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화 - 볼일을 보고 좀 얘기를 나누다가 헤어진 뒤 샤를은 자신의 방에 돌아왔다. 그리고 옆에 불타오르는 촛대를 바라보았다. 가스등을 사용하지 않는 고전식 조명이었다.
방에 딸린 샤워실에서 씻은 다음에 깔끔해진 상태로 방으로 돌아와서 머리카락을 닦았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점술이 먹히지 않는 이상 샤를은 준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마도사는 원래 준비하는 자. 샤를은 그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서 가져온 짐을 꺼낼 생각을 했다.
띠이이이잉.
그때, 연원을 알 수 없는 기묘한 경고음이 들린다. 그건 영성의 경고음이었다.
시약과 마법적 재료들을 이용해 주변을 철통같이 보완하고 싶었지만, 그 경각심 이상으로 샤를의 영성이 고하고 있었다.
마법을 사용하지 말라고.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무시무시한 직감은 샤를을 꼼짝도 못 하게 만들 정도로 강했다. 이런 경우, 샤를은 그 직감을 따르는 것이 좋은 결과를 냈다.
그래서 결국 방을 주문으로 보완하는 것은 그만두기로 했다.
-쭈인, 불안해?
그때, 파기나레코르가 텔레파시로 샤를에게 물었다.
-너 간만이다? 조용하다가 갑자기 왜 나와?
샤를의 허리춤에는 처음부터 파기나레코르가 매달려 있었다. 마도서의 겉장은 워낙 화려했고 은폐 기능을 넣어뒀기 때문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한 것.
하지만 평소처럼 파기나레코르는 모습을 투영해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는 대신 그냥 마도서인 채로 말을 걸었다.
-뭔가, 이상해. 내가 밖으로 투영하지 않는 이유를 알겠어?
-그래, 나도 ‘신비학’ 적인 무언가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감이 온다. 마치 무언가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 같아.
-실제로, 이 주변 공간은 관찰되고 있어. 의심을 살 행동을 하면 안 돼.
샤를은 옷을 정리하는 척 탁상 위에 올려뒀다. 그리고 파기나레코르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고 침대에 누워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관찰이라고?
-여기 있는 사람들, 하나같이 이상해.
-나도 알고 있어. 그래서 여러 번 점을 쳐봤지.
샤를의 점술은 ‘겉으로는’ 아무것도 안 하는 것처럼 보인다. 심상 세계에서 점을 쳤기 때문이었다.
-쭈인의 심상 세계라는 그 공간에서 점을 쳤구나?
-그래.
-근데 일단, 솔로 킹에 대한 점술을 치면 안 돼.
-그게 무슨 소리야?
-점술의 대상이 잘못 된거야.
그렇게 지적을 받자마자 샤를은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그렇군. 그에 대해서 점술을 칠 것이 아니라 이 ‘공간’ 전체에 대해서 점술을 쳤어야 해.
샤를은 눈을 감고 심상 세계 속으로 들어갔다.
‘이 공간은 매우 위험하다.’
그 위험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샤를의 잔상이 커지기 시작하면서 어떤 장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솔로가 사람들과 얘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건 명백히 과거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에 으스스한 얘기를 읊던 그 장면이다.
어째서 점술이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지 모르겠으나 샤를의 시야는 점점 한쪽으로 몰린다. 솔로의 상의의 주머니 꽂힌 만년필……. 그 만년필에서 요사스러운 빛이 뿜어지고 있었다.
샤를은 그 이전까지 전혀 감지하지 못했었다. 영성이 깃든 물건이 아니다.
‘유물!’
저건 틀림없이 어떤 유물의 모습이었다. 샤를이 가진 모노클이나 브로치 같은 유물이다.
-이미 솔로는 뭔가를 저지른 거야.
샤를은 턱을 괴고 추측을 했다. 유물의 능력은 워낙 다양하고 말도 안 되는 물건이 있었다. 현실의 물리법칙에서 완전히 벗어난 물건이 바로 유물이다.
그러나 솔로의 행동을 보고 그 유물에 관해서 유추할 수는 있었다.
첫 번째, 솔로는 마치 미래를 보고 온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러므로 일종의 시간 여행에 관련된 물건이다.
두 번째, 이야기한 미래가 현실로 이뤄지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앞으로 일어나게 될 일이다.
세 번째, 또 다른 평행 세계에서 일어난 일을 이야기해주는 것이다. 어떤 특수한 공간이 있어서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솔로가 얘기한 것이다. 그걸 파기나레코르에게 말해주자 파기나레코르가 대답했다.
-쭈인은 지금 감시받고 있잖아?
-그래, 왜 감시를 하고 있는지 알아야지.
