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 디노의 이상한 행동에 대해서 플로나에게 조사하라고 시켜뒀다.
샤를은 혹시 몰라서 점술을 쳐봤지만 지금 당장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디노가 광기에 절여져 있는 부분은 석연찮은 부분이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저러다 제대로 된 와인을 만들지 못하면 그때가서 해고해도 늦지 않다.
샤를은 미스트위버 대학으로 올해의 마지막 출근을 했다. 메트로폴 사람들은 하나같이 효율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서 연말 파티도 없다.
연말이라고 따로 모이는 일도 없어, 아는 교수들끼리 인사를 좀 하고나서 마지막 수업을 끝마칠 무렵이었다.
그때 샤를은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인물을 만났다.
“어? 리카?”
“안녕하세요 교수님.”
리카 웹스였다. 저번에 겪었던 산장의 살인사건 이후 리카는 웹스 가문에서 비밀 지식들을 습득해서 영성자가 되었을 터였다.
“좀, 바뀌었구나.”
그 말대로 리카의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모습은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알 수 없는 요염함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런가요? 후훗.”
그리고 머리카락을 길게 길렀다. 거의 엉덩이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기른 리카의 머리 색은 더 밝은 금발로 변해 있었다.
“교수님께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러 왔어요. 그간 출석을 못 했거든요.”
“음. 미안하지만 재수강이란다.”
어, 지금 영성자가 됐다고 빵꾸난 학점을 메꿀 생각인가 본데 어림도 없지.
“아, 내년에도 다시 들으려고요. 잘 부탁드려요.”
얼굴에 빨갛게 홍조가 띤 리카를 보면서 샤를이 얼빠진 듯 대답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하고 피가 쏠린다.
샤를의 시선이 리카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혈색이 도는 얼굴. 붉은 입술, 도톰한 가슴, 옷 아래에서도 보이는 섹시한 몸매. 그리고…….
허공으로 뻗은 손이 점점 리카에게 다가왔다. 리카의 뺨을 잡으려는 것 같은 그 손짓.
리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이걸로 이제 교수님도 나의 포로…….
딱.
샤를의 손가락이 리카의 이마를 딱소리나게 쳤다.
“아악!”
“사과는 받아주겠다. 올해는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듣지 못하게 됐지만, 내년에 보도록 하자꾸나.”
“네에.”
샤를의 딱밤에 리카는 자신의 이마를 부여잡으면서 말했다. 샤를은 남은 책을 챙겨서 자리를 떴다.
리카는 뾰로통한 표정으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이걸로 안 통하나 보네.’
샤를은 자리를 뜨면서 생각했다.
‘이제 매료술까지 거네? 제대로 된 영성자가 다 됐군.’
-어? 저거저거 아주 미쳤구만 미쳤어!
*
『그 저택에는 괴물이 산다.』
유마 헥센은 저택의 앞에서 멀찌감치 선 채 죽기 전에 숙부가 했던 말을 되새김하고 있었다.
『살고 싶으면 되돌아오지 마라. 그 저택에는 괴물이 산다. 만약 저택에 들어왔다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마라. 웬만하면 말이야.』
숙부의 말대로라면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그럴 수 없었던 유마는 그곳을 떠나 도망치듯 수도로 갔었다.
저택의 뒤로 석양이 지자 분위기는 좀 더 을씨년스러워졌다.
한 대의 핸섬 마차가 도착한 것은 그때였다. 샤를은 평범하게 마차를 타고 도착했다.
‘신년부터 이딴 데를 와야 한다니.’
솔직히 지금은 가문과 거의 의절 관계지만 샤를은 그의 뿌리가 헥센 가문에 있다는 걸 잊고 있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지.’
그러다가 앞에 서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그가 누군지 안다. 샤를의 동생이자 수도 인시그니아에서 상단 하나를 가진 남자……이면서 그의 이복동생이기도했다. 샤를은 마차를 세웠다.
“유마?”
“아, 형님이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유마는 소년 같은 무구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김새도 꼭 여자 같은 데다 헥센 가문의 남자들답지 않게 작은 키, 호리호리한 몸매를 지닌 미소년 같았다. 멀리서 봤으면 여자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유마는 유일하게 이 헥센 가문의 인간 중에서 제정신이었다.
