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7화 - 머리에 알 수 없는 재질로 만들어진 왕관을 쓴 존재, 구울왕이었다. 불완전한 부활이어서 그런지 덩치는 왜소하고 다른 구울과 비슷한 크기였다. 그래도 사람보단 월등히 컸다.
「제프리는 구울왕의 형태를 갖췄다. 원래는 안전한 의식을 통해서 구울왕이 되고자 했지만 이런 원시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은 그만큼 긴박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방법에는 부작용이 있었다.」
어쩐지 제프리에게 특정할만한 마도구가 없었던 것이 생각났다. 놈의 본체는 이미 구울왕이었다. 구울왕의 목소리는 마치 컴퓨터로 음성 변환한 것처럼 기괴한 목소리였다.
짐승과 인간의 목소리를 합쳐뒀다면 이렇게 느껴질까. 목소리를 낼 때마다 호랑이 같은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 같았다.
“쿠워어어어어!”
「이성을 잃는다는 점이다. 그 뒤 샤를이 불꽃의 창을 꺼내 들었다. 구울왕은 분노가 가득했지만, 섣불리 덤벼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저 창은 매우 위협적이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강했다는 것을 알았다.」
만년필의 문구 때문에 자신의 주문이 안 먹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대로 일격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솔로 킹이 사용하던 방법과는 다르지만, 단순히 정보가 모인다는 것만으로도 샤를에게는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강력한 유물은 보통 부작용이 있었다.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 영 걱정되는데.’
하지만 그 염려와는 별개로 전투에 대한 집중력은 최고조였다. 게임 속에서 이전에 구울왕을 마주친 적이 있었던 샤를은 놈의 약점에 대해 미리 알고 있었다.
구울왕의 약점은 하나다. 핀포인트로 놈의 미간을 노리면 왕관이 부서지게 되고 놈의 모든 힘이 집약된 왕관이 사라지면 그 즉시 즉사한다.
“머리를 노려!”
샤를의 조언에 프레데릭의 자동소총에서 무자비한 사격이 가해졌지만, 경화된 구울왕의 양손이 얼굴을 가리면서 전면부를 보호했다.
티티티티팅.
탄환은 장난감 총알처럼 여기저기 튕겨 나갔다. 실제로 구울왕에게 끼친 피해도 장난감 총알 정도의 수준인 듯, 놈은 가드를 올린 채로 달려왔다.
프레데릭이 재차 연사를 가했지만, 여전히 소용없다. 샤를의 앞에 있었던 그가 표적이 되는 것은 순서상 당연한 일이었다. 무자비한 격투가 시작되고 압도적인 힘에 밀쳐진다.
그는 군용 대검을 꺼내서 구울왕과 육박전을 벌였다. 그러나 출력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평범한 인간 수준이던 프레데릭의 배가 갈라지고 그 사이로 무자비한 구울왕의 주먹이 틀어박힌다.
끔찍한 고통에 휩싸였지만, 프레데릭은 여전히 대검으로 놈의 머리를 노렸다. 하지만 체격의 차이 때문에 깔아뭉개진 이후로는 대검이 닿지 않는다.
인간에게 사용해야 할 근접 병기를 괴물에게 사용한 대가는 컸다. 프레데릭은 짓이겨진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얻어맞았다. 뼈고 살점이고 압도적인 힘 앞에 무너진다.
그때 허공에서 샤를의 커틀러스가 날아와 구울왕의 머리를 노렸다. 구울왕은 공격을 하면서도 샤를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기 때문에 그 칼을 손등으로 쳐낼 수 있었다.
그러나 커틀러스는 재차 날아서 구울왕을 노린다. 정신이 팔린 사이 프레데릭은 구울왕의 밑에서 빠져 나왔다.
신체는 너덜너덜했어도 투지는 죽지 않았다. 그는 수류탄을 꺼내서 손에 쥐었다.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커틀러스에 정신이 팔린 구울왕의 머리통에 수류탄을 집어 던졌다.
파편이 터지면서 무시무시한 폭발이 일어난다. 여전히 구울왕은 멀쩡했다.
하지만 그만큼의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샤를은 온전히 프레데릭에게 집중할 수 있었다. 쏜다. 첫 번째 창이 놈의 귀를 꿰뚫었다.
실패했다. 이마 정 중앙의 왕관을 노려야만 했다. 놈은 계속해서 움직이면서 피해낸다.
“놈을 없애려면 왕관을 파괴해야만 해.”
“나한테 하라는 건 아니겠지?”
전신이 피투성이인 프레데릭이 샤를을 돌아봤다. 가면 속에 가려져 있지만, 눈동자에 깃든 짜증을 볼 수 있었다.
“너, 저 녀석에 쓸 봉인물 같은 건 없단 말이야?”
