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 “다른 특징적인 것은 없나? 하다못해 신체 부위라도 말이야.”
“신체 부위라. 아, 그런 거라면 하나 알고 있는게 있지. 크래프트의 몸에는 특징적인 부위가 있었어.”
“어디?”
“뺨에 초승달 모양의 점이 있어. 초승달이 있고 초승달 안쪽에 원이 그려져 있는 특징적인 점이라더군.”
초승달 모양의 점이라. 그러다가 문득 샤를은 과거의 환상을 떠올렸다. 두 번째 석판 조각을 얻고 나서 샤를은 그 모든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때 봤을 때 크래프트의 뺨에는 초승달―원 모양의 점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 점은 계시의 석판 조각을 얻고 난 이후에 얻은 것이었다. 상처가 아니라 점. 이 점은 아마도 계시의 석판 조각으로 인한 주술적인 성흔(聖痕 stigma)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술적인 성흔은 혈맥에 남아서 후대로 전승된다. 후대의 자손이 영성을 깨우친다면 그 특징이 드러날 확률이 높았다.
“…‥.”
골똘히 생각하던 샤를은 더 생각 나는 게 없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의뢰도 어려웠겠지. 소정의 의뢰비를 지불하려고 하는데.”
“아냐, 난 됐어. 그때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대학 내부에서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
드레이크가 그렇게 말하면서 라이스 교수를 바라보았다. 라이스는 이 고생을 하고 받을 보상에 대해 기대하고 있었지만 드레이크의 말을 듣고 뜨끔하는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뭐, 뭐 나도 필요 없다네. 렘 시대의 일들을 탐구하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까.”
“아냐, 그래도 자네들은 모두 다 받아야 해.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지니까.”
샤를은 억지로 그들에게 봉투를 쥐어줬다. 100파운드 가량의 금액이었다. 겉으로 사양하더라도 의뢰에 대한 보수는 지급해야 한다.
“앞으로도 이렇게 의뢰할 일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넣어둬, 넣어둬.”
“그런데 말이야, 그들에 관해서는 왜 찾는 거지?”
드레이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묻자 샤를이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궁금한 게 많아서 말이야. 렘 시대에 그들이 워낙 많은 일을 하지 않았나? 까마득한 인류의 과거에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따로 조사 하고 싶은데 자네들만큼 전문가가 없어서 그래.”
“그건 그렇긴 해……. 그들은 시대의 구원자라고도 불릴 만큼 많은 부분에서 인류의 문명을 부흥시켰지.”
라이스 교수의 대답에 샤를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해줬다. 그는 이 세계에 구원자 따위는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대로 세상은 멸망해버리고 말 것이었다.
그런 생각은 속으로 감추고 그 뒤로는 먹고 마시는 것의 반복이었다. 그러다가 드레이크가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말이야.”
술이 거나하게 취한 드레이크가 말했다.
“아미티지 교무처장님이 자넬 보고 싶어 하는데. 얼마 전에 그분께서 복귀하셨거든.”
“얼마든지 좋아.”
“그래, 그럼 시간을 내줬으면 해.”
네이슨 아미티지와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다. 어지간하면 교단으로 끌어들이고 싶기도 했다. 샤를은 그들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집으로 귀환했다.
다음날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 메트로폴 타임즈를 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다가, 곧 한 페이지를 주목하게 되었다.
「유명 소설가 솔로 킹의 귀국.」
솔로 킹이라면 저번에 리카 웹스가 말했던 소설가였다.
「유니온 스테이츠에서 순례 강연을 마친 유명 소설가 솔로 킹의 귀국 사진.」
샤를은 눈을 크게 떴다. 솔로킹이라는 남자의 뺨에 희미하게 초승달 모양의 점이 박혀 있었다. 이렇게 운이 좋게도 정보를 얻을 수 있다니?
그가 크래프트의 자손이 아니더라도 조사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샤를은 당장 일어서서 리카에게 편지를 썼다.
*
마침 다행스럽게도 샤를의 일정이 없는 동안에 작가 클럽이 열린다고 했다. 위치는 메트로폴 바깥에 있는 노이스 산.
며칠 그곳에서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고 리카가 미리 얘기해뒀기 때문에 샤를은 이런저런 준비를 해둔 상태였다.
“아 교수님!”
“안녕?”
“안녕하세요.”