‘그래서 몇몇 플레이어들은 유마가 사실 헥센 가문의 사람이 아니라 다른 씨에서 태어났는지 의문을 품고는 했었지.’
커뮤니티에 떠돌던 정보 글에서 그런 말을 떠올렸다. 김연수가 빙의하기 전 샤를 헥센도 광기에 들려서 홀로 마도서를 읽는 미친놈이었다는 건 매한가지였으니 이 가문에서 유일한 정상인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왜 여기에 서 있냐? 들어가자.”
“아, 알겠습니다……. 근데.”
“응? 왜?”
“형님 조금 분위기가 바뀌신 것 같습니다.”
하긴, 이전의 샤를 헥센은 냉정하고 차가운, 그런 인간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예전의 샤를이였다면 저택 앞에 서 있는 유마 따윈 무시한 뒤 마차로 치어버릴 기세로 빠르게 달려서 홀로 들어갔을 터였다.
“조금 심경의 변화가 있었지.”
샤를은 그렇게 자신의 변화를 일축하고는 저택으로 들어섰다. 저택의 문이 열리자 안뜰이 드러났다.
안뜰 내부는 잘 정리되어 있었지만 어딘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귀기가 느껴졌고 주변에는 가고일 같은 석상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유마는 석상들을 보면서 언제 봐도 무섭고 소름 끼친다고 생각했다. 가문의 가주이자 그의 아버지의 취향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사실 샤를이 보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안뜰은 뭔가 알 수 없는 마법이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분석하면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나, 그건 그거대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므로 지금은 뚜벅뚜벅 걸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한겨울의 찬 바람 사이로 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입구에서는 집사가 대기하고 있었다.
얼마나 나이를 먹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늙은 사람이 서 있었다. 집사 보마르였다.
“어서 오십시오. 작은 아기씨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샤를과 유마가 어린 아기였을 때도 노인이었던 그 노인은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었는데 눈동자가 너무 작아서 흰 부위가 네 군데나 보이는 사백안이었다.
유마는 그를 보면서 어릴 때 어떻게 저 노인을 좋아했었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오랜만이군, 보마르 집사.”
샤를이 말했으나 집사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대꾸도 하지 않고 안쪽으로 안내했다.
-쭈인, 저 집사 죽일까?
-넌 진짜 그놈의 죽일까좀 그만해 중2병 같잖아.
-중2병이 모야? 난 그냥 무례한 놈의 대가리를 반으로 쪼개고 싶다고!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마치 북구의 바이킹 전사가 할 법한 소리를 한 파기나레코르가 이리저리 떠들자 샤를은 그냥 입을 다무는 것으로 그만두기로 했다.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저택의 동관과 서관을 보면서 샤를은 본관으로 들어갔다.
저택 내부에는 하인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샤를은 하인들의 얼굴을 보면서 그들의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얼굴에 놀라울 정도로 표정이 없다. 마치 누군가 감정을 잘라낸 것처럼.
“으으, 역시 무서워.”
유마가 그렇게 혼잣말을 했지만, 샤를은 대꾸하지 않았다.
저택 내부는 고풍스러웠고 예술작품이 다섯 발자국 걸으면 눈에 띠었다.
머나먼 동방에서 가져왔다는 백자기. 벽에 걸려 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기괴한 그림들.
복도를 지나쳐 응접실로 갔다. 그곳의 커다란 홀은 마치 파티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컸다.
‘우리 대학 강당보다 크겠네.’
문을 열자마자 응접실에서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샤를은 그들의 앞에 한 귀부인이 서는 걸 볼 수 있었다.
아이보리 색 테일러드 수트 입은 그 여자는 매우 붉은 머리카락에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는 30대의 여성이었다.
이름은 비앙카 헥센. 결혼해서 자식까지 있었으나 남편은 사별했다.
특이하게도 그녀의 어깨에는 드레스를 입은 원숭이가 놓여 있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서자 놈들 둘이 한꺼번에 들어오잖아? 어서 와. 아주 잘 왔어.”
그녀는 자신의 어깨에 있던 원숭이를 옆에 있는 하인들에게 건네주더니 샤를과 유마를 불러서 응접실 구석에 있는 자리를 손짓하면서 말했다.
“저기에 가서 앉아. 저기가 너희 자리니까.”
