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 제인은 리카와 함께 라쿤 팀원들을 따라 움직였다. 리카는 두고 온 사람들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이기도 했으며 생전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자신을 경호하러 왔다고 하던 점에 대해서도 불신하고 있었다.
추가로 그녀가 존경하면서 호감도 가지고 있었던 교수가 사실은 보통 사람이 아니며 그녀의 아버지가 저 사람들을 고용했을 거라고 지적했던 것…….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그 항목들 전부 다 하나도 이해할 수 없는 것뿐이었다. 이번 모임은 그냥 평범하게 모이는 게 아니었던 걸까?
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이며 괴물들은 왜 나타났는지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아가씨.”
“제인. 대답해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래도 눈앞에 있는 여성만큼은 믿을 수 있으므로 순순히 따라온 것이었다. 어릴 적부터 제인은 리카를 위해 뭐든지 해왔다. 그래, 뭐든지…….
“아가씨가 저택에 들어간 뒤에 잠시 뒤 갑작스럽게 저택이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스스로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서 저 사람들을 부른 겁니다. 실제로도 그렇고요.”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전부 데려가도 되잖아. 왜 교수님을 비롯해서 다른 작가 분들도 거기 남아있어야해?”
“아가씨. 저는 솔직히 말하면 아가씨 말고 다른 것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 말을 하는 제인 오스틴은 꽤나 차가웠다. 리카는 제인이 배타적인 성향을 지녔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그리고 경호팀은 오직 주요 인물의 경호를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니 제게는 오직 아가씨 뿐입니다.”
단호한 한마디에 리카가 화를 내려고 하자 갑자기 엄청난 경적소리가 들렸다. 경적? 그건 마치 증기 기관차에서나 들릴법한 소리였다.
라쿤 팀원들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서로 얘기를 주고 받더니 손목에 달린 시계를 바라보면서 재고 있었다. 들어보니, 카운트 다운. 정차시간 1분 22초 어쩌고 하는 것 같다.
“제인, 저 사람들 뭘 하는 거야?”
“저도 듣기만 했습니다만, 아마 메트로를 사용하는 걸 겁니다.”
“메트로?”
“예. 아가씨가 사는 메트로폴의 지하에는 거대한 유적지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걸 메트로라고 부르죠.”
“지하철(subway)?”
“메트로(metro)는 지하철과는 좀 다릅니다. 아무튼 곧 오는군요.”
그때 순식간에 허공이 일그러지는 듯하더니 공간에 균열이 생겼다. 라쿤 팀원 중 하나가 제인과 리카의 앞에 손을 뻗어서 살짝 뒤로 물러나게 했다.
엄청난 증기 소음이 발생하면서 눈앞으로 거대한 열차가 나타났다.
“어, 어떻게?”
이곳은 철로도 없는 외딴 숲속이었다. 그런데 대체 저 거대한 열차가 어떻게 나타난 것인지 리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모든 물리 법칙들이 오늘 하루 안에 부서지는 듯한 경험이었다.
라쿤 팀원은 리카와 제인을 호송하면서 메트로에 올랐다. 그러면서 서로 자기들끼리 얘기를 주고 받았다.
“리더는?”
“남기로 했어. 아마 그놈을 마저 처리하고 온다고 하더군.”
라쿤 팀원들은 한숨을 내쉬면서 메트로에 올랐다. 그들이 오르자마자 순식간에 그 증기 기관차가 움직이면서 공간을 꿰뚫고 균열 너머로 사라졌다.
*
리더가 팀원들을 귀환 편의 메트로에 보내고 나서 홀로 남은 건 전략적인 판단이었다. 아직 위협은 남아 있었고 팀원들의 현재 화력으로는 저 괴물을 처리할 수 없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서 고화력의 장비를 들고 왔건만 상대는 더한 괴물이었다. 리더는 품에서 소총을 꺼내면서 손목시계를 살폈다. 아직 10분 정도는 여유가 있다.
추가 봉인물을 꺼내지 않고도 충분히 놈을 처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옆에 있는 영성자와 협력한다면 말이지.
“내게는 5kg의 다이너마이트, 군용 대검, 자동 소총 한 자루, 권총 하나, 수류탄 2개가 있다.”
“경무장이네.”
“글쎄. 당신, 아까와 같은 주문을 몇 번이나 더 사용할 수 있지.”
“앞으로 세 번 정도. 다이너마이트는 내게 넘겨.”
샤를은 일부러 자신의 최대 능력치를 깎아서 불렀다.