「프레데릭은 샤를의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최후의 순간에 봉인물을 꺼내겠지만 그때가 되기 전까지는 사용하지 않는다.」
샤를은 피식 웃으면서 품에서 실을 꺼냈다. 길게 딸려 나온 실은 샤를의 손에서 몇 번 감기더니 곧 묵직해졌다.
“이건 아라크네의 실이다.”
“아라크네……?”
「아라크네의 실에 영성을 부여하면 무엇보다 질긴 물건이 된다. 실을 만져보니 프레데릭은 샤를이 이미 영성을 부여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 신비학적 지식 미리 알고 있었던 프레데릭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의 라쿤 가면 지속 시간은 아직 3분가량 남아 있었다.」
“3분이다.”
프레데릭이 돌격했다. 그는 자신의 자동소총에 실을 묶은 다음 놈의 가랑이 사이로 집어 던졌다. 그리고 시선이 잠깐 아래쪽으로 내려간 구울왕의 머리 위로 뛰어올랐다.
가만히 서서 수 미터는 뛰어오른 다음 공중제비를 돌면서 구울왕의 몸을 이리저리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군용 대검을 쑤셔 박는다. 구울왕의 검은 피가 이리저리 튀어서 프레데릭의 선혈로 물든 신체에 끼얹어진다.
카오오오오오!
「구울왕은 격노했다. 머리 위에서 왱왱거리며 날아다니는 커틀러스는 너무 빨라서 잡아챌 수도 없었으며 시선 아래에서 자꾸 이쑤시개 같은 날붙이로 그를 찌르는 남자도 그를 거슬리게 했다. 몸을 부풀려서 전신의 촉수를 개방해 아예 상대를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됐어! 물러나!”
샤를의 말에 프레데릭은 이리저리 반문하지 않고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물렸다. 그의 전신에서 촉수가 가시처럼 솟아났는데 그 끝에는 사람의 이빨 같은 것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신체 전반에서 쏟아지는 촉수들은 때로는 아라크네의 실에 가로막혀서 기괴한 형태로 튀어나왔는데 이는 실이 정확히 역할을 다해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놈의 행동이 굼떠지자 마침내 샤를은 다음 불꽃의 창을 꺼내 들었다. 거대한 불의 창이 떠오르자 구울왕이 샤를을 직시하면서 분노했지만, 그의 신체는 이미 몇 번이고 실에 둘려 묶인 상태였다.
샤를은 그대로 놈의 이마 정중앙에 있는 왕관을 맞췄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명중했고 구울왕의 검은색 왕관에 불길과 폭음이 동반되는 폭발이 일었다.
머리가 그대로 타버리기 시작한 구울왕은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머리부터 시작한 불길이 아래로 내려오면서 그 몸뚱이를 완전히 불길로 정화했다.
-드디어 죽었어!
-그래. 다행이군.
고비 하나를 넘었다. 이번 공격에서 처리하지 못했으면 성배 조각품에 있는 영성을 끌어다 썼어야 할 판이었으니 상당히 집중해서 쏘아낸 상태였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 앞에 있는 프레데릭도 다시 적이 될 수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면을 벗었다. 푸른색 눈동자에 짙은 블루블랙의 머리카락. 젊어 보이지만 어째서인지 나이가 많을 것 같다. 그의 전신에 난 상처는 어느새 더는 보이지 않았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난 프레데릭 웹스다. 재단 소속 경호 부대 라쿤 팀 리더지.”
“샤를 헥센. 미스트위버의 교수지.”
같은 적을 상대로 싸운 사이지만 둘의 관계는 그다지 좋아지진 않았다. 프레데릭은 품에서 궐련을 꺼내서 입에 물고는 성냥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이 가면을 벗은 이상 나는 더이상 경호팀의 리더가 아니지.”
“그럼?”
“재단의 상무 프레데릭 웹스라고 할까.”
“그래?”
“그래서 일 관련 얘기를 할까 하는데.”
*
부작용이 온 것은 그의 저택에 도착했을 때였다. 샤를은 심장이 쿵쾅대는 감각을 느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사용인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창백해진 안색으로 그는 자신의 서재로 들어가서 문을 잠갔다.
그대로 문에 등을 기대고 스르륵 무너져 내렸다. 실시간으로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아니, 그건 단순한 영상이 아니었다. 직접 체험하고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이었다.
