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화 - 메트로폴의 부잣집 저택들은 대게 직선형 구조였다. 거실이 보이고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곳에서 샤를은 프레드릭 웹스를 만났다.
그는 라쿤 가면을 만났을 때 입었던 전투복이 아니라 평범하게 셔츠와 바지를 걸치고 있었다.
“오랜만이군.”
“그래.”
“삼촌은 저쪽에 계실 거다.”
프레데릭은 무표정하게 스쳐 지나갔다. 리카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다.
“프레데릭을 아세요?”
“어쩌다보니.”
그때 그 저택에서 함께 싸웠단 사실을 리카는 모르는 듯했다. 조금 걸어서 안쪽에 있는 방에 들렀다.
“아버지가 계시는 서재에요.”
샤를은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리카는 그 방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유리로 된 벽면이 있는 서재가 보였다.
그곳엔 한 남자가 햇빛을 받으면서 의자에 앉아있었다. 탁자에 손을 걸치고 있었는데 강직한 인상인 금발 머리의 남자가 있었다. 나이를 알 수 없는 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허공을 보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샤를 헥센 교수. 나는 루크 웹스요. 리카의 아비지.”
“처음 뵙겠습니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다는 걸 알겠습니다. 그 산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리카를 보호해 주신 것. 감사하게 생각하오.”
루크 벌떡 일어서더니 크게 고개를 숙였다. 샤를은 가볍게 대답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앉으시지요.”
“여기까지는 아버지로서의 감사 인사였습니다.”
루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변호사 루크 웹스가 아니라 재단 전무이사로서의 루크 웹스가 얘기를 할 겁니다.”
프레데릭도 그러더니, 이 집안의 사람들은 공과 사가 확실하다는 듯 확실하게 선을 그어서 말한다.
“재단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위험한 유물들을 봉인 지정한 뒤 수집해서 봉인한다고 알고 있습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그럼 이야기가 빠르지요. 그 봉인이 밖으로 새나가지 않게 하면서 봉인을 연구해 재단의 이익에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까지 포함하는 게 저희의 일이죠. 좀 걸으시지요.”
서재 뒤편에 딸린 곳에 문이 있었다. 그 문을 열자 뒤쪽의 화원이 보였다. 유리로 된 온실이었는데 바깥보다 훨씬 따뜻했다.
샤를과 루크는 그 안쪽을 걸으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맨 처음 그 사건에 관해서 보고를 들었을 때, 제가 가장 먼저 했던 생각은 리카의 안전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일으킨 유물의 행방이었습니다.”
“…….”
“우리 쪽에서 회수하지 못한 이상 누군가는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조카 녀석이 뒤늦게 귀환하면서 많은 일이 밝혀지더군요. 물건은 가져오셨습니까?”
샤를은 말없이 품에서 만년필이 든 함을 꺼냈다. 검은색 함을 열어서 보여주자 루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 때문에 샤를은 저번 전투에서 만년필을 사용할 수 없었다.
“강제적으로 봉인되었습니다.”
“듣자고하니 당신이 거래를 제안했다고 들었습니다.”
“정확히는 프레데릭 웹스가 제안했고 제가 그 제안을 좀 바꿨죠.”
샤를은 괴테의 만년필을 재단에게 넘기고 그들의 협력을 얻을 생각이었다.
“대단하시군요. 보통 자신의 손에 굉장한 보물이 들어온다면 남에게 넘길 생각은 하지 않을 겁니다.”
“완전히 넘기는 건 아닙니다. 재단에 ‘봉인’해두고 필요한 경우 꺼내다 쓸 수 있는 조항을 넣고 싶군요.”
“후후후. 재미있군요. 그런 방식으로 저희에게 유물을 맡기신 분이 몇 분 되죠.”
샤를은 괴테의 만년필을 보관할 장소를 선택한 것이다. 은행처럼. 그 와중에 그들이 괴테의 만년필을 연구해도 별로 상관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걸 내놓지 않습니다. 탐욕스럽거든요. 그래서 먹고 먹고 먹다가 언젠가 유물의 부작용들이 연쇄반응을 일으키면서 터지는 경우도 봤습니다. 그땐 감당하기 어려운 사태로 변하죠.”
