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 지금 남아있는 것은 제롬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샤를의 하수인이었다.
제롬은 멍청하게 샤를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샤를이 여태까지 지배의 권능을 사람들에게 쓰지 않은 것에는 때에 따라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완전히 악인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이중적인 면모를 갖고 있었다. 가족들에게는 따뜻한 사람이지만 적에게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존재일 수 있다.
그리고 지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아무나 지배해서 점유칸을 채워뒀을 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지배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샤를의 내면에 있는 어떤 기준 때문이었다.
윤리와 도덕성을 붙잡고 있는 기다란 선. 그건 샤를이 김연수라는 현대인이었기 때문에 가지고 있는 관념이었다.
이 세계가 게임이었을 때에는 거리낌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이전에 샤를로 플레이했을 때는, 지배의 권능을 이용해서 자살 폭탄 테러를 저지르는 일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곳이 현실이 된 이후부터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었다. 샤를은 늘 다짐했다. 지배의 권능을 생물에게 사용할 때는 늘 신중하자고.
최악의 악인에게만, 그것도 목적이 있어야만 사용하자고.
그리고 그 대상은 제롬 모슌이었다.
처음으로 샤를의 지배의 권능으로 생물을 조종한 사례였다.
이전에 시도했던 악인은 머리에 볼트가 심겨 있으므로 실패했다만.
제롬만큼은 꼭 지배하에 두어야 했다.
앞으로 샤를이 암흑성도회에 벌일 일의 첨병이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샤를은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보이나?”
“예. 주인님.”
멍청한 표정의 제롬이 말했다. 인형처럼 표정에는 생기가 없었다. 샤를은 박수를 두 번 치면서 말했다.
“네 예전 성격으로 되돌아가.”
“이렇게 말입니까?”
제롬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그는 방금 당한 사람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싱긋 웃고 있었다.
-쭈인, 내가 할 건 더 없어?
-그래. 충분한 거 같아.
샤를은 제롬이 도망쳤을 때를 대비해서 주변에 파기나레코르를 대기시켜두고 있었지만, 한 번에 잡혀서 다행이었다.
하긴 샤를도 자신의 손에 들어올 줄 몰랐었던 오르골을 제롬이 예상했을 리가 없었다.
샤를은 파기나레코르와의 대화를 멈추고 다시 제롬을 바라보았다.
“넌 누구지?”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난 누구지?”
“오직 한 분뿐인 위대하고 존엄하신 주인님이십니다.”
“네가 해야 할 일이 있다.”
“뭐든 분부하십시오.”
샤를은 제롬을 스파이로 쓰기로 했다. 처음엔 내부 정보를 꺼내는 것부터 시작한 뒤, 최종적으로 암흑성도회의 교주가 봉인된 장소에 도달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암흑성도회의 씨앗은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지만……. 산산조각 내버릴 수는 있지.’
그리고 그를 사용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네가 수술을 해줘야 할 사람이 하나 있는데.”
“어떤 수술이죠? 주인님?”
*
어느날 이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정렬하고 이계의 심층과 물리 세계의 통로가 열렸다.
통로가 열리자마자 통로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배하고 있던 네 지배자는 통로를 통해서 현실에 영향력을 끼쳤다.
첫 번째로 움직인 것은 차원과 어둠을 지배하는 암격사였다.
제일 먼저 그의 영향이 닿은 곳은 통로 밖. 메트로폴이었다. 조그맣고 작은 먼지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도시는 그의 마음에 썩 들었다.
통로가 좁아 직접적인 영향을 끼칠 순 없으므로 그는 자신의 하수인이 될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암격사의 권능을 느낀 영성자들은 그의 추종자가 되었고 추종자들은 순식간에 불어나 메트로폴에서 가장 큰 세력을 형성했다.
나머지 셋이 통로로 끼어들어서 통로를 다시 4분의 1로 나눠서 써야하는 불편함을 느낀 암격사는 자신의 권능을 담은 화신을 만들기 위해 ‘씨앗’을 준비했다.
그걸 보고 다른 셋이 따라한 것은 암격사의 생각에서는 매우 불쾌하고 불편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제일 처음으로 씨앗을 투여했으니 제일 먼저 깨어날 것이라.
그의 씨앗을 받아 깨어날 존재를 보고 암격사는 즐거운 기분으로 시간의 흐름을 견디기로 했다.
*
어두운 수술실 내부.
딸그랑.
은색 쟁반 위로 납탄 한 발이 떨어졌다. 남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꿰멘 제롬은 수술 장갑을 벗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선 병약해 보이는 소녀 하나가 창백한 안색으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대답을 촉구하는 눈동자를 보고 제롬이 먼저 입을 열었다.
