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77화 (77/221)

제77화 - 소중한 사람이 위험해졌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몇 가지로 나뉜다. 화를 내거나, 격려하거나, 도피하거나.

플로나에겐 선택지가 없었다. 그저 위험한 사람을 제거해야만 한다는 일관적인 생각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넌, 뭐야?”

“너도 한패야?”

“뭐?”

“그럼 대가를 치러야지?”

“뭐, 뭐야? 미쳤어?”

유스티나는 붉은 눈의 안광을 빛내면서 홀로 중얼중얼하는 모습을 보면서 여자가 미치광이이고 통제력을 잃은 영성자라고 생각하게 됐다.

당장 눈앞에서 원수와의 격전이 벌어질 텐데 끼어든 방해꾼에게 시간낭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적당히 하고 피하려는 생각뿐이었지만 무시무시한 속도로 짓쳐 드는 둔기 앞에서 그 생각의 연속이 끊겼다.

콰직.

모닝스타가 벽면에 나면서 박히는 섬뜩한 소리가 들렸다. 박힌 벽면에서 우후죽순으로 식물의 가시 줄기 같은 것들이 치솟아 올랐다.

가까스로 피해낸 유스티나는 눈앞에 나타난 여자에게 뾰족한 스틸레토를 집어 던졌지만, 그녀의 몸에서 팅하고 튕겨지는 소리만 났을 뿐이었다.

‘갑옷? 아닌데, 드레스잖아?’

실루엣을 보면 고풍스러운 고딕 드레스를 입고 있을 뿐이다. 천옷이 단단한 방어력을 가진 걸 보면 보통 물건은 아닐 것이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는 상대를 보고 나서 유스티나는 전투를 이어나가려던 마음을 접었다.

식물류 마법 사용자 하나만 해도 귀찮은데.

굉장한 방어력을 가진 장비를 가지고 있는 데다 신체 능력도 뛰어나 보인다. 적과 싸울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상황과 시기가 좋지 않다.

지금 유스티나는 원수를 눈앞에 두고 놓치고 있었고 눈앞에서 놓친 시간 동안만큼 점점 더 초조해져 갔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동안 왜인지 모르게 『등』이 근질거린다. 자꾸 등이 근질거려!

유스티나는 어느 순간 자신의 시야가 확 뒤바뀌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 뭐야? 방금 싸우던 그 여자는?”

어느새 그녀는 4층 전시실에 도착해 있었다. 주변은 고요하고 창문 너머로는 석양이 내려앉고 있었다.

순식간에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은 것 같다. 그것도 미래로.

한순간 기억의 단절을 느꼈으나 공포와 의심 대신 유스티나가 생각한 것은 한시라도 빨리 골레릭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골레릭에 대한 기묘한 집착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

-쭈인, 여기 난장판인데?

-그러게.

이곳이 기존에 박물관이었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로 박물관 내부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었다.

기묘하게도, 박물관 밖에서 봤던 풍경과는 전혀 달라서 일상 속의 언밸런스를 느끼게 했다.

샤를은 격전지를 추적하다가 곧 멈춰섰다. 그가 여태까지 추적해오던 물건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는 행운의 동전이라고 불렸으나 제롬의 비술로 인해 변질된 파멸의 동전이었다.

마도사 특유의 초월적인 인지력으로 샤를은 자신이 손에 넣은 적 있던 물건은 점술을 쳤을 때 특정하기 쉬워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걸 추적했었는데 늘 엇갈리곤 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버젓이 놓여 있었다.

-설마 이 동전?

-그래. 내가 예전부터 찾아다니던 거지.

샤를은 추적을 멈췄다.

골레릭을 쫓는 것보다 이 동전을 처리하는 게 더 중요했다.

이건 충분히 ‘충전’ 된 것 같다. ‘사이비 교주 시뮬레이터’의 고인물인 샤를이 이 행운의 동전을 파멸의 동전으로 변질시켜서 아무 데나 뿌린 제롬의 의도를 간파한 것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이 동전의 능력은 일종의 배터리 같은 것이었다. 차이점이라면 전기를 모으는 것이 아니라 행운을 모은다.

어느 정도 가득 찬 행운의 동전은 행운을 발산하게 되는데, 그때부터는 무시무시한 행운이 몰려온다.

‘인연운’을 얻고 ‘재물운’을 뱉었던 이 행운의 동전은 그 역의 방식이 성립한다.

처음에는 부작용 없이 엄청난 ‘부’가 몰려온다. 그다음에는 끝도 없는 지옥의 나락이 시작된다. 모든 인연의 파멸……. 인간관계의 단절이 일어난다.

이 파멸의 동전은 가혹하게도 동전의 껍데기에 행운을 모아두고 깊은 심층에 파멸을 깔아둔다.

함정에 깊게 파고든 먹이가 걸려들게끔 노리는 방식.

-재미있게도 내가 이런 걸 정화하는 방법을 알거든.

샤를은 틈틈이 모아두었던 ‘꿈 조각’을 꺼냈다. 계몽 수치를 떨어트리고 얻은 물건.