오늘은 무지막지한 플로나를 떼놓고 왔다. 메트로폴 밖으로 벗어날 생각이기 때문에 샤를은 미리 며칠 동안 자리를 비운다고 얘기했다. 그동안 교단을 관리할 사람은 플로나였다.
샤를이 며칠 자리를 비우는 게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플로나는 자신의 의무에 대해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리카 웹스와 함께 간다는 얘기는 꺼내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샤를과 리카가 탄 마차는 메트로폴 밖으로 벗어났다.
노이스 산은 메트로폴에서 마차를 타고 4시간 정도 움직이면 되는 거리에 있었다. 비포장도로라서 덜컹거리는 게 흠이었지만 이런 도로에서는 샤를의 마차라도 격렬하게 흔들릴 게 뻔했다.
‘그러고보니 아예 메트로폴 권역 밖으로 나온 적은 처음이네.’
유산인 포도밭을 둘러볼 때 메트로폴 교외에 잠깐 있었지만, 아예 권역 밖으로 빠져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리카가 말하는 산장은 증기기관차를 타고 갈 정도로 먼 지역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장이라는 말 때문에 불안감이 뭉실뭉실 솟아났다.
원래 소설을 읽으면 이런 산장에서 무언가 일이 벌어지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소설가들이 모이는 곳으로 가게 되고.
그러나 리카는 샤를의 우려와는 전혀 관계없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서도 책을 읽으면서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움직이는 마차에서 잘도 책을 읽는다.
-와 쭈인! 나 메트로폴 밖으로는 처음 나와봐.“
-정말로?
파기나레코르가 말했다.
-여태까지는 쭈인네 집 지하에서 잠들어 있었으니까.
-그러고보니…….
샤를은 파기나레코르가 그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득 든 생각 하나. 게임 속에서는 초반 샤를의 집에 있었던 게 그다지 이상하지 않았다.
초반에 난이도가 헬인 샤를을 위해서 준비된 것이라고, 여러 플레이어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한 것이다. 샤를은 자신의 모든 신비학적 자산들을 지배의 권능을 얻기 위해 바쳤다. 정말 동 달란트 몇 개 빼고는 탈탈 털어서 그간 몇십 년 동안 모아왔던 것들을 줬다.
그런데 파기나레코르 만큼은 그 집에 있었던 것.
빙의 이전의 샤를의 생각을 유추하자면 지배의 권능을 파기나레코르에게 사용하려고 파기나레코르 만큼은 바치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왜지? 파기나레코르가 그렇게 중요한 책인가?’
샤를은 이전 게임 플레이에서 파기나레코르를 그냥 주문을 보관해주는 주문서 정도로 취급했다. 하지만 뭔가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마차는 어느새 메트로폴을 벗어나 목적지에 도착했다.
“리카 아가씨,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아, 고마워, 제인.”
한 여자가 마부석에서 내려서 문을 열고는 리카의 손을 잡고 에스코트를 했다.
특이하게도 이 마차의 마부는 제인 오트먼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웨이브진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그녀는 매우 차갑게 샤를을 바라보곤 했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아주 도둑놈을 바라보는 듯한 그 싸늘한 눈초리란. 꽤나 오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정정해줄 타이밍이 안 맞아서 여전히 제인은 샤를을 탐탁잖게 보고 있었다.
‘아니, 정정해줘도 별로 좋게 볼 것 같진 않네.’
이 적의……. 마치 애지중지한 딸내미를 산적같은 놈팽이에게 빼앗긴 것 같은 기묘한 적대감이다.
제인은 앞머리로 왼쪽 뺨을 가리려는 듯한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샤를은 그녀의 분위기와 잘 발달 된 근육을 봤을 때 단순한 마부가 아니라 리카의 호위 명목으로 고용된 모험가나 용병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여자 마부라니 좀 특이했지만, 시대적 배경을 떼놓고 보면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리카를 내려준 이후 샤를을 휙 둘러보면서 차가운 눈동자로 얼른 내리지 않냐는 듯 눈치를 주는 게 훤히 보였다. 샤를은 표정의 변화 없이 뒤따라 내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름다운 산장의 모습이 보였다. 고급스러운 목재건축물은 주변보다 더 높게 지어져 있었다. 산 위로 꽤 올라와서 오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도로 바로 옆에 있었다.
“이 주변은 사유지라고 하나 봐. 이 저택은 발목 전쟁이 있기도 전부터 전에 지어졌다고 메리가 그랬어.”