「제프리는 늑대 머리 제단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강한 분노에 가득 차서, 어느새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고 말았다. 그래서 구울에게 제단을 복구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되었다.」
「의식이 완전히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먼저 무력화된 인질부터 죽였다. 로렌, 메리의 목이 꺾인다. 이윽고 마지막 남은 리카의 목을 붙잡아서 꺾어 버린다. 잠시 동안 ‘어딘가’에 정신이 팔렸던 샤를은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쯤에는 그 외에는 누구도 남지 않았다.」
「라쿤 팀은 봉인물 ‘에스트라의 숨결’을 이용해 장벽 너머로 점프했다. 리더가 그 대가인 다섯 번의 심호흡을 치르는 동안 자신들의 보호대상이 죽었다고 판단했다. 그 순간부터 그들은 구해야 할 사람이 완전히 없어진 셈이었다. 이 경우 경호팀은 첫 번째 프로토콜대로 보이는 모든 것을 말살한다.」
「무시무시한 총격 속에서 샤를은 스스로 가지고 있던 진짜 힘을 드러냈다. 그의 손이 뻗는 어떤 곳이건 불길의 창에 꿰뚫려 폭파되고 불타올랐다. 그건 라쿤 팀도 예외가 아니었다. 불타오르는 그 지하에서 제프리는 약식으로 구울왕이 되어 보이는 모든 자를 죽였다.」
「삼파전이 끝나고 살아남은 자는 샤를 헥센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무너져내리는 건물을 바라보면서 자신이 너무 오랫동안 유독한 공기를 내뿜는 지하에 오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정신을 잃었다. 혼수상태가 된 그의 위로 천장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끝내 누구도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다. 아름답고 정취 있게 느껴지는 고즈넉한 산장은 수십 년에 걸친 내면의 지옥을 연소하면서 그대로 시간의 질곡에 파묻혔다. 이 또한 시간이 지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잊히고 말 것이다.」
“쿨럭.”
샤를은 깊게 기침을 했다. 마지막에 느꼈던 그 연기가 직접 폐부로 들어오는 것 같은 착각이 그를 덮쳤다.
그 광경……. 샤를이 잠깐 보고 느낀 것은 진짜 현실이었다. 그 세계에서 샤를은 난입한 라쿤 팀원들과 구울왕이 된 제프리에게 휘말려 산장 바깥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평행 세계 체감인가.’
마치 직접 경험한 듯한 감각이 샤를을 덮쳤다. 이것은 만년필이 가진 부작용이었다. 죽음을 체험하는 것은 그리 유쾌한 경험이 아니었다. 그 세계가 한 번 반복되었던 세계라는 것을 깨달은 직후 샤를은 부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인 괜찮아?
-그래. 일단 이 녀석부터 제어해야겠어.
샤를은 손을 뻗어서 지배의 권능을 발동했다. 만년필은 마치 저항하듯 부르르 떨렸으나 긴 시간 끝에 샤를의 권능에 굴복한다.
[괴테의 만년필]
[분류 : 유물]
[개요 : 100년 전의 전설적인 극작가 괴테가 남긴 만년필. 그의 위대한 시상과 염원이 담겨 있다. 항상 그는 이 펜을 사용해서 자신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그 작품은 역사에 길이 남을 명극(名劇)이 되었다.]
[능력 :
-세계관 수집 : 사용자의 몸에 지니고 있으며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부터 주변의 정보를 수집한다. 겉으로 보이는 모든 정보를 수집해서 내면을 추측한다. 숨겨진 정보가 있다면 그것을 되도록 드러내도록 운명을 조작해 유도한다. 그 뒤, 구성된 정보를 통해서 이야기를 파악할 수 있다.
-작품 제작 : 부작용을 미리 체험한 뒤에 상대방에게 들려주면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어 현실 세계의 운명을 조작한다. 이때, 서막과 종막은 반드시 작품을 제작한 자의 의도로 향하게 된다.
-이야기 현실화 : 괴테의 만년필 앞에서 누군가 정확하고 구체적인 서사를 말할 때 그것이 현실로 이뤄지게 될 확률이 생긴다.
부작용 :
@착용자의 사고방식이 예술가의 사고방식으로 변한다. 스스로 입을 열어서 계속해서 자신의 내면 속에 깃든 위대한 시상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어진다.
@세계관 수집만을 사용했을 경우 사건이 끝난 이후 특정 시간대가 되면 기존에 있었던 사건을 재구성한 평행 세계로 빠진다. 이 평행 세계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 ‘최악의 운명’이 된다. 평행 세계의 전개가 끝났을 때, 그 세계가 평행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면 현실로 되돌아오지 못한다.
@작품 제작을 사용한 뒤 결말에 이르렀을 때 그 결말이 어떠한 이유로든 방해받아 제작자가 원하는 결말이 나지 않았다면 다음의 부작용이 발동한다.
□제작자는 죽는다. 운이 좋게 피해가려고 해도 어떤 식으로든 죽음의 운명극(運命劇)이 그에게 펼쳐진다.
□제작자는 이 만년필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넘겨준다. 넘겨줄 사람이 없다면 운명을 조작해 넘겨받을 사람을 선택한다.]
샤를은 속으로 욕을 했다. 이 만년필, 무시무시할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었다. 단순히 세계관 수집을 했을 뿐인데도 샤를은 최악의 상황에 머물러야만 했다.
현실의 그에게는 손가락 하나 상처가 없지만, 그가 받은 정신적 외상은 상당한 것이었다.
만약 앞으로 샤를의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괴테의 만년필이 보여준 그 미래를 경험하게 되겠지. 역시 이건 위험한 물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