마치 가공되지 않은 마그네슘 덩어리처럼 딱딱하고 검은 빛을 띠고 있는 꿈 조각은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물건이었다.

동전을 쥐고 나서 심상 세계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이미 설치된 거대한 삼발 솥이 있었다. 솥 위에 제련기가 있다.

그 아래에 꿈 조각을 설치한 다음 광명자의 화로 주문을 사용해 그것을 연소시켰다. 연탄처럼 불이 붙더니 서서히 보라색 불꽃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솥에 파멸의 동전을 집어넣고 상당한 시간을 들여서 ‘연성’을 끝낸다.

모든 연성이 끝난 파멸의 동전은 거무튀튀한 색으로 변해 있었고 그 위 제련기에 기묘한 황금색 보석이 놓여 있었다.

정확히 나선을 그리며 무한하게 수렴하는 특이하게 생긴 보석. ‘행운’의 결집이 끝난 응결체였다.

‘이건 진짜 돈 주고도 못 사는 건데.’

수많은 이들의 재물운을 흡수한 행운 응결체는 소유하고 있기만 해도 재물을 끌어당길 터였다.

그러나 확실한 방법이 있다.

꿀꺽

샤를은 그대로 행운의 응결체를 집어삼켰다. 아무 맛도 안 난다. 신비로 만든 보석이라 영성을 사용할 때마다 뱃속에서 천천히 소화될 것이다.

소화되는 동안 샤를에게 부의 행운을 몰아주게 된다.

“한 건 끝냈고.”

보통 이런 간단한 연금술조차도 몇 시간을 소모하지만, 심상 세계 바깥과 내부의 시간 차이 때문에 샤를은 현실 세계에서 거의 동전을 쥐었다가 뗀 순간에 제련을 끝낼 수 있었다.

처음에는 숙련도 부족으로 써먹지 못했던 기술들이었는데 이 기술이 숙련되고 나중 가면 갈수록 샤를은 더 ‘기괴한’ 방법으로 적과 싸울 수 있을 터였다.

-쭈인, 지금 뭐한 거냐?

-동전 내부에서 행운만 추출한 거야.

-응?

-지금 제롬이 이쪽으로 오고 있거든.

자초지종을 파악한 파기나레코르가 깔깔거렸다.

-그러니까, 행운을 쏙 빼낸 다음, 남는 동전만 여기 남겨 두겠다는 거야?

-그렇지.

당연하게도 그냥 두면 의심하기 뻔할 테니, 샤를은 이런저런 연막을 펼치기로 했다.

보관함에 완전히 시커멓게 변한 파멸의 동전을 담아두고 그 주변에 마도사식 함정을 깔아뒀다.

쿵! 쿵!

심상 세계에 두 제자를 초대한 이후 언제 어디서든 샤를은 심상 세계를 경유한 정신적 메시지를 받을 수 있었다.

샤를은 조금 전 받은 메시지를 떠올렸다.

‘샤를님.’

‘왜?’

‘그 여자, 날개가 났어요.’

‘날개?’

‘파랗고, 특이한 문양이 있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 뒤로 날개에 대한 묘사는 없었지만, 샤를은 뭔가 좀 마음에 걸렸다. 그 여자. 날개.

“날개. 나비 날개!?”

샤를은 생각하다말고 미친 듯이 달렸다. 메인스토리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위치에 있는 캐릭터라서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MI7의 유스티나……. 그녀의 머리에 박힌 총알은 분명 ‘그 존재’의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이었다. 그 존재 하나만으로도 게임속 에피소드 분량 하나를 잡아먹는 그 괴물이.

‘어째서 그 여자가 지금 여기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도 샤를이 만든 나비효과일 것이었다. 샤를을 암살하기 위해 골레릭이 이 도시로 오게 된 것, 골레릭을 추적한 유스티나가 이 도시로 온 것까지.

*

유스티나는 석양을 가로지르며 주변을 수색하다가, 총성을 들었다. 탄환이 이마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이마에 아주 작은 생채기가 났다.

방향을 느낀 바, 단검을 들어서 그쪽을 향해 던지려고 하던 찰나에 우뚝하고 멈춰섰다. 그곳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새로 꺼낸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들고 손 사이에서 빙글빙글 돌리면서 생각을 했다.

‘은신? 아니야. 사람인 이상 숨을 쉬어야 하고, 내 감각을 속일 수는 없지. 그럼 총알은…….’

다시 총성이 들리자마자 다리를 휙 들어서 탄환을 피했다. 두 번째 힌트가 주어졌다. 완전히 다른 궤도에서 날아온 총알.

“빙글빙글 쏘기를 마스터 했구나?”

루미너스식 사격술에는 탄환의 속도를 가감하는 것, 그리고 탄환의 궤적마저 바꿔서 쏘는 방법도 있었다.

무차별적으로 ‘아무데서’나 날아오는 탄환을 아주 손쉽게 피해낸 유스티나는 궤적과 공기의 유동까지 감각적으로 파악해낼 수 있었다.

초인적인 감각을 통해 탄환이 발사되는 근원지를 찾아낸 유스티나는 어둠 속에서 커튼 뒤의 적을 찾아냈다.

