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5화 - “음. 범인을 누구로 할지 아직 정하지 못했어.”
“정황상 범인은 폴이 분명해. 그는 예전에 소방수로 살면서 상당히 근육을 단련해왔지. 죽은 간호사 잭을 비롯해 여러 간호사가 협동해서 진정시킨다고? 그는 그동안 은밀히 쇠창살이 달린 창문을 부숴왔던 거야. 그리고 외벽을 타고 내려와서 잭을 죽인 거야.”
로렌이 와인을 마시면서 말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폴은 과거에 교회를 불태웠던 행동을 후회하고 있었어. 그에게 정신 병동은 속죄의 장소지. 설사 쇠창살로 된 창문을 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나가지 않을 거야. 그보다는 나폴레옹이 의심되는데. 사람은 두려운 상대로 더 폭력적으로 나오게 되니까. 가장 방어적인 것은 공격이지.”
한참 이야기를 꽃피우면서 피터는 로렌이나 앨런, 그리고 메리나 솔로 등 다른 작가들에게 여러 차례 범인에 대한 타당성을 들으면서 고민했다.
“흠.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범인이 확실하지 않아.”
“아니! 작가 본인이 모르면 어쩐단 말인가 이 친구야? 완결을 내지 못한 작가는 오늘 꼴찌를 할 수도 있어.”
“후후. 내 완성도가 높으니 그래도 꼴찌는 아니지 않을까 싶은데. 다음 타자는, 음. 오늘 제일 말을 하지 않은 솔로 자네가 하는 게 어떤가.”
피터가 고개를 돌려서 솔로 킹을 지목하자 그는 입을 열어서 우물우물했다.
“음……. 내게……두 번째 이야기의 진행을 지목해줘서, 고맙군. 오늘 내가 준비한 것은 공포 소설이야.”
“킹의 공포 소설. 마음에 드는군. 자네의 공포 소설 만큼 일품인 게 없지.”
앨런뿐만 아니라, 리카와 메리, 로렌도 솔로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눈치였다. 여자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해지자 솔로 킹은 어깨를 움츠리면서 살짝 무섭다는 사인을 보냈지만 그걸 눈치챈 건 샤를뿐이었다.
솔로는 그런 압박 속에서도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의 특유의 더듬는 말투는 이야기에 힘이 실리지는 못했지만, 발음이 또렷또렷해서 알아듣기는 편했다. 오히려 그렇게 느리게 이야기하는 것이 조금 더 기괴했다.
“배경은 이 산장으로 잡았어……. 그리고 등장인물은, 우리들이라고 하지.”
“와! 즉석에서 이야기를 지어내겠단 말인가?”
앨런이 깜짝 놀라자 로렌도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이 이야기는 모두, 가공이니. 여러분들이 죽거나 한다고 해서……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합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공포나 스릴러 소설을 좋아해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공포 소설 속에서 자신이 죽는다고 해서 기분 나빠할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앨런이 초대했던 커플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죽여달라고 얘기까지 했으니. 어차피 소설속이라지만 그들은 솔로의 공포 소설에 열광하고 있었다.
“솔로, 네가 그렇게 우리들을 잘 파악했는지는 모르겠는걸. 당장 처음 보는 사람들은 어떻게 등장인물로 만들려고?”
“그렇단 말이지? 아주 재미있겠어. 이번에는 지적할 것들이 많겠는데.”
“하지만 그래서 더 기대되는 데.”
메리가 앨런의 말을 받았다.
피터의 이야기는 설정에 구멍이 뚫려 있으면 지적했을 때 그때그때 메우는 편이었지만 지금 여기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등장인물이 된다면 설정에 구멍이 심각할 것이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사람을 잘 보는 것은 다른 문제였으니까. 특히 솔로는 말이 좀 둔하고 그는 그다지 사교성이 높다고는 하기 힘든 성격이었다.
모두가 기대하는 동안 한 사람, 샤를만큼은 우려하고 있었다.
‘솔로가 이대로 소설을 이야기하게 내버려 둬도 되는 걸까? 내 영성은 아직까지 별다른 경고가 없어. 자리를 비워서 점을 쳐볼까?’
아니, 샤를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안다. 상대가 계시의 석판 조각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는 동안에 그자를 상대로 점술을 쳐서는 안 된다.
‘그건 저번에 에브렌 린덴을 상대로 점을 쳤던 거면 충분해.’
잠깐 고민하는데 누군가 얘기를 꺼냈다.
“아, 잠시 쉬었다가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되겠습니까? 피터 선생님의 이야기를 너무 오래 들어서 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자 아예 브레이크타임을 가지기로 했다. 여러 사람들이 자리를 비워서 담배를 피우거나 화장실을 가는 동안 샤를은 홀로 방에 잠깐 돌아왔다.