“두개골과 뇌 사이에 박힌 탄환은 제거했어. 어째서인지 몰라도, 탄환이 점점 두개골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더군. 조금만 더 늦게 수술했어도 늦었다.”
그야말로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수술을 끝마친 참이었다. 제롬의 말에 골레릭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자는 약한 모습을 보였다간 언제든 그걸 빌미로 공격할 수 있는 영성자였으니까.
“아 참, 그리고 의뢰는 취소다. 선입금은 가져도 좋아.”
“의뢰, 취소라고?”
“난 그분께 감화되었다. 내가 왜 여태까지 그분과 적대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영성자끼리의 싸움 속에서 여태까지 적대하던 포지션에서 완전히 정반대로 돌아설 확률이 얼마나 될까.
골레릭은 제롬의 변심에 무언가 조작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어차피 제롬은 돈을 건넨 의뢰주였을 뿐이지 친구나 지인조차 아니었다. 의뢰 취소라면 취소인 걸 받아들이면 된다.
“수술비는 필요없어.”
“…….”
“대신 나랑 좀 해야할 일이 생겼다. 두 번째 의뢰는 어떤가?”
“난 같은 대상에게 의뢰를 연속적으로 받지 않아.”
프리랜서 암살자의 철칙. 같은 대상에게 의뢰를 계속 받게 되면 종속된다. 골레릭은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건 주인님께서 주신 의뢰야.”
“샤를 헥센의……?”
“암흑성도회의 음. 파괴까진 아니고 분쇄라고 하지. 의뢰금은 준비해두었다.”
“좋아. 의뢰를 받지. 하지만 지금은 안 돼. 유스티나가 깨어날 때까진.”
“뭐, 당장 필요한 건 아니야. 준비 작업이 필요하거든.”
제롬은 샤를이 내린 명령을 떠올렸다.
*
샤를의 저택에 다섯이 모였다. 샤를과 그의 제자 플로나, 에세나, 그리고 얼마전 집회에서 세례를 받아서 새로운 제자가 된 모리.
그리고 제롬까지.
제롬이 제일 이질적인 인물이라 제자들은 이 자리에 왜 그가 왔는지 어리둥절 해하고 있었다.
“새 계획을 설명해주마. 암흑성도회에 대한 공작이다.”
“공작이요?”
“그래. 아직 암흑성도회를 분쇄할만한 힘이 없으니 그 전에 이뤄야할 일이라고 할까.”
샤를은 암흑성도회에 대해 전혀 모르는 제자들에게 설명했다.
“암흑성도회는 여러 갈래의 계파가 있지만 제일 큰 계파는 셋이야. 설명해 제롬.”
“예. 첫 번째는 샴발라. 샴발라 일파는 의식 마법에 통달해 있습니다. 제일 크고 사람 수도 많죠. 두 번째는 아슐라. 아슐라 일파는 암흑을 광적으로 숭배하는 일파입니다. 언젠가 암격사가 강림해 세상을 어둠으로 뒤덮으리라는, 원론적이고 강경파죠. 세 번째는 그누사 일파입니다. 그들은 소환 마법에 능통합니다. 다른 차원에서 짐승을 불러오는 것 따위의 소환술이죠. 나머지는 별 볼일 없는 소규모의 계파입니다.”
제자들은 머릿속에 샴발라, 아슐라, 그누사라는 세 개의 일파를 머릿속에 새겼다.
샤를이 이어서 말했다.
“세 계파 중 누군가가, 암흑성도회가 모시는 신인 암격사의 씨앗을 받았다. 이 씨앗을 받은 존재는 암격사의 화신이 되지.”
“화신이 된다는 말씀은 그가 물리 세계에서 신의 권능을 행사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요즘 수업을 들으면서 부쩍 비밀 세계의 지식이 늘어난 에세나가 묻자 샤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기 전에 저지하는 게 이번 목적이다.”
“저희도 각오해야겠군요. 교단 사람들은…….”
에세나가 굳은 표정으로 말하자 샤를은 고개를 저었다.
“교단원은 되도록 싸우지 않게 하겠어.”
수가 줄면 무명자에게 오는 신앙도 줄어든다. 그럼 오히려 손해다.
“싸우는 것은 몇몇이면 충분해.”
군대의 싸움이란 더 많은 병사와 더 많은 총, 그리고 전술이 필요하다.
영성자의 싸움에서는 숫자보다 얼마나 더 많은 유물이 필요한지, 더 강한 능력이 있는지가 필요하다.
대비를 해두면 어느 상황에서도 대처할 수 있다.