탕!

가볍게 또다시 피해낸 유스티나는 씨익 웃으면서 마치 광대처럼 온갖 물건들 위를 사뿐 사뿐 균형을 잡으며 달려갔다.

“찾았다몽!”

장막을 들추고 칼을 들이민 유스티나의 싱글벙글한 표정은 곧 딱딱하게 굳었다.

총만 있고 그 옆으로 와이어가 길게 방아쇠에 걸려 있었다.

그 순간 기습적으로 일어선 골레릭의 섬광절이 뒤쪽에서의 기습을 가했다.

유스티나의 경추를 후려치려던 찰나에, 유스티나는 순식간에 팔을 들어올리고 섬광절을 겨드랑이 사이 아래로 착하고 잡아챘다.

“이야, 깜짝 놀랐다구.”

유스티나의 손에는 어느새 또 다른 단검이 들려 있었다. 날카로운 독침처럼 뾰족한 런들 대거가 그대로 골레릭의 배에 꽂혔다.

그러나 손맛이 없다.

“역시 그렇네. 분신이잖아 이거 그치?”

골레릭의 배에서는 피 대신 검은 연기가 흐르고 있었다.

“좀 생각을 해봤는데 이런 분신을 사용할 수 있는 영성자라면 분신을 꺼내두고 그 주변에서 조종하고 있는게 보통이란 말이야. 근데. 넌 아니야.”

유스티나는 단검을 치우고 골레릭의 목을 잡았다.

“거기 숨어있지 말고 나와.”

분신 속에서, 유스티나는 골레릭의 진짜 형체를 발견했다.

유스티나는 처음 연막 속에서 골레릭을 발견했을 때도 그녀를 의심했었다. 분신치고 너무 행동이 정교했고 심지어 뭔가 먹고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골레릭과 계속 싸우면서 하나 알아냈다. 골레릭 내부에 어떤 그림자로 이뤄진 ‘공간’이 따로 있고 대부분의 일상 생활은 그림자로 만들어진 분신이 움직이는 대신 안쪽 공간의 본체는 안전하게 있는 거다.

영성이 깃든 유스티나의 손에 끌려나온 골레릭은 암살자인 겉모습과 다르게 병약해 보이는 평범한 소녀처럼 보였다.

쓰러진 골레릭 아래로 유스티나가 내려다보았다.

“콜록. 콜록.”

“그림자 속에 숨어? 겁쟁이.”

너무 목을 졸렸는지 골레릭은 계속 기침을 해대다가 침을 흘리면서 유스티나를 올려다보았다.

“네 안에 뭐가 있는지 알기나 해?”

“니가 박아넣은 총알?”

“겁쟁이는 바로 너야! 진실을 알려고 하지도 않잖아! 언제나 가볍게 생각만 하지. 더 깊게 파고들려면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리고!”

“…….”

유스티나는 방금전 고딕 드레스를 입은 에메랄드 빛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를 떠올렸다.

분명히 전투중이었는데, 순식간에 기억이 날아가 버렸었지.

아 또 「등」이 간지럽다. 유스티나는 등을 긁었다. 골레릭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라? 이게 뭐야?”

뭔가 있다. 두껍진 않고 종이처럼 얊은데.

그리고 귓속으로 무언가가 속삭였다.

『스스로 깨우치지 못하는 자는 덧없음 속에 사라지리라. 하지만 스스로 깨어나는 자는 자신의 이성을 다스려 공포에 직면해야만 할 것이다.』

“누구야? 누가 나한테 말을 거는 거야?”

마침 공교롭게도 뒤쫓아온 플로나가 전시실 앞에서 서 있었다. 철퇴는 마치 누가 ‘잘라’버린 것처럼 반으로 쪼개져 있었다.

“너야?”

“…….”

그러나 그 여자의 눈동자도 묘하게 풀려 있었다. 아까 전 독기가 가득한 표정도 아니었다. 이 여자는 아니다.

그럼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여자의 뒤로 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났다. 꽤나 잘생긴 그 남자가 말했다.

“네 등에 뭐가 있는지는 알고 있나?”

“응?”

유스티나는 바닥에 박살난 유리 조각을 하나 잡았다.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귀까지 찢어질 듯한 웃음이 걸려 있었고 그 뒤로 파랗게 빛나는 나비 날개가 걸려 있었다.

“어라, 이거 뭐지.”

자신의 얼굴을 잡고 표정을 이리저리 만진다. 등에 날개가 나다니? 이건 또 뭘까? 그리고 주변의 풍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니, 변했다고 느꼈다. 평범한 전시실이 기괴하다고 느껴졌고 주변의 모든 구조물들, 그리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하나같이 괴물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스스로 깨어나거라.’

“뭘 깨우치라는 거야?”

“아직 안 늦었다. 아직 ‘이쪽’으로 되돌아올 기회가 있어.”

그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쪽이라는 것을 보고 유스티나는 곧 그 남자의 얼굴도 끔찍한 고블린처럼 생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지?”

‘깨어나라.’

그리고 곧 기억들이 조금씩,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