“발목전쟁이라면 옆 나라인 오트랑과의 전쟁이잖아. 그럼 거의 100년은 넘었네? 메리라는 사람은 잘 알아?”
“응. 편지로 얘기를 많이 나눴거든. 만나는 건 처음이라서 기대가 돼. 편지로 이야기를 나눠 봤는데 필체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고 정말 교양있는 사람이 분명할 거야.”
아직 전보가 그다지 발달하지는 않은 시대라, 사소한 얘기는 편지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사실 멀리 갈 것도 없이 현대에서도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편지를 애용했으니까.
샤를은 힐끗 제인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마차를 대고 있었는데 옆에 세 대의 마차가 있었다. 그들이 오기 전에 세 명 정도는 먼저 와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오십시오. 저는 이 별장의 관리인 제프리 셋먼입니다.”
맨 처음 맞이한 인물은 깔끔한 연미복을 입고 있는 백발의 노신사였다. 그는 젊었을 적에는 꽤 미남이었을 것 같은 남자로 콧수염을 짧게 길러서 중후한 멋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리카 웹스에요.”
“샤를 헥센입니다.”
“반갑습니다. 초대장을 보여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있어요!”
리카가 초대장을 꺼내 제프리에게 보여주자 그는 유심히 읽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작가 클럽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이 클럽은 다른 클럽들과는 다르게 며칠 동안만 열리는 비정기적인 클럽입니다. 작가분들이 안에 계시니 들어가서 얘기를 나눠보시는 건 어떨까요?”
“고마워요. 셋먼씨.”
“제프리라고 불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능숙하게 접대를 끝낸 제프리는 마차를 대고 있는 제인에게 다가갔다. 그 둘끼리 아마 나눌 얘기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샤를과 리카는 산장으로 걸어갔다. 산장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더 컸다. 어지간한 저택이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 입구 근처에서 그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여자를 발견했다. 하얀색 궐련을 입에 물고 있고 벽에 등을 기대고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염세적인 도시를 벗어나 한숨을 돌리는 여행자 같기도 했다.
그녀는 군청색 테일러드 재킷 사이로 하얀색 셔츠 웨이스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옆쪽 탁자에 편하게 장갑을 벗어둔 채 맛깔스럽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와아! 옷이 멋지세요.”
리카는 특유의 친화력을 이용해 그녀를 지나치지 않고 다가가 물었다. 그녀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잘 차려입은 패션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 편이었다.
“어머, 어서오세요.”
담배를 물고 있던 여성은 싱긋 웃으면서 자세를 고쳐잡고는 입에 있는 담배를 옆에 있는 재떨이에 올려뒀다.
불량한 자세로 있던 모습과는 달리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얼굴은 젊어 보였는데, 갈색 머리카락 사이로 새치가 좀 보였다.
“난 메리 셸리입니다. 당신은요?”
“아! 셸리! 보고 싶었어요. 전 리카 웹스에요.”
“리카? 와아! 이런 아름다운 분일 줄은 몰랐네요. 루크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루크라면 정황상 리카의 아버지 이름인 것 같았다. 둘은 서로 악수를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나서 메리가 고개를 돌려 샤를을 바라보았다.
“이쪽은 남자친구인가요?”
“아, 아니요. 교, 교, 교수님이에요.”
이쯤에서 서로 통성명을 시켜주는 게 예의였는데 메리가 갑작스럽게 가한 기습적인 일격에 리카가 반응을 못 하고 쭈그러들자 샤를이 자기소개를 했다.
“샤를 헥센입니다.”
“아, 미스트위버 대학에서 오셨다는? 제가 실례를 했군요. 전 메리 셸리입니다. 소설가죠. 주로 로맨스를 쓰지만, 추리소설이나 공포소설도 좋아해요.”
“저는 대학에서 고 헤르메스 어를 가르칩니다.”
“어머. 멋진 학자분이시군요.”
메리는 잠깐 손으로 뺨을 가려 보이더니 웃으면서 리카를 곁눈으로 바라보았다. 시선을 따라가 보니 리카가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메리는 음흉한 미소를 짓더니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어서 산장으로 들어와요. 산장 내부에 머물 숙소를 가르쳐줄게요. 다들 일정을 길게 두고 온 거 맞죠?”
“당연하죠! 2박 3일의