 짐승들 있지? 앵무새랑 개. 죄다 영성자더라.”
“내 자식들에게 빨대를 꼽고 내 재산을 쪽쪽 빨아먹으려는 모양이군. 절대 그렇게는 안 되지.”
“그래서, 어쩔 거야?”
“너무 느리다. 제일 강한 놈이 샤를이라고 했지? 그럼 나머지는 전부 없애야겠군.”
“유마는? 걔는 영성자도 아니야.”
요하네스는 잠깐 침묵했다. 유마는 특별한 아이였다. 요하네스가 진짜로 사랑해서 낳은 아이였다. 사랑을 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유마는 영성자는 아니지만 자산관리 능력이 탁월하잖아? 오빠처럼 말이야.”
“영성이 없으면 제물이 아니다. 앞으로 일어날 혼란 속에서 살아남는다면, 내 재산의 어느 정도는 물려받겠지.”
“살아남을 거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데. 휠레모르페 엔진의 위력을 생각해보라고.”
비앙카는 그 말을 남기고는 담배를 재떨이에 털어 넣고 열쇠총을 꺼내서 화장실 손잡이에 꽂아 넣었다. 그러자 반대편에 엘리자베스의 방이 나타났다.
“아, 근데 짐승들은 어떻게?”
“짐승들의 영혼은 훌륭한 제물이지. 이색적인 영혼은 더 좋고.”
손을 흔든 엘리자베스가 사라지자 요하네스는 슬슬 인내심이 사라져가는 걸 느꼈다.
“생각보다 진척이 느려.”
*
하인들도 사라지고 분주한 분위기도 사라지자 곧 고요해졌다. 그러나 서관이나 동관처럼 마치 무음실에 들어온 것 같은 침묵은 없었다.
몇몇 하인들이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으니까. 차라리 이게 잘 된 것일지도 모르지.
샤를은 이제야 샤를의 친모가 가지고 있었던 일기장을 펼쳐볼 수 있었다.
설정상 스토리가 진전되기 몇 년 전에, 샤를의 친모는 이 저택 밖으로 나와서 따로 살았다.
그리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샤를이 아는 정보는 이게 전부였다.
애초에 이 사이비 교주 시뮬레이터라는 게임 속에서는, 형제나 가족은 그렇게까지 중요한 정보가 아니었다.
샤를은 일기장 안에 있던 목걸이를 들어 올렸다. 전혀 단서가 없을 때 점술은 새로운 선택지를 제시해준다.
심상 세계로 목걸이를 가져간 다음 그곳에서 점을 치기로 했다.
보티브 초가 나열되어있는 장소에 도착한 샤를은 자신의 무명자로서의 권능을 목걸이에 집중시켰다.
점술 구문은 이렇게 한다.
‘이 목걸이의 기록.’
촛불의 잔상이 커지면서 화면이 나타났다. 그 화면에는 샤를의 친모 샤를로테가 요하네스와 다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자수정 목걸이는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화면이 불안정했다. 생생하게 눈으로 보는 것처럼 느껴져야만 하는 일들이, 마치 구식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화면처럼 변했고 소리도 드문드문 들렸다.
그러나 샤를로테가 말한 단 한마디의 단어만큼은 똑똑하게 들을 수 있었다.
“당신은 괴물이야!”
요하네스가 비릿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자 샤를로테는 그렇게 외치고는 목걸이를 그대로 낚아채서 짐가방을 들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때 주변의 화면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대신 엄청난 굉음이 퍼져왔다. 무언가 폭발하는 것 같은 소리 뒤에, 거대한 화산재가 하늘을 뒤덮는 것이 보였다.
하늘을 완전히 뒤덮은 화산재는 세상에 재앙의 편린을 보여주는 듯 했지만 보기만해도 소름이 끼쳤다.
잠시 뒤 엄청난 충격파가 퍼져나가면서 동시에 샤를은 점술의 영향에서 튕겨 나왔다. 현실로 빠져나온 샤를은 자신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걸 깨달았다.
점술 방벽이 걸려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점술이 불완전했던 거지?
“심상 세계에서의 점술은 문제가 없었어. 문제라면 내가 서 있는 물리 세계의 위치겠지.”
이 저택 내부에서는 점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방금 겪은 그 화산의 폭발.
이런 경험은 겪은 적이 있었다.
‘석판과 연관이 있을 때 이런 식의 위협이 가해지지. 저번에는 천둥 번개였지만 이번에는 화산인가…….’
샤를은 이 저택 내부에 있는 보물이 어쩌면 석판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했다.