“그래서 집행부대가 있습니까?”
교단의 집행부대는 몇몇 특이한 가면을 쓰고 다닌다. 라쿤 팀도 그중 하나였고.
“조카 놈이 그런 걸 말할 리는 없을 텐데요. 흥미롭군요. 아버지께 들으셨습니까?”
“아버지요?”
샤를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샤를의 친부 요하네스 헥센이 재단과 연관이 있던 건가?
“의절하다시피 한 게 꽤 됩니다만.”
“모르고 계시는 군요. 실례했습니다.”
희미하게 웃는 루크를 보면서 샤를은 자신이 아직도 뭔가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요하네스 헥센과 재단이 무슨 관련이 있나?
“아까 말씀하신 질문이라면, 네 맞습니다. 봉인물을 쥐고 있는 몇몇 대상은 주시 대상 목록에 오르게 되죠. 너무 위험해지면 집행부대가 가서 처리하게 됩니다만, 사실 집행부대의 임무는 거의 외부로 나가지 않습니다. 왜인지 아시나요?”
“외부로 나가지 않는다면 내부에 사용하겠죠.”
“맞습니다.”
화원 중앙에 도착한 루크가 기묘하게 생긴 전화 박스 앞에 섰다. 전화 박스에는 최신형 다이얼 전화기가 놓여 있었는데 루크가 몇 번 번호를 돌리자 박스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군요.”
“재미있죠? 제 아이디어는 아니고 동생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아래로 들어서자 하얀색 공간이 나왔다. 벽면도 바닥도 오직 하얀색. 너무 하얘서 현실이 아닌 것 같은 감각도 들었다.
하얀색 공간에서 조금 더 걷자 특이한 장소가 나타났다. 유리로 이뤄진 네모난 컨테이너였다. 안에 들어서자 바깥이 보이는데 저 멀리 어둠이 보였다.
“보시죠.”
루크가 손가락을 까닥 움직이자 불빛이 들어오면서 내부가 보인다. 그곳에는 대량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봉인등급이 낮은 경우 이렇게 보관할 수 있겠지만…….”
“더 높은 등급의 봉인물은 더 깊은 지하에 있겠군요.”
“그렇지요. 겉치레가 없으면 높으신 분들은 실속이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분들에게는 딱이죠. 비밀스러운 보관소. 비밀스러운 물건들. 그들의 비밀스러운 욕망을 충족시켜주기엔 딱인 장소죠.”
저 봉인물들은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전시해둔 것일 뿐이라는 건가.
“흐음.”
“저희도 영리 재단인지라.”
“겉치레는 별로 흥미가 없습니다. 일 이야기나 좀 더 할까요?”
“그렇게 하지요. 저 안쪽에 응접실이 있을 겁니다.”
한 번 더 자리를 옮겨서 이제 진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루크 웹스는 이 시대의 평범한 남성들답게 담배를 즐겼다. 신대륙산 시가를 꺼내면서 샤를에게 묻는다.
“하나 피시겠습니까?”
“저는 됐습니다.”
“담배는 몸에 좋다고 합니다. 폐를 맑게 해주고 독한 기운을 뱉어낸다고요.”
의례 그렇듯이 루크가 하는 말은 이 시대의 흔한 잘못된 지식이었다. 별로 그걸 고쳐줄 생각이 없는 샤를이 물었다.
“제가 원하는 건 메트로의 이용권입니다. 재단은 20층부터 35층까지 소유하고 있었죠?”
“…….”
루크는 담배를 내려놨다. 감정을 알 수 없는 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쳐다본다. 그는 절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정보를 알아낸 샤를에 대해서 놀라고 있었다. 이건 집행부대보다 더 비밀 등급이 높다.
“그건 극비로 취급되고 있었습니다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죠.”
“정보원이라도 있는 걸까요?”
“…….”
미안하게도 샤를에게는 이전에 플레이했던 게임의 기억이 남아있었으므로 정보원 같은 건 없다.
“이거, 이거. 보통 분이 아니시군요. 헥센 가문의 사람이라서 그런 겁니까? 아니면 무명 교단의 교주라서 그런 겁니까?”