-왜?
-내 예상으로는 그 유물은 ‘정보’를 모으는 것 같아. 예를 들어, 이전에 솔로가 내게 물었었지.
「샤를 헥센 교수님. 당신에 대해 궁금하군요.」
「탐사학부입니다. 고 헤르메스 어를 가르치고 있지요.」
「아, 그래요. 그럼 다른 직업도 있습니까?」
-다른 직업이라고 물어본 게 이상해. 보통 교수라고 밝히면 사람들은 그러려니 하거든, 일종의 차별적 편견을 가지는 거지. 아 저 남자는 교수처럼 행동하겠구나.
그런데 샤를에게 또 물었다는 것은 샤를이 보이는 분위기나 행동을 통해서 샤를을 학습한 것에 가까웠다.
샤를은 우락부락하진 않지만, 속이 꽉 찬 근육도 붙어 있고 운동 능력도 좋다. 보통의 교수와는 다르니 솔로가 또 다른 직업이 있냐 물어본 것이다.
샤를이 탐정이라고 대답한 순간부터 샤를에게는 교수 및 탐정이라는 프레임이 덧씌워지고 그 순간 샤를이 가진 리볼버에 대해서도 알게 된 것이다.
사립탐정이 리볼버를 들고 다니는 일은 그렇게 이상할 것이 없었으므로…….
그렇다면 영성이 경고한 것이 이해가 간다. 샤를은 이 이상으로 정보를 노출하면 안 된다. 그가 무명 교단의 교주라는 정보가 알려진 순간 샤를이 가진 주문, 유물, 그간의 행적 및 파기나레코르의 정체를 들키게 될 것이었다.
‘만약 내가 지구인 김연수라는 것을 밝히면?’
상상도 하기 싫다. 어쩌면 샤를의 근본적인 무언가의 정보까지 수집 당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대체 그 유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봉인물’이 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유물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다.
이런 봉인물은 재단이 알아챈다면 기가 막히게 회수해가겠지만 지금 재단은 이곳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고 샤를은 그들과 연락할 다리조차 없다.
지금은, 샤를 혼자서 이 모든 일을 해결해내야 한다. 생각을 하다가 샤를은 지독할 정도의 피곤함이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잠들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수마(睡魔)는 버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는데 순식간에 6시간가량 지나있었다. 샤를은 너무 놀라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야, 파기.
-우웅 깨우지마.
샤를은 파기나레코르가 이미 잠들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이상하다. 유물의 효과가 마도서마저 잠재웠단 말인가?
파기나레코르는 인격체라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잠깐 들긴 했지만 확실하진 않았다. 샤를은 새 옷을 입고 내려가자 그가 제일 먼저 일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소파 위에 앉았다. 이 위화감. 분명히 어제 보던 풍경일 텐데도 마치 어색한 것을 본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샤를은 일어서려고 하다가 위층에서 누가 내려오는 것을 느꼈다. 잔뜩 긴장했지만 내려온 사람은 솔로가 아니라 로렌이었다.
그녀는 가운 차림으로 내려왔다. 머리가 물기에 젖은 것을 보니 샤워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타월 위로 몸매가 드러나는 것을 보니 굉장히 매력 있는 사람이었다.
“어, 총잡이씨?”
“안녕하세요. 로렌. 좋은 오후네요.”
“하으암. 벌써 일어나셨대.”
진열장에서 와인을 챙기는 로렌은 자신의 유리잔에 화이트 와인을 따랐다. 그리고 조금 뒤에제프리가 문을 두들기면서 나왔다. 그는 끌차 위에 음식을 잔뜩 들고 왔다.
“깨어나셨습니까 여러분?”
“아, 제프리. 오늘은 간단한 샐러드로 해줘요.”
“그럴 줄 알고 미리 준비해왔죠.”
토마토가 들어가 있는 연어 샐러드라는 말에 로렌의 표정이 풀렸다. 이곳에 올 때마다 그녀가 느끼는 것이었는데, 제프리는 로렌의 생각을 캐치하는데 도가 튼 것 같다.
“제프리, 정말 우리 집 집사 안 할래요? 여기보다 더 잘 쳐줄 수 있는데.”
“허허. 로렌 양. 댁에는 이미 집사가 있지 않습니까. 저는 선대로부터 내려온 이 산장에 사는 것이 좋습니다. 고즈넉하고 말이죠.”
“아쉽단 말이죠. 제프리가 오면 우리 집 집사는 당장 해고할 텐데.”
“그럼 더더욱 그 집사의 일자리를 뺏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가 여기 있어야겠군요.”