‘내가 얻은 자료에서 석판을 묘사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얇은 판 형태일지도 몰라. 그리고 심상 세계에서 내가 행하는 일을 가로막을 정도의 힘을 가진 것은 석판 조각 뿐이지.’
샤를은 보물에 대한 기록을 떠올렸다. 비스타 헥센테르프는 자신의 배로 기어 올라온 인어를 죽이고 그 보물을 얻었다고 했다.
‘인어…….’
그러고보니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에이브라함의 다섯 제자가 가지고 있던 석판 조각. 그중 두 번째 제자 마쉬에 관한 것이었다.
마쉬는 대양을 돌아다니며 배를 몰던 거대한 배의 선장이었고 그는 훗날 해저의 심해 문명을 건설했다고 했다.
샤를은 가설을 만들었다. 어쩌면, 비스타 헥센테르프가 죽인 인어는 보통 인어가 아닐지도 모른다. 마쉬의 피를 이어받은 인어일지도.
‘마쉬는 성에 있어서는 개방적인 인간, 흔히 말하는 가능충이었지. 그럼 인어랑 교미해서 자식을 봤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그 인어가 마쉬의 후예였고 인어의 심상 속에서 혈족 계승으로 내려오는 석판 조각을 이어받았다라고 하면 어떨까.
그리고 내면에 잠들어 있는 것을,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 모르겠지만 비스타 헥센테르프가 추출해냈을지도 모른다.
지금껏 마쉬의 석판 조각은 도저히 단서가 없었는데 샤를은 처음으로 마쉬의 것일지도 모르는 석판 조각에 관한 정보를 얻은 것이었다.
‘보물이 석판 조각이라면 모든 게 설명이 돼. 이곳에 고립된 것도, 무명자의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 것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게 하나 있다. 석판 조각은 심상 세계에 존재할 수 있었을 뿐 물리 세계에는 나올 수 없다.
렘 노인의 제자들은 석판이 사악한 존재에게 탈취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심상 세계 속에 석판을 꽁꽁 숨겨뒀기 때문이었다.
‘어? 어쩌면 이게 힌트일지도 몰라. 생각해보자.’
목걸이가 점술이 통하지 않는다고 해서 소득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샤를이 보물의 정체가 석판이라고 추측하게 했던 것과는 상관없이 이 목걸이 자체에 특별한 기록이 새겨져 있는 것 같다.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그리고 어떤 조건이 있으면 점술을 통해 더 뚜렷하게 과거를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점술 구문을 다 보고 난 이후에 석판 조각의 힘이 내게 몰려왔었지. 그걸 생각하면 재차 시도해볼만 해.’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석판 조각의 힘은 완전히 점술을 봉쇄하지 못했다. 불완전하게나마 목걸이를 이용해서 과거를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석판 조각은 완전한 게 아니야.’
다른 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석판을 가진 자들은 그들의 선조와는 달리 전혀 석판의 힘을 사용하지 못했다.
이번 석판도 마찬가지 일 거라고 본다.
이 목걸이가 과거에 돌아다녔던 저택의 장소마다 돌아다니며 점술을 치른다면 더욱 많은 정보가 들어올지 모른다.
이 목걸이가 샤를에게 있어서 일종의 이정표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샤를은 자수정 목걸이를 목에 걸고 옷 안으로 넣었다. 한 하인이 문을 두드렸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지?”
“에드워드님께서 다 함께 저녁 식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십니다.”
“다 함께?”
*
그 기묘한 저녁 식사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 함께라고 해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은 딱 다섯 명이었다.
에드워드, 세바스찬, 비앙카, 유마, 샤를. 모두 이복형제지만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고 유산 문제가 아니었으면 거실에서 서로 만나지도 않았을 것이었다.
넓은 식탁에 호화로운 만찬이 가득 채워지고 와인이 듬뿍 담긴 잔이 옮겨졌다.
샤를이 도착한 건 마지막이었다. 보통 이럴 때면 비앙카가 샤를을 보면서 보통 이죽거려야 하건만, 무섭도록 침묵하고 있었다.
그래서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는 유마를 제외하면 대부분 침착하게 서로를 바라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드워드였다.
“음. 이렇게 모이자고 한 건,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서야.”
“사람 취급도 안 하다가 제 손에 아버지가 남긴 부동산이 들어오니 이제 시작하는군요?”
샤를이 에드워드의 이중성을 비꼬았다. 에드워드는 기분 나쁠 정도로 무표정하게 샤를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건 내가 사과하도록 하지. 난 너희들이 있는 줄 몰랐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표정에서 전혀 미안하다는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샤를의 관찰력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도련님’으로 자라다보니 사회생활 수준이 거의 제로네.
샤를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눈을 돌렸다. 세바스찬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