샤를은 빙긋 웃었다. 허를 찔렀으니 허를 찔러본다는 걸까? 하지만 이것도 이미 샤를은 알고 있다.
재단에는 정보를 중점으로 취급하는 유물이 있다. 샤를이 가진 괴테의 만년필처럼.
“…….”
“저희는 기본적으로 메트로폴 내부에서 벌어지는 영성자들 간의 분쟁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대신 재단의 봉인물을 건드리면 응징을 가하지만요.”
“저는 무명 교단의 교주로 온 게 아니라 샤를 헥센으로서 이곳에 온 겁니다. 괴테의 만년필을 재단에 ‘보관’하게 해두는 것으로 저는 꽤나 많은 걸 준다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건 재단의 등급 지정에 따르면 1급 봉인물입니다.”
“……1급 봉인물.”
루크는 한숨을 쉬었다. 만년필의 능력은 프레데릭 웹스가 구해온 정보로 인해 익히 들은 바가 있다. 운명까지 조작할 수 있는 유물이라. 그 정도라면 확실이 1급이라고 불릴만 했다.
“좋습니다. 메트로의 이용권리……”
“추가로, 집행부대의 힘을 빌리고 싶습니다.”
루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영성자 간의 싸움에는 분명히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을 터.”
“요인 경호입니다. 영성자가 없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경호? 일반인입니까?”
샤를이 고개를 끄덕이자 루크는 턱을 괴었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경호 서비스는 이미 고위 공직자들에게 시행되고 있긴 하지요. 알겠습니다.”
샤를은 자신을 대상으로 한 공격이 아니라 자신의 주변인들을 한 무차별적 공격에 대해서 방어기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재단의 집행부대가 필요했던 것이고.
괴테의 만년필을 ‘보관’하는 계약서에 싸인을 마친 샤를은 성공적으로 계약이 끝나자 루크와 악수를 끝마쳤다.
“아, 그리고.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를 아십니까?”
“예? 그게 누구죠?”
역시 전혀 모르고 있다. 그들의 관점에서 디노는 신경 쓸 만한 가치도 없는 젊은이겠지. 샤를은 디노에 관한 얘기를 설명했다. 그가 리처드 웹스와 얽힌 얘기도 설명하자 루크는 가볍게 웃었다.
“그런 가벼운 일 정도야. 쉽게 들어 드릴 수 있는 일이죠.”
루크는 샤를이 재단에 봉인물을 보관한 이후부터 상당히 친근해졌으므로 이런 사소한 부탁 정도는 충분히 들어줄 수 있었다.
이걸로 한 건 해결인가. 몇 가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지만 그런 건 나중에 알아봐도 된다. 샤를은 저택 쪽으로 나왔다. 정원 앞에 있는 벤치에 리카가 앉아서 햇볕을 쬐고 있었다.
“리카?”
“아, 교수님. 가시나요?”
“그래. 할 이야기는 전부 했구나.”
리카가 일어나서 뒷짐을 지면서 어깨를 내밀었다. 그리고 아까 차 안에서 하지 못한 얘기를 꺼냈다.
“그때 교수님이랑 헤어지고 나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
“그리고 아버지께 진실을 들었죠. 이 현실과는 다른 이면에 존재하는 비밀 세계라는 곳에 대해서요. 그리고 아버지는 교수님에 관해서도 설명해주셨어요.”
“그래?”
“무명 교단이라는 곳을 이끌고 있다고요.”
“그렇단다.”
“사이비 교단이 아니에요?”
“그랬었던 적이 있지만 지금은 아니야. 내가 바꿨으니까.”
샤를의 말에 리카가 물었다.
“무명 교단은 대체 왜 존재하는 거죠? 이 메트로폴에는 다른 교단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샤를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 세계는 곧 멸망한다.”
“멸망…….”
“우리는 세상의 멸망을 막을 거야.”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의 다른 내면을 직면한 리카의 마음이 흔들렸다. 교수는 정말로 그런 걸 믿고 있는 걸까?
샤를은 손가락을 튕겼다. 손가락 끝에서 하얀 나비 한 마리가 마술처럼 나타났다.
그리고 그 나비는 리카에게 환상을 보여줬다. 이건 샤를이 몇 번이고 겪었던 이 세계의 마지막이었다.