응접실 중앙에 있는 길쭉한 각탁 테이블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는 곳으로, 헥센 가문에서 샤를과 유마의 위치를 알려주는 단편적인 예였다. 유마가 눈치를 보자 비앙카가 말했다.
“설마, 너희들이 저 탁자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이번 신년 행사는 아버지께서 친히 너희 같은 찌꺼기들도 불러 주셨잖아? 감사히 가서 앉아야지.”
모욕적인 언사에도 샤를은 군말 없이 멀찍한 자리에 자리를 잡기로 했다.
이 헥센 가문네 인간들이 하나같이 싹수없는 놈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따라가자 유마도 엉거주춤 그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그런 샤를을 보면서 비앙카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어머, 너는 좀 반항할 줄 알았는데 요즘 여자친구라도 생겼니? 고분고분하네.”
샤를은 입을 다무는 것으로 비앙카를 무시하기로 했다.
“지금 나 무시해?”
샤를은 비앙카를 보면서 씨익하면서 한쪽 입꼬리만 올렸다. 마치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한 표정.
비앙카가 폭발할 때쯤 다른 형제들도 들어왔으므로 비앙카는 샤를에게 시비 거는 걸 멈추고 그들을 맞이했다.
“어머, 오빠들 왔어!?”
“그래. 반갑다.”
무표정하게 대답하는 남자는 에드워드 헥센이었다. 그는 이 가문의 장남이었다. 키는 크고 어깨는 떡 벌어져서 강인한 모습이었다.
그 뒤로 둘째인 세바스찬 헥센이 있었다. 세바스찬은 역시 키가 컸지만, 근육질인 형과는 다르게 몸이 말라 있었다.
거기다 눈밑에는 다크서클이 가득했고 어딘지 모르게 음침한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둘의 생김새는 매우 흡사했다.
“얘. 니 눈엔 나는 안 보이니?”
“당연히 고모가 온 것도 알지. 얼른 들어와.”
현 가주의 여동생인 엘리자베스 헥센이 뒤이어 나타났다. 엘리자베스는 비앙카보다 오히려 어려 보였다. 나이가 50대 근처일 텐데도 주름 하나 없었으며 자세히 보면 소녀처럼 보였다.
그들 일행은 샤를과 유마를 보면서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고도 그냥 지나갔다.
철저한 무시. 이게 헥센 가문에서 샤를과 유마의 입지였다.
비앙카는 샤를과 유마를 인식이라도 했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들을 제외한 사람들은 마치 공기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들은 관심이 없었다.
유마는 조금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들이 무어라 말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샤를에게 물었다.
“기죽을 필요 없어. 어깨를 펴고 있으면 돼.”
“아, 알았어요 형.”
의지할 데 없는 가문 내에서 개심한(?) 샤를이 의지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자 유마는 샤를을 꽤 신뢰하고 있었다.
응접실에서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대부분 샤를과 유마를 완전히 무시한 본처의 소생들이 하는 얘기로, 그들의 사업에 관련된 얘기들이었다.
“형 아인도 식민지에 회사가 얼마나 됐었지?”
“왜?”
“곧 처분하는 게 좋을지도 몰라.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있어. 프랑기아 놈들이 고베 북쪽 금광산에서 문제를 일으킬 것 같아.”
“은행은…….”
잠시 뒤에 문이 벌컥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왔다. 그들을 보자마자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그는 당대의 헥센 가문의 가주 요하네스 헥센과 그의 부인 하이디 헥센이었다.
그리고 요하네스의 비서 데오그란트가 있었다. 세 명이 걸어들어오자 다들 고개를 푹 숙였다.
샤를의 생물학적 아버지 요하네스는 눈이 퀭하고 등이 굽은 상태라, 누가 봐도 별로 상태가 좋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거기다 지팡이까지 짚고 온다.
그의 아들들은 하나같이 눈을 빛내면서 아버지가 언제 죽을지 기대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 뒤에 몰려올 유산에 대한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요하네스는 자식들을 승냥이로 길렀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젊은 승냥이들은 이제 늙은 호랑이를 물어뜯을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나 아직은 호랑이의 위세에 굴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땅.
지팡이를 바닥에 내리친 요하네스가 처음 꺼낸 말은 이거였다.
“왜 내 아들 둘이 보이지 않느냐? 집사의 말로는 아까 다 왔다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