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 “그, 그게 말이에요.”
비앙카는 이런 일로 지적을 받을 줄 몰랐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 말을 듣고 주변을 살피던 비서 데오그란트가 요하네스의 귀에 무어라 속삭였다.
“비앙카. 네가 덜 맞은 게냐?! 시키지도 않은 일을 마음대로 처리해?!”
“아, 아닙니다. 아버님.”
비앙카는 요하네스의 호통에 벌벌 떨면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어느새 비앙카의 품에 다시 안겨 있던 원숭이도 놀라서 비앙카의 뒤로 돌아가 숨었다.
“샤를과 유마. 이리 와서 앉아라.”
부름에 응한 두 청년이 각탁에 앉자 심기가 불편해진 사람들이 그들을 잠깐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콜록. 콜록.”
요하네스는 잠시 기침을 한 뒤, 말했다.
“너희들도 보다시피 내가 곧 죽을 예정이다. 그래서 미리 내 유산을 승계할 생각이다.”
“예?”
폭탄선언으로 다들 놀라는 가운데 요하네스가 이어서 말했다.
“그리고 유산은 단 한 명만 계승 받는다.”
나눠서 주는 것 없이. 단 한 명만 유산을 계승 받고 나머지는 모두 빈털터리라는 뜻이었다.
그 말에 누군가는 화색을 띠었고 누군가는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하네스의 말은 가문 내에서 절대적이다.
그러니 누구 한 명에게 유산을 준다는 것에 토를 달아선 안 된다는 것을 헥센 가문의 사람들은 일찌감치 어렸을 적부터 학습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첫째인 에드워드가 꺼낸 말은 실로 실리적인 말이었다.
“어떤 사람이 계승 받습니까?”
장자 계승의 원칙에 따른다면 당연하게도 에드워드에게 그 유산이 돌아오게 되었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 심지어 서자들까지 모아두고 유산 상속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는 건 분명히 이유가 있다는 뜻이었다.
요하네스는 지팡이를 양손으로 짚고 시선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한 초상화가 있었는데 콧수염을 기르고 덩치가 큰 남자가 하나 있었다.
“가문의 시조 비스타님께서는 아주 위대한 보물을 찾으셨다. 그리고 그 보물을 얻게 된 이후부터 우리 가문은 부흥하게 되지. 여명기를 거쳐 암흑기에 이르고 근세에 이르기까지 우리 가문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보물 때문이다.”
“…….”
에드워드는 입을 다물었다. 설마……. 에드워드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도 떠올리고 있었을 것이었다. 입버릇처럼 말하던 가문의 보물. 요하네스는 젊었을 적부터 그걸 찾아 혈안이었다.
“그 보물은 언제부턴가 사라졌다. 가문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자들이 죽고 전승이 끊기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난 그걸 찾아온 녀석에게 가문의 모든 유산을 물려줄 셈이다.”
그 말에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누구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람들은 보물을 찾는 게 그냥 요하네스의 소일거리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도 그럴 게, 보물의 형태나 모습은 어디에도 전승되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제 말년에, 죽을 때가 돼서 요하네스는 그걸 찾아내라고 자식들에게 시킨 것이었다.
“아버지. 그걸 대체 어떻게 찾습니까? 형태도 모르고 단서도 없습니다. 애초에 이 저택에 없는걸요.”
“이 저택엔 있다! 무조건 있어!”
요하네스는 지팡이로 바닥을 내리찍으면서 혈안이 된 채 크게 소리질렀다.
“이 저택 내부에 없으면 우리 가문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것이 말이 되느냐! 분명히 저택 내부에 남아서 헥센 가문을 보호하고 있다!”
다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요하네스를 바라보았다. 보물? 대체 그게 뭔지 모르겠고 겨우 그딴 걸로 가문의 유산을 승계한다니 이게 대체 가당키나 한 말인가?
“헥센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그걸 찾아낸다면 누구든! 내 유산과 이 가문을 물려받을 거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 그리고 그걸 찾아내기 전까지 누구도 이 저택에서 나갈 수 없어!”
이제야 샤를과 유마를 부른 이유가 드러났다. 요하네스의 말에 불편해진 사람들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가주의 권위 앞에서 그들은 아직 반항할만한 깜냥이 되지 않았다.
그때 둘째 세바스찬이 퀭한 눈동자로 말했다.
