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 응접실 벽면에는 유리로 된 진열장이 있었는데 여러 종류의 술이 놓여 있었다. 레드 와인, 화이트 와인, 스카치, 샴페인 등등을 보아 작가들은 하나같이 주당일 거라는 예상을 했다.
“원래라면 안내는 관리인이 할 텐데 여러분은 제가 초대했잖아요? 제프리 대신에 제가 이야기를 하도록 하죠. 숙소는 여자들은 3층, 남자들은 2층이에요.”
“네.”
“원하는 방을 선택하면 방에 꽂혀 있는 키를 꺼내오면 된답니다. 그러면 그게 본인 소유의 방이 되죠.”
“이번 클럽에는 몇 명이나 오죠?”
샤를이 묻자 메리가 고민하듯 생각하더니 말했다.
“아마 다섯 명에서 열 명 사이가 아닐까요? 각자 친구나 연인 한 명씩은 데려올 테니까요.”
“어, 절 데리고 온 마부 언니가 있는데 어떻게 하죠?”
리카가 묻자 메리가 대답했다.
“클럽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옆 건물에서 지낼 거에요. 저기 보이죠? 제프리를 포함해서 다 함께 저쪽에서 지낼 거에요.”
창문 너머로 보니 별장 옆에 건물이 따로 하나 있었다. 이 별장이 너무 커서 그런지 작아 보였지만 저 정도라도 충분히 건물이 커 보였다.
메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샤를과 리카는 방을 잡았다. 샤를은 방에 짐을 두고 이런저런 정리를 한 다음 내려와 보니 리카와 메리는 없고 한 남자가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베이지색 색코트(sack coat)에 회색 바지를 입은 남자였는데 빵모자는 옆에 벗어서 올려뒀다. 그는 파이프를 들어서 담배를 태우면서 손에 쥔 쪽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샤를이 내려오자 고개를 둘러보고는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피터 스트라우브입니다.”
그렇게 인사하는 그는 양쪽의 시선 방향이 달랐다. 특이하게도 한쪽 눈이 의안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작가분이시군요.”
“아, 그런 말을 하시는 걸 보니 이번에 손님으로 참석하셨군요. 반갑습니다.”
“보통 작가들만 모입니까?”
“그렇죠. 이번이 세 번째 클럽의 참가지만 지인들이 따로 참여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저번 모임에서 다음 모임에는 지인들도 참여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어떨까 했었거든요.”
옷 위로 근육이 드러나는 몸을 볼 때, 피터가 활동적인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샤를은 그와 대화하면서 그가 점잖은 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전에 경찰이었거나, 군인이었을 거라는 추측도 할 수 있었다.
“아, 마침 그 안건을 발의한 친구가 들어왔군요. 이쪽이네 앨런!”
앨런이라고 불린 남자가 들어왔다. 회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였는데 정장을 입고 있었다. 살집이 좀 있었고 키가 커서 꽤 위압적인 느낌이 들었다.
피터가 군인같은 느낌을 준다면 앨런은 마피아 보스같은 느낌이 났다. 아 물론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는 그랬다.
“아, 자네인가. 피터. 옆에는 누구지?”
“이쪽은 이번에 독자로 참여하게 된 샤를씨.”
“아화하핫! 이거 만나서 반갑소. 앨런 뷰커스요.”
앨런은 생긴 것처럼 중후한 저음을 갖고 있었는데 웃을 때는 성대가 쩌렁쩌렁 울리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목소리가 큰 사람은 보통 주변을 별로 신경 안 쓰는 타입인 경우가 많다.
샤를은 그와 통성명했다. 말이 많고 목소리도 크니 이야기를 할 때 주도해서 나서는 사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성명을 한 뒤에 마지막 남자 작가까지 들어왔다.
“안녕……. 하신, 가.”
“아, 솔로인가.”
마지막 남자는 꽤 병약해 보였다. 햇빛을 잘 보지 않는지 창백한 인상이었고 정장을 입고 있었으나 다른 작가들에 비교해서 뭔가 럭셔리한 느낌이 떨어졌다. 가까이 다가가면 뭔가 퀴퀴한 냄새가 났는데 그리 심하진 않았다.
“솔로 킹입니다.”
“……샤를 헥센입니다.”
사를 거는데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샤를은 솔로의 뺨에 난 초승달 문양의 점을 보고 그가 영성을 깨우친 것을 파악했다. 신문에서 봤던 것과는 조금 다른 인상이다.
앨런이 솔로의 어깨를 툭 치면서 껄껄 웃었다.
“이 친구는 원래 목소리가 그다지 크지 않다오. 로렌이 없으니 뭔가 힘이 나지 않는 건가?”
“난, 언제나……이랬어.”
“하하. 좋아 좋아. 자네 방은 2층에 있을 거라네. 들어가라고. 그런데 같이 온 사람은 없나?”