사실 심상 세계를 중계지역으로 택해 성배 조각품과 영성을 연동시켜둬서 지금 그간 모아온 영성을 항상 공급받을 수 있는 상태였다.
계산한 바에 따르면 무존자의 창을 족히 스무 발은 더 사용할 수 있다.
“여기 있다.”
리더가 샤를에게 다이너마이트 7발 뭉치를 넘겼다. 손에 들자 살짝 중량이 느껴진다. 성냥은 샤를이 들고 있었으므로 따로 필요는 없다.
자연스럽게 리더가 앞에 서고 샤를이 뒤에 섰다.
그때 샤를의 상의에 꽂아뒀던 만년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샤를은 눈을 깜빡거렸다. 유물을 사용하지도 않았건만 갑작스럽게 발동된다.
그의 눈앞에 마치 수많은 갈래 같은 것들이 드러났다. 그건 문장의 파편들이었다. 샤를이 아는, 혹은 모르는 수만 가지의 문장들이 몰려온다.
몰아치는 파도를 헤치며 뱃고동을 울리는 선박이 몰려오듯이 수많은 글자가 파랑의 골자를 타고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와 그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몇 안 되는 것들뿐이었다.
「제프리는 깊은 화상을 입었지만, 아직 재기의 가능성을 꿰뚫고 있었다. 아직 그에게는 지하에 남겨둔 구울이 더 있었다. 웅크리고 불길이 가시길 기다렸다.」
「라쿤 팀의 리더 프레데릭 웹스는 자신의 사촌 동생을 도와준 것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이 남자에 대한 경각심이 들었다.」
「샤를 헥센은 알 수 없는 유물과 연동이 되어있어 그곳에서 계속해서 영성을 공급받고 있다. 라쿤 팀의 리더를 경계하고 있어서 일부러 자신의 능력을 낮췄다. 그에게는 숨겨진 능력 몇 가지가 더 있지만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로렌은 동료들을 마차에 태운 뒤에 마부 좌석에 앉았다. 그녀는 말을 타본 적이 있지만, 이렇게 마부석에서 몰게 된 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그곳에 남게된 샤를 헥센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리카 웹스는 거대한 메트로의 일면, 그중에서도 메트로 23-33 순행열차를 보고 경도되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혼자 이렇게 납치되듯 도망친다는 점에서 매우 큰 실망과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뭐야, 이건 대체…….’
그리고 샤를의 내면에서 엄청난 기세로 그를 이끌려고 하는 어떤 충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입을 열어서 말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충동이 맴돌았다.
솔로 킹이 수다쟁이였던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이 유물의 힘으로 계속해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강인한 의지력으로 그걸 짓누른 샤를은 그 즉시 ‘지배의 권능’을 사용할까 하다가 멈췄다. 리더에게 자신이 지배의 권능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밝혀도 될까? 당연히 아니었다.
재단은 매우 위험하고 그들에게 샤를의 정보가 조금이라도 더 드러나는 것은 원치 않는다. 대신 이 혼란 속에서 스스로를 다스리기 위해 심상 세계로 들어갔다.
샤를은 전투 도중에 심상 세계로 빠져나오는 것을 지양해오고 있었다. 이유는 몇 가지 있었다. 전투 도중에 심상 세계로 들어가면 샤를의 시간 감각과 현실에서의 시간 감각이 어그러진다.
바짝 긴장하고 있는 상태여도, 심상 세계에서 시간을 잔뜩 보낸 뒤에 현실로 돌아갔을 때 괴리감을 느끼게 된다. 빠른 판단이 요구되는 긴급한 상황에서는 심상 세계로 들어갈 시간조차 없기도 했고.
하지만 이곳에 도착해서 생각을 정리해야만 한다.
‘지배의 권능을 사용해서 유물을 분석할 수는 없어.’
만년필은 명백히 샤를의 통제를 벗어나서 스스로 행동하고 있다. 라쿤 팀의 리더 때문에 지배의 권능은 배제해야만 한다.
지배의 권능을 쓰지 않으면 상태창이 떠오르지 않는다. 상태창에는 만년필을 완전히 분석된 데이터가 적혀 있을 것이다. 그걸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순수한 의지로 그것을 다뤄야 한다. 해낼 수 있을까?
‘충분히 할 수 있어.’
정보를 선별하고 스스로의 의지로 입을 다문다. 방금 샤를은 만년필의 능력의 일각을 보았을 뿐이다. 심호흡을 한 다음 몇 가지 체크할 점을 상기했다.