“아버지. 그걸 찾아냈을 때 그게 보물이라는 건 어떻게 알죠?”
“한눈에 봐도 보물이라는 걸 알 수 있을 거다. 그걸 알아내는 것도 내가 낸 과업이다.”
쿵. 쿵.
제 할 말을 모두 마친 요하네스는 그의 비서 데오그란트와 함께 자리를 비웠다.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했으며 오늘 일이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는 듯했다.
“보물찾기라고? 그런 건 여덟 살 이후로 졸업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에드워드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세바스찬이 말했다.
“어쩌면 아버지는 누구에게도 유산을 승계할 생각이 없는 게 아닐까? 존재하지도 않는 보물을 찾으라고 한 거지.”
“말도 안 되는 소리. 헥센 가문의 유산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후대에게 계승되어왔다. 가문의 유훈을 아버지가 따르지 않을 리가.”
“그럼 그냥 가만히 있을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기다리기만 한다면 어차피 유산은…….”
그때 잠깐 밖으로 나갔었던 데오그란트가 문을 확 열고 들어와 세바스찬의 말이 끊겼다.
사람들은 데오그란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지 않은 말이 남아있다고 하셔서 전해드립니다. 만약 누구도 보물을 찾아내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누구도 유산을 상속할 수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뭐?!”
“헥센 가문의 모든 유산은 ‘봉인 재단’으로 기부되어 사회에 환원될 거라고 하십니다.”
“헛소리 하지마!”
에드워드가 분노하면서 몸을 일으켜 데오그란트에게 삿대질했다. 격렬한 분노에도 늙은 노가주의 중년 비서는 담담하게 안경을 추켜올리면서 그 감정을 흘려냈다.
“이건 직접 작성하신 유언장에 명시된 내용입니다. 그럼 이만.”
사람들은 이제 정말로 꼼짝없이 보물찾기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에드워드는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야!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고!!”
그 이후로 의미를 알 수 없는 괴성을 지른 에드워드는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버지가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그 보물이라는 게 정말로 있다는 얘기인데.”
세바스찬은 자리에 남아서 혼자 중얼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주변이 어수선해질 때 유마가 샤를을 보면서 물었다.
“형님, 정말로 보물이라는 게 있는 걸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샤를도 자리를 뜨기 전에 강렬한 시선을 받고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가주의 부인이자 계모인 에스텔라 헥센이 샤를을 노려보고 있었다. 눈빛에 증오와 분노가 섞여 있었다.
‘언제라도 살인을 저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
찌르는 듯한 살기를 무시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자리를 떴다.
그는 이게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메인 스토리에는 전혀 영향을 가지 않는 헥센 가문 내부의 일.’
이전 게임 플레이 때는 헥센 가문에서 부르건 말건 무시했었다. 어차피 메인 스토리에는 전혀 연관도 없고 있으나 마나 한 사건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현실이 된 지금, 샤를의 생각보다 더 무언가 기묘한 일이 이 저택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예감을 감출 수 없었다.
*
샤를은 자신에게 배정된 방으로 갔다. 내부는 깨끗하고 잘 정돈된 방이었지만 주변은 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이 적막이 모여 음침함을 만든다. 창문을 열어서 밖을 바라보았다. 안뜰이 보인다.
샤를은 저택으로 들어오면서 주변을 쭉 살핀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 저택이 얼마나 고립적으로 설계되었는지 알아챘다.
들어오는 문은 정문. 나가는 곳도 정문 하나였다. 저택 뒤뜰로는 숲이 있었는데 저 숲으로는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그의 영성을 자극했다.
‘숲에 뭔가 있어.’
자연스러운 무언가가 아니라, 부자연스럽고 이곳에 존재해서는 안 될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저 숲은 짐작도 못 할 정도로 오랫동안 헥센 가문의 뒤뜰에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부분은 큰 담장으로 막혀 있다. 담장마다 몇 미터 간격을 두고 위에 있는 가고일 모양의 동상이 거슬린다.
똑똑.
“왜?”
“저, 형님. 접니다.”
“들어와.”
저녁 식사는 당연하게도 따로따로 먹었다. 방마다 하인들이 가져다 줬으므로 방에서 식사했다.
샤를은 본처의 자식들이 뭘 하건 별로 관심도 없었다.