하늘이 붉게 변하고 구름이 피눈물을 흘리는 광경이 보인다. 그다음에는 영원한 밤이 되어 사람들은 밤의 권속으로 살아가거나, 끝없이 불타오르는 대지에 녹아내린다.
“바, 방금 그건.”“멸망의 가능성 몇 가지다. 내가 직접 봤지.”
고개를 살짝 돌리니 프레데릭 웹스가 멀리서 샤를을 주시하고 있었다. 저택의 정원에 있는 방어 체계가 꿈틀거리지만, 아직 작동하지 않는다. 경계만 하고 있다는 얘기겠지.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내 저택으로 와라. 나와 함께 하자.”
“…….”
샤를은 가볍게 모자를 벗어서 인사를 하고는 프레데릭을 잠깐 바라본 뒤에 자리를 떠났다. 꿈틀거리던 정원의 균열이 곧 사라졌다.
*
“눈이 오는군.”
샤를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의 끝자락에 서 있다. 밖에서 눈을 쓸고 있는 사용인들이 보였다.
그들 옆으로 누군가 지나쳐왔다. 아미티지 교수였다. 그는 샤를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자 아미티지 교수가 다가왔다. 아미티지 교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몰라도 한쪽 발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어디 다치셨습니까?”
“요 앞에서 마차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바람에 피하느라 말일세.”
“부딪히지 않은 건 다행이군요.”
사고? 샤를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말했다.
“커피라도 드릴까요.”
“아니, 그건 됐고. 이것부터 보게.”
아미티지 교수는 자신의 품에서 동전을 하나 꺼냈다. 특이하게 생긴 고대 동전으로 보였다.
“이걸 왜?”
“이것의 이름은 행운의 동전이라네.”
“행운의 동전이요?”
그건 아마 카터 존스가 가지고 있던 동전일 것이었다. 아미티지가 사서 보관하고 있었을 터다. 근데 그걸 왜 샤를에게 보여주는 거지?
“난 이걸 감당할 수 없네. 자네가 혹시라도 이 동전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해서 가져왔다네. 크윽.”
카터 존스의 영입 이벤트는 공략사이트에 널리 알려져서 동전의 정체도 알고 있었다. 분명히 인연운을 늘려주는 대신 끔찍할 정도로 재물운을 빼앗아 가는 동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했다.
“버리거나 다른 사람한테 주면 되잖아요?”
“이건 그렇게 단순한 동전이 아니라네. 내 봉인이 소용이 없었어.”
아미티지도 이 동전의 위험함을 알고 자기 나름대로 봉인을 걸었지만, 소용없었다고 한다.
“크, 크흑. 내 피 같은 주식이.”
“…….”
봉인 실패의 대가로 주식을 빼앗긴 것인가. 저런.
“왜 실패했는지 조사를 했다네. 이 동전은 알 수 없는 기운을 머금고 있어. 누가 이 동전에 수작질했는지 몰라도 이 동전의 기운을 완전히 바꿔버렸어. 그래서 내 봉인이 먹히지 않았지.”
이건 아미티지가 심도 있게 조사한 결과 내린 결론이었다. 누군가 동전을 변이시켰다.
“이 동전은 변이되었어. 행운의 동전이 아니라 파멸의 동전이 되었어!”
“유물의 변이?”
일반적인 유물은 한 가지의 기능과 한 가지의 부작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보통은 형태가 변하거나 능력이 변하지도 않는다.
샤를은 유물을 변이하는 것이 가능한 목록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먼저 신의 권능이 있다. 사악한 신의 권능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신은 물리 세계에 직접 개입할 수 없으니 패스.
그다음에는 유물 연구의 달인이 되었으며 고위급 영성을 지닌 탐구자. 그런 존재는 많지 않으므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리고 하나 더 있다.
암흑성도회의 비술, ‘암회천(暗回天)’. 암격사의 힘을 빌려서 유물의 힘을 변형시키는 종류의 제사 의식이었다.
‘누가 썼는지 알만하군.’
이번 사건에 방해받은 제롬이 앙심을 품고 동전을 메트로폴에 뿌렸을 것 같다.
“제가 보관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