앨런은 조금 전에 들어오면서 한 커플을 데려왔다. 피터는 아는 다른 작가 두 명을 따로 초대했었고. 하지만 솔로 킹은 다른 사람을 데려오지 않고 그냥 혼자 왔다.
“어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느라 위에서 좀 오래 지체했더니 다들 모여 있었네요.”
메리와 리카가 위층에서 내려와서 소파에 앉았다. 그래도 산장이 워낙 커서 그런지 아직 응접실은 널널 했다.
“이제 로렌 필립스만 오면 되겠네요.”
메리가 그렇게 말할 때쯤 로렌이 나타났다. 코트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깃털이 얹어진 펠트 모자를 걸친 여성이었는데 허리춤에 꽉 조인 벨트 때문에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상당한 미인으로 그녀의 미들힐 구두가 바닥에 부딪힐 때면 딱딱거리는 소리가 났다. 모델처럼 걷는 게 생활화된 것 같다.
“다 모였네요. 내가 제일 늦었군요.”
“아이고, 아닙니다. 로렌 양. 방부터 잡으시죠.”
앨런이 웃으면서 능청스럽게 말하자 로렌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의 하인과 함께 2층으로 올라갔다. 여러 번 와본 모양인지 능숙하게 계단을 올랐다.
“로렌 양은 언제봐도 미인이야.”
“그건 맞는 말이긴 해.”
피터가 앨런의 맞장구를 쳤다. 샤를은 꽤 객관적으로 클럽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작가의 지인들은 별로 관심 없었고 피터, 앨런, 로렌과 메리, 그리고 솔로 이 다섯 명이 샤를의 주요 관찰 대상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성이 넘쳤지만 하나같이 뭔가 ‘이상함’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제일 주시하고 있는 솔로 킹의 경우, 약 30초에 한 번 자신의 왼쪽 팔목을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일종의 강박증처럼 보였는데 다른 사람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 같다.
피터와 앨런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면서 지인을 별로 신경 쓰지도 않았다. 로렌도 솔로처럼 동행인이 없었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여러모로 무관심한 것 같으면서도 주변에 신경을 쓰고 있다.
클럽 사람들은 일단 식사부터 했다. 저녁 식사는 관리인 제프리가 일일이 식사를 가져다 날랐다. 식사를 끝내고 메리가 손바닥을 쳐서 환기하면서 말했다.
“오늘도 이야기 해볼까요?”
“무슨 이야기요?”
“‘이야기’에 관한 ‘이야기’죠.”
“네?”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리카가 눈을 꿈뻑 거렸다.
“우리는 매년 모여서 즉석에서 지어낸 플롯을 얘기하죠. 작품은 아니지만, 이런 이야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요.”
“후후. 그래서 제일 개연성 있고 잘 만든 플롯을 1위로 선정하지. 미리 준비해와도 좋고, 즉석에도 지어내도 좋지. 즉석에서 지어낸다면 나머지 작가들이 그걸 보완해주고.”
미리 준비해오는 걸 어떻게 알겠냐마는, 어차피 작가들 사이에서의 유흥이니 각자의 양심에 맞기는 듯했다.
샤를은 흥미로운 눈으로 그렇게 말하는 메리를 바라보았다. 그래, 작가 클럽에서 평범하게 먹고 떠들고 하려고 보이진 않았을 것이었다.
앨런도 피터처럼 파이프 담배를 꺼냈다. 이야기한다고 하니, 옆에 흥미롭게 지켜보던 피터의 지인 작가 한 명이 술을 가져오겠다면서 옆에 있는 유리 진열장으로 향했다.
“음. 역시 이런 공격의 포문은 피터, 자네가 먼저 여는 게 좋지 않겠나?”
“또? 매번 나란 말이지.”
“껄껄껄! 기선제압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떤가.”
피터는 잠깐 한숨을 쉬더니 자신의 품에서 메모장을 꺼냈다.
“원래는 준비해온 플롯을 쓸까 했는데 마침 오늘 아침부터 재밌는 플롯이 생각나서 말이지. 어디보자. 이번 작품은 스릴러야.”
“스릴러? 호오.”
피터 스트라우브는 메모를 읽으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숨을 고르는 것 같았다. 생각을 마친 피터가 입을 열었다.
“이야기는 정신 병원에서부터 시작해. 그곳에 간호사 한 명이 살해됐거든.”
“간호사? 남자인가 여자인가.”
“남자 간호사. 아시다시피, 정신병에 걸린 남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남자 간호사가 아니면 안 된단 말이지. 어쨌든 이 간호사는 목이 졸린 채 2층 화장실에서 죽어있었어.”
그러면서 피터가 맛깔나게 연기를 뿜자 로렌도 담배가 댕기는지 궐련 하나를 꺼내서 입에 물면서 묻는 것을 보고 샤를은 이 작가들이 하나같이 골초인 모양이라는 걸 깨달았다.
“정신 병원은 몇 층이지?”