“저, 형님. 정말로 찾을 거예요?”
“난 그냥 설렁설렁 찾아볼 생각인데, 어차피 할 것도 없잖아? 넌 어떻게 할 건데.”
“저는 그냥……. 가만히 있게요.”
유마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샤를은 유마가 수도에서 꽤 큰 상회를 이끌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근데 생각보다 유약한 반응에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이런 나약한 모습의 사내가 상회를 이끄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왜?”
“전 그냥.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을 뿐이에요. 숙부께서는 늘 이곳에 돌아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이번에도 아버지의 강권이 아니었으면 안 왔을 거고요.”
숙부라면, 7년 전쯤 병사한 코먼 헥센이었다. 요하네스 헥센의 동복 동생이자 샤를의 숙부기도 했다.
“왜?”
“이곳에는 괴물이 산다고 했어요.”
“괴물?”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고 했으니……. 전 이제부터 유산상속이 끝날 때까지 방에만 있을 예정입니다. 미리 좀, 말씀드리려고요.”
“……그렇게 해.”
코먼 헥센은 뭐하는 사람이었길래, 유마에게 그런 말을 남겼던 걸까. 그러나 저택 안에 괴물이 있다고 한다면 샤를도 미리 준비를 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심하세요.”
“걱정마라.”
유마가 떠난 뒤에 심상 세계에서 리볼버를 꺼내서 탄환을 재었다. 마법이 걸린 탄환이었으니 괴물이 나온다면 확실히 머리통에 구멍을 내줄 수 있을 거다.
준비를 끝마친 샤를은 권총을 보이지 않게 허리 뒤쪽 벨트에 꽂고 저택 복도로 나왔다. 복도에는 끔찍할 정도로 소리가 없었다.
풀벌레나 새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단지 벽에 걸린 촛불들 만이 음산한 어둠을 희미하게 밝힐 뿐이었다.
영성을 눈으로 보내 어둠 속을 꿰뚫어 보는 샤를은 그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샤를은 저번에 얻었던 행운의 응결체가 아직 남아있는 이유가 어쩌면 이 일로 인해 해소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산의 승계도 부의 증대는 맞는 말이었으니까.
이 저택 내부에 있다는 보물을 손에 넣기만 하면 행운의 응결체가 소화될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러나 걸을수록 이상할 정도의 공포심이 따라왔다. 피부에는 소름이 돋고 어둠 속을 걸을 때마다 무언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긴장감이 돌았다.
샤를은 걸음을 멈췄다.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쿵쾅거리고 있어서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말동무라면 어떨까.
-야. 파기.
-우웅. 왜. 나 자는뎅.
허리춤에 걸려있던 책에서 파기나레코르가 깨어나 하품을 하면서 날아올랐다. 눈을 비빈 파기나레코르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야?
-그 저택의 복도.
-으에? 근데 갑자기 졸리다.
-응? 졸리다고?
-계속 졸려. 쭈인이 안 불렀으면 그대로 계속 잠을 잤을 것 같은……ZZZ
파기나레코르는 말하다 말고 다시 책속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뭐야?’
이 저택,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순한 저택은 아닌 것 같다. 샤를은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걸음을 옮겨서 데오그란트의 방으로 향했다.
그의 방은 사용인들의 방 근처였다. 수많은 사람이 분주히 돌아다니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은 곳은 역시 샤를의 방처럼 적막했다.
똑똑.
“누구십니까?”
“데오그란트. 나다.”
“아, 작은 도련님.”
요하네스의 비서는 다행히도 방에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지난 뒤에 문이 열렸다.
그런데 요하네스는 문을 열자마자 좌우를 살피더니 곧바로 샤를에게말했다.
“작은 도련님. 방에서 얘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떨리는 눈동자. 불안감이 깃든 목소리 샤를은 그가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유가 뭐지?
“그러지.”
샤를이 방으로 들어가자 요하네스는 그대로 방문을 잠갔다.
철컥. 철컥. 철컥. 철컥.
근데 놀랍게도 자물쇠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 모든 복잡한 자물쇠를 잠근 요하네스는 여전히 창백한 안색으로 샤를을 의자에 앉게 했다. 그리고 말했다.
“저녁 9시 이후로는 저택을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뭐?”
방에 있는 괘종시계를 보니, 지금은 막 8시가 된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