그리고 심상 세계에서 점을 치기로 했다. 당연히 대상은 솔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 예를 들어서 방금 전 피터의 경우. 그는 샤를이 진짜 알고 있는 실제 인물인 메리 웰로드를 언급했다.
그래서 과연 그가 대체 무슨 말을 한 건지 궁금했다.
‘피터 스트라우브는 미래를 예지하고 있는 건가?’
샤를은 잔상을 보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잔상을 뒤져봐도 별일은 없었다.
‘예지가 발동하지 않아? 왜지?’
샤를이 행하고 있는 건 평범한 점술이었다. 현실에서 점을 칠 때처럼……. X나 O로 답변이 나타난다. 무존자의 힘을 끌어 쓰는데도 평범한 점술이 발동한다? 뭔가 있다.
‘일단 그냥 점술이라도 도움은 된다. 그래, 피터 스트라우브는 위험하다.’
촛불의 잔상이 X를 그린다. 샤를은 혹시 몰라서 피터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들의 점을 쳤다.
여러 번 점을 반복적으로 쳐서 이번 점괘가 점술 방벽에 막히고 있는지 다중으로 체크했다. 그러나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답변은 동일 했다.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다는 뜻이지만 샤를은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두툼한 프록코트 안쪽에 6발 장전된 리볼버를 숨겨뒀다.
샤를은 점술이 만능이라고 느끼지 않았다. 거기다 이번에는 ‘예지’가 발동하지 않으니 샤를의 긴장도는 최대치였다.
잠깐 휴식 뒤에 모인 사람들은 아까보다는 조금 덤덤한 표정으로 앉았다. 밤은 길고 아직 와인은 많이 남아 있었다. 솔로는 조금 전과 같은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가 첫 번째로 입을 뗐다. 말투는 전과 달랐다. 목소리는 또박또박했으며 평소의 늘어지는 듯한 어투가 완전히 달라졌다.
“우리 모두는 내면에 악을 품고 있지. 그럼 악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나는 여러 번 생각하다가 어떤 결론에 도달했다. 공포에서부터 악이 나타난다.”
이 순간, 그는 청중을 지배하는 지배자였다. 그 한마디 뒤에 사람들은 숨을 죽였다. 무슨 말을 꺼내야할지 잠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앨런은 평소에 솔로를 얕잡아보고 있었다. 그보다 덩치도 작으며 항상 어눌하게 말하고 수동적인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내심 자시보다 아래라고 느낀 것.
하지만 이 침묵의 시간 속에서 앨런은 상대의 압도적인 지배력을 느꼈다. 거기서 느낀 것은 반발심이었다. 앨런은 그 솔로가 모두를 지배한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거부감을 느꼈다.
그래서 기나긴 침묵을 끊는 포문을 열었다.
“자네가 여러 번 주장하던 공포 이론이군. 사람은 두려움 때문에 사악해진다는 말.”
“음. 괜찮은 서두인데. 책 첫 번째 페이지에 장식해두면 좋겠어.”
피터가 이어받자 잠시 공간을 지배하던 솔로의 감각이 사라졌다. 솔로는 처음으로 레드 와인을 따랐다. 여태 그는 이야기를 듣고서 물만 마시다가 이번에야말로 술을 마신 것이었다.
“저번에 솔로는 미지에서 공포가 나타난다고 했지. 이번에는 공포에서 악이 나타난다고 하는 걸까?”
메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등식으로 치환하면 결국 미지의 것은 ‘악’이라는 것이었는데 샤를은 이계에 존재하는 여러 신을 생각했을 때 그 표현이 매우 정확하다고 판단했다.
“지금부터 하는 모든 얘기는 소설이야. 소설에는 사건이 필요하지. 흠. 그래, 우린 이 작가 클럽에 항상 올 때부터 궁금해하던 게 있었지.”
“우리가? 뭔데?”
“바로 이 저택의 구조 말이야. 3층짜리 건물이지만 다른 부지보다 꽤 높게 세워져서 실질적으로는 이 저택이 6층이나 7층 정도라는 것. 다들 알고 있지?”
“아. 그렇지. 저번에 로렌이 얘기했었잖아. 그때 한참 떠들어댔지만, 결론을 못 내렸지.”
앨런이 대답하자 솔로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늘 클럽에 오기 전에 하루 전날 이 저택을 방문했었지. 관리인 제프리와 이런저런 얘기를 했는데 그 얘기 중에는 이 건물의 지하실에 관한 것도 있었어.”
그때 로렌이 손을 들어서 말했다.
“와인 저장고 아래 말이지?”