문제는 점술이나 예지에서 회피한 불청객들이 계획 사이에 끼어들 때 일이 틀어지는 것이다.
“되도록 이 일은 비밀로 하도록 해. 제롬. 우선 첫 번째 목표는 정보 파악이야. 누가 ‘씨앗’을 받았는지 알아내. 분명히 근래에 칩거에 들어갔을 거다.”
“알겠습니다.”
“알아내고 난 뒤에, 우리가 그걸 처리할 거야. 혼란을 일으키는 방식으로 말이지.”
“예.”
샤를은 암흑성도회의 누가 씨앗을 가졌는지 추측을 할 수는 있었다. 게임 플레이를 여러 번 하더라도 타겟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기회는 한 번뿐일 테니까.
“그러기 위해선, 그래. 골레릭에게 의뢰 하나를 하자.”
“의뢰, 말씀입니까?”
“나 대신 그림자 속에서 움직여줄 사람이 필요해. 무명 교단 사람이 아닌 자.”
샤를은 근처에 가기만 하더라도 탐지당할 위험성이 매우 높다. 이질적인 신성의 존재를 감지하는 유물이 놓여 있기 때문.
“시도해보겠습니다.”
“좋아. 나가봐.”
제롬은 고개를 꾸벅 숙이면서 밖으로 나갔다. 에세나가 고개를 돌려서 샤를을 바라보았다.
“저 사람, ‘뭔가’ 이상한데요.”
“뭐가?”
“머릿속이요. 뭔가 구부러져 있는데.”
에세나의 능력으로 그의 정신 세계를 잠깐 탐방한 듯했다. 샤를이 순순히 대답했다.
“그의 의지는 접혔다. 이제 나를 따를 거다.”
검은색 동전은 제 능력을 다했다. 지배의 권능으로 그를 지배한 뒤 몇 가지 원칙을 끼워 넣었다.
주인을 배신할 수 없고, 무명 교단에 해가 가는 것을 막는다. 또, 샤를의 명령대로 범죄나 사악한 일을 저지를 수 없다.
에세나는 기묘한 표정으로 샤를을 바라보았다.
샤를이 상대방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있어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 아니면 새로 생긴 것인가.
그러나 얼핏 보았던 그 세계. 그곳에서 신과도 같은 위용을 보였던 샤를을 떠올리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불경하게 느껴졌다.
무시무시한 경외심은 문득 들었던 에세나의 의문을 침묵시켰다.
“제롬이 정보를 더 캐내 올 동안, 우리는 일상생활을 보내면 된다. 에세나, 교단을 옮기는 건 아마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내년으로 생각해두는 게 좋겠어.”
“네. 그렇게 할게요.”
“모리.”
“네.”
샤를은 품에서 편지를 꺼냈다.
“네 주치의 웰로드가 이제는 제대로 일상생활을 해도 된다고 하더구나.”
“네에…….”
“그래서 말인데. 음악 학원에 다닐 생각 없니?”
“예!? 어, 으. 음악학원이요오?”
모리는 당황스러운 듯 눈을 깜박거렸다. 그가 가만히 있자 에세나가 모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찔렀다.
“뭐해?”
“아, 하, 할게요.”
“뭐, 별로 부담스러워할 건 없어. 내가 네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고 한 이후로부터 네 장래도 같이 결정하기로 한 거니까. 본인이 싫다면 안 해도 돼.”
“하, 할게요.”
“정말?”
“네에.”
본인이 이렇게 소심해서야 학원에서도 잘 지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샤를은 머리를 긁적였다. 서번트 증후군 특유의 자폐증 증세는 성배 조각품을 통해서 해결할 수 있었다만 그 뒤에도 성격이 소심한 건 누구 탓이지?
에세나는 찔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목소리를 큼큼, 하고 가다듬었다.
곧 모임이 파하고 샤를은 피곤함에 미간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최근 들어 기묘할 정도로 피곤하다. 아직 해결하지 못한 씨앗이 3개나 있다는 점.
계몽주의자가 너무도 쉽게 해결된 것은 의외였으나 행운이 찾아들면 불운도 찾아올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행운이라고 하니 생각난 건데. 내 부의 행운은 언제 오는 거지?’
샤를은 자신의 영성 한 켠에 자리를 딱 틀고 마치 터줏대감처럼 앉아 있는 행운의 응결체를 느꼈다.
특별한 정제방법으로 만든 이 응결체는 먹고 나면 보통 소화되는 게 일반적인데 소화의 속도가 보통 이상으로 느리다.
‘뭔가 계기가 필요한 건가.’
샤를이 느끼기론, 어떤 계기가 생기면 단번에 소화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