능숙하게 말을 받으면서 응접실 식탁 위에 제프리가 음식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응접실 탁자는 금세 음식들로 가득 찼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많이 차린 것을 보니 이 저택의 모든 사람에게 나눠줄 용도인 듯했다.
“끄어어어. 흐아아아암!”
위층에서 누군가 또 내려왔다. 이번에는 앨런이었다. 앨런은 하품을 크게 하면서 배를 긁었다. 그리고 내려올 때 음식이 있는 걸 보면서 반색했다.
“이야! 제프리. 항상 고맙군. 어떻게 매번 올 때마다 우리가 배가 고플 때를 정확하게 알아채는 건지 궁금한데.”
“아침에 불이 꺼지는 것을 봤으니 늦은 오후쯤 배가 고프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하. 맞아. 오늘은 아침까지 피터랑 얘기하고 있었거든.”
내려와서 그는 라즈베리 파이를 한 손에 들고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샤를은 제프리에게 물었다.
“제프리, 저 건물에는 지금 몇 명이나 있죠?”
“예? 아마 저 빼고 6명일 겁니다. 마부들이 한 명씩 있고. 제 와이프도 저기 있죠.”
샤를과 리카가 타고 왔던 마차의 마부, 제인도 아마 저 건물에 있겠지.
몇몇 사람들이 계속 내려오기 시작했고 샤를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했다. 늦은 오후가 되자 노랗게 변한 햇빛이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쯤에는 모두 다 내려와 있었다. 솔로를 빼고는.
“식기를 수거해가겠습니다.”
제프리가 떠나자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대화를 했다. 여럿이 모이면 흔히 옆 사람과 대화하게 되지. 리카도 식사를 끝낸 이후에는 샤를과 평범하게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근데 솔로 작가님은 왜 안 내려오는 걸까?”
“글쎄.”
“어제 너무 늦게 잔 걸까? 아직 엔딩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하니까.”
샤를은 턱을 괴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도 안 내려오는 건 이상했다. 그때 옆에서 대화하던 앨런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서 말했다.
“아, 걱정하지 말게 친구들. 솔로는 보통 초저녁까지 자거든. 워낙 낮 밤이 바뀐 친구라. 제프리도 아까 음식을 들고 올라가기도 했었고.”
“그렇군요.”
-그렇군요는 개뿔! 왜 이렇게 느긋하게 앉아 있어! 그놈 찾아다가 빨리 조져야지!
-걱정하지 마. 대충 느낌이 왔거든. 어차피 올라가봤자, 솔로는 없어.
-없다니?
-저녁을 먹으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뭐가 문제인지 알겠어. 솔로의 이야기 말이야.
-그게 뭔데? 궁금해 죽겠네!
-기다려봐.
샤를은 파기나레코르와의 대화를 끝내고 느긋하게 앉아 있었다. 파기나레코르는 영 불안하다는 눈길로 샤를을 쳐다봤지만, 샤를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맨 처음 이변이 일어난 것을 느낀 사람은 잠깐 산책하러 밖에 나가려던 피터의 지인 작가 둘이었다. 솔로 킹이 내려오지 않자 좀 기다릴 생각을 하고 있던 둘은 대문이 잠겨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응? 문이 잠겨 있는데?”
“그러게? 아까 제프리가 나가면서 문을 잠갔나?”
쿵. 쿵. 쿵.
응접실에서 한참 떠들던 사람들은 문을 세 번 두드리는 그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피터가 일어나서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무슨 일인데?”
“피터, 여기 문이 잠겼는데.”
“응? 대문이 잠겼다고? 아까까지만 해도 열려 있었잖나.”
“흐음. 여기 다른 문은 없나?”
“아, 후문이 저쪽에 있을 걸세. 저기, 창고로 쓰는 방 옆에 길이 있지.”
그걸로 해결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터는 두 작가가 후문으로 나가서 제프리에게 키를 받아와 문을 열겠지, 했는데 둘은 빈손으로 돌아왔다.
“저기도 문이 막혔어.”
“뭐라고? 2층 창문, 혹은 발코니나 다른 곳은?”
“내가 지금 확인해보겠네.”
“뭔데? 무슨 일이야?”
앨런이 푸짐한 상체를 일으키면서 일어서자 피터가 무슨 일이 생겼는지 말하자 앨런은 별 일 아니라는 듯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흠. 이 저택은 워낙 커서 말이야. 저쪽에 전보가 있네. 그걸로 연락하면 될 거야. 폭풍우나 눈사태 같은 게 일어나서 고립되면 사용하려고 준비된 건데.”
앨런이 느긋하게 거실로 걸어가서 전보를 만졌다. 타자기에 손을 올려놓고 치려고 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전선이 절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