“그래. 차가운 와인을 상시 보관하기 위해서 와인 저장고는 지하 2층에 지어져 있었지. 근데 로렌 넌 지하 2층에 있는 어떤 계단을 발견한 거야. 지하 3층으로 향하는 계단 말이지.”
“맞아. 제프리는 지하 3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으로 가지 말라고 했어. 위험하다고. 아래로 내려가는 문 열쇠도 없다고 했지.”
로렌은 피우던 담배를 놓고 와인잔도 내려놓았다. 정말로 흥미가 당기는지 집중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제프리와 대화를 하면서 뭔가 이상함을 느꼈어. 지하 3층으로 가는 문은 봉쇄되어 있었거든. 그리고 내려가는 문 열쇠도 없고. 그래서 궁금해서 관리실로 숨어 들어갔지.”
“엥? 진짜?”
“소설이라고……했잖나.”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보면서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말이 너무 실감 나서 진짜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솔로는 4번째로 이 저택에 도착했다.
“로렌이 저번에 지하 3층으로 가는…… 문을 찾았다고 얘기한 것을, 소설로 바꾼 것에 불과해. 실제로 지하 3층으로 가는 문 열쇠 따위는…… 없는지, 모르지.”
“하하! 그래서?”
샤를은 그가 소설을 이야기할 때만 목소리가 또렷해지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만큼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솔로는 방금 전에 했던 말과 정반대되는 소설을 전개했다.
“나는 관리실에서 지하 3층으로 향하는 문 열쇠를 열심히 수색했지만, 어디에도 없었어. 그래서 나는 아예 관리실 전체를 뒤지기로 했지. 제프리의 비밀스러운 사생활을 캐는 것은 영 내키지 않았지만, 지하 3층으로 가는 열쇠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었어. 나의 호기심은 두려움을 뛰어넘었지.”
목이 타는지 솔로는 와인을 한잔 마시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특이한 것을 발견했어. 그건 어떤 보석함 같은 것이지. 겉은 가죽 재질로 포장되어 있었고 아름다운 금색 수실이 놓여 있었는데 난 그걸 보자마자 허리춤을 뒤졌어. 조금 전 방을 수색할 때 제프리의 코트에서 그 보석함에 맞는 열쇠를 찾았거든. 그래서 보석함을 열어봤지.”
“뭐가 있었는데?”
“지하 3층으로 향하는 열쇠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적힌 어떤 종이가 있었어. 자, 보게. 이건 그 열쇠야.”
솔로는 품에서 상당히 크고 보라색으로 반짝이는 열쇠를 꺼내 들었다. 샹들리에 아래에서 빛에 반사되었는데 너무 화려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창고 열쇠를 손에 쥐고 있다는 것은 자칫 이상한 일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로렌이 손바닥을 치면서 말했다.
“아하하! 솔로! 그거 따로 준비해왔구나. 준비성이 철저한데.”
“오호! 그런 거로군. 나는 왜 또 열쇠가 있나 했네. 어디 집 열쇠라도 되나?”
앨런이 맞장구치자 피터가 열쇠를 유심히 보면서 말했다.
“근데 이 열쇠는 그 허름한 지하 3층 열쇠와는 좀 맞지 않는 거 같은데 너무 화려해. 지하 3층은 완전히 녹슬어버린 문이었잖아.”
“그렇긴 하네. 근데 같이 가져왔던 종이는 어딨어?”
메리가 묻자 솔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종이는 너무 불길했어. 서두에는 ‘성 케르베로스 회합’이라고 불리는 이제는 없어진 비밀 결사의 이름이 적혀 있었어.”
“흠. 성 케르베로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샤를은 메리가 중얼거리는 걸 놓치지 않았다. 샤를은 상당히 놀랐으나 내색을 하진 않았다. 성 케르베로스 회합은 지금 메트로폴에서 암약하는 4개의 사교 중 하나, 헬파이어 클럽의 전신(前身)이었다.
게임이던 시절, 헬파이어 클럽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 세계에 떨어진 뒤에 신비학 서적 여러 권을 탐독해가면서 어떤 설정이 있는지 찾았는데 거기서 성 케르베로스 회합이라는 결사가 이전에 존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진짜 있는 신비학 결사를 이용해 만들면 신빙성이 올라가지.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신비학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잖아. 굳이 그렇게까지 신빙성을 올려야 할까? 정말 소설인가? 그리고 메리 셸리는 그걸 어떻게 들어봤던 거지? 그리고 헬파이어 클럽은 대체 이 일과 무슨 관계인 거야?’
샤를은 턱을 괴고 잠깐 생각했다가 다음 솔로의 말 때문에 생각이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