그리고나서 심상 세계에서 고이 보관해뒀던 커틀러스를 들었다. 이 커틀러스는 그 어부형제단의 영성자에게서 빼앗은 것으로 원래는 샤를의 비밀 서재에 잠들어 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 있을까 싶어서 이 안에 넣어뒀다.
검 같은 무기는 도시에서 꺼냈다간 오히려 경계를 살 테니까. 그리고 커틀러스의 옆에 있던 리볼버를 들어서 손에 쥐었다.
메리에게 줬던 리볼버 이외에도 충분히 무기는 비축해두고 있었다. 솔로 킹을 만나러 가기 전부터 미리 준비해뒀던 물건들이었다.
탄환 뭉치도 품에 넣고, 그 즉시 심상 세계에서 빠져 나왔다. 새로운 문장이 떠올랐다.
「샤를 헥센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해적들이 썼을 법한 커틀러스와 함께 리볼버가 뽑혀 나온다.」
‘알 수 없는 공간……. 역시 만년필의 정보 수집 능력에 내 심상 공간은 포함되지 않아.’
심상 세계는 그야말로 만능의 방호력을 갖고 있었다.
“이봐, 그 검은…….”
샤를은 리더를 바라보면서 어깨를 으쓱했다. 리더에게서는 문장이 떠오를 것같이 보였는데 나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어떻게 해야 그 문장을 떠오르게 할 수 있는지 알았다.
“내 비장의 무기 중 하나라고 하지.”
「프레데릭 웹스는 이 영성자의 정체에 대해서 의구심이 생겼다. 물건을 허공에 만들었던 걸까? 아니면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검을 가지고 있는 걸까. 어느 쪽이건 보통의 영성자는 아닐 것이다. 전투가 끝나면 처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샤를이 말을 하면 상대의 반응이 나타난다. 그러면 새로운 정보가 추가되는 형식이었다. 솔로가 말이 많았던 것이 역시 이해가 간다.
「불길이 가시자 제프리는 몸을 일으켜서 입을 벌려 자신의 부하를 불렀다.」
샤를이 갑작스레 떠오른 문장을 보고 눈을 돌리자 리더도 똑같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있는 제프리였던 것은 이제 살점 덩어리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것이 비명을 지르자 저택 어딘가에서 구울들이 떼로 몰려오기 시작했다.
샤를은 끔찍할 정도로 몰려오는 정보의 바다에 허우적거렸다.
「발목 전쟁에서 죽은 토미 디터는 자신들의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렸다.」
「구울에게 먹이로 던져 넣어졌다가 결국 살아남았지만 끝내는 구울이 되었던 존 케일의 자아는 자신들의 주인이 부르는 소리에 목숨을 도외시하고 달렸다.」
「구울이 된 지 10년 정도 지난 도이데는 주인이 부르는 소리……」
인상을 찡그리고 정신을 집중했다. 구울의 숫자만큼이나 떠오르는 어마어마한 정보량.
두두두두두.
그때 리더의 자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달려오는 구울들이 벌집이 되었지만 어떻게든 아득바득 기어서 달려왔다. 단단히 대비하려는 찰나에 목적지가 이상했다. 샤를 일행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제프리 쪽으로 향했던 것.
“뭐지?”
「샤를은 의문에 가득 찼다. 구울들이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벼들 줄 알았지만 제프리에게 향했던 것.」
「제프리는 처음부터 구울들로 적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 구울들을 흡수해서 자신의 진짜 힘을 되찾을 생각이었다.」
몰려온 구울들은 살점 덩어리에 합쳐져서 점점 비대해지기 시작했다. 샤를은 이대로 내버려 둬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는 그 즉시 다이너마이트에 불을 붙여서 구울 떼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무존자의 창을 준비해서 살점 덩어리에게 집어던졌다.
콰아앙.
여러 군데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먼지가 일면서 시야가 가린다. 연막처럼 피어오른 먼지구름 사이로도 리더는 정확하게 적을 조준해서 단발로 사격했다.
살점 덩어리는 겉이 시커멓게 탔지만,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리더의 화망은 그리 촘촘하지 못해서 여기저기 뚫린 구멍으로 구울들이 달려와 살점 덩어리에 섞였다.
더는 새 구울이 보이지 않을 때쯤, 제프리의 살점 덩어리가 부풀어 오르더니 터져버리면서 그 안에서 새로운 구울을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