“5층 건물이야.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계곡 사이에 있지. 그래서 사람들은 이 건물을 오고 싶어 하지 않아.”
“흥미롭군. 왜 하필 2층일까.”
사람들은 누구는 왜 목이 졸려 죽었는지, 다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정확한 사건을 궁금해했다. 피터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재밌어졌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남자 간호사는 20대, 덩치는 음. 저기 앨런보다 크다고 하지.”
“거한이로군!”
졸지에 주목받은 앨런이 낄낄대면서 웃었다.
“얼굴엔 흉터가 있었어. 그리고 그 간호사는 신대륙 전쟁을 겪은 퇴역 병사였지. 이름은 잭이야. 이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형사 한 명이 움직이게 돼. 이름은 더글라스 헨치. 배가 나온 40대의 형사야. 예전에는 활약했으나 지금은 그럭저럭 평범한 형사지.”
“음. 좋아. 설정은 마음에 들어.”
“더글라스는 이 사건을 보고 골치 아픈 것을 깨달았지. 단순히 목이 졸려서 죽은 것을 보면 살인사건인 줄 알았는데, 그날 당직은 잭 혼자뿐이었고 모든 정신병자는 4~5층에 수용되어 있었기 때문이지.”
“정신병원에 당직이 혼자라고?”
“원래 2인 1조였는데 그날따라 다른 당직이 너무 아파서 병원에 누워있었지. 대체할 사람의 스케쥴이 아무도 나오지 않았어.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혼자 일했지. 맥밀런 정신병원에는 사람은 적고 봉급은 짜니까.”
누군가 찌른 설정의 허점을 피터는 완벽하게 봉합했다. 그리고 맥밀런 정신병원에 대한 설정도 짜이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럼 시체의 최초 발견자는 누구죠?”
피터의 지인 작가 한 명이 손에 레드 와인 한 병과 와인 잔을 가져오면서 물었다.
“정신병동에 사는 프랜시스. 다음 날 아침 자유시간에 2층에 내려왔을 때 발견했다고 하더군.”
“유력한 용의자 후보네.”
“프랜시스는 병동 내에서는 ‘악마’라는 칭호를 갖고 있었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는 것이 들린다고 하더군. 그래서 그는 순식간에 살인 용의자로 몰리게 돼.”
“그래서 더글라스는? 프랜시스를 범인으로 지목했나?”
“아니, 그러면 재미가 없지. 더글라스는 프랜시스 대신 다른 살인범이 있다고 판단했어. 프랜시스는 앞이 안 보이는 맹인이었거든. 맹인이 퇴역 병사인 간호사를 살해한다?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하지.”
“자, 빨리 더 말해보게, 다른 등장인물은 없나?”
앨런이 묻자 피터는 조금 기다리라는 듯 손을 들어 올리더니 턱을 괴고는 즉석에서 등장인물 하나를 생각해냈다.
“정신의학자 메리 웰로드. 그는 프랜시스를 관리 감독하는 의사였어. 프랜시스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거라는 추측을 제일 먼저 형사에게 낸 의사였지.”
메리 웰로드? 갑자기 샤를은 이상한 오한이 들기 시작했다. 그 의사는 샤를이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피터가 마치 가상의 인물이라는 듯 얘기한다라……. 뭔가 있다. 이 모임은 단순한 모임이 아니다.
“메리는 더글라스와 함께 범인을 추측하기로 했어. 정신 병원 내부에서 용의자로 지목 할만한 사람이 넷 있었거든. 첫 번째는 ‘소방수’라고 불리는 폴 플랫이었어. 폴은 이전에 교회를 불태운 적 있는 방화범이기도 했지. 두 번째는 ‘전문가’ 발터 코스트너. 운동을 미친 듯이 하는 남자야. 발터는 그날 아무도 본 적이 없었지. 알리바이가 없다고 할까.”
두 번째 인물까지 얘기했던 피터는 와인을 마셨다.
“세 번째는 ‘나폴레옹’이었어. 정확한 이름은 없어. 그는 항상 겁에 질려 있었고 특히 죽은 간호사 잭을 두려워했지. 마지막으로는 여자 간호사 폴슨. 밀드레드 폴슨이라는 이 여자 간호사는 오히려 너무 친절해서 더글라스의 의심을 사게 돼.”
피터의 이야기는 흥미로워서 다들 와인을 한 잔 걸치면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존과 더글라스는 범인을 수색하면서 점차 범인을 추적해나갔다.
때로 설정에서 오류가 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로렌이나 앨런 등의 다른 작가들이 지적해주니 피터는 즉석에서 설정을 바꾸면서 이야기를 전개했다.
샤를은 피터의 스토리를 듣다가 마지막에 피터가 가서 이야기를 자르는 것을 보고 자신이 와인잔을 꽉 쥐고 집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TRPG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앨런이 안달이 난 듯 피터에게 물었다.
“왜, 이다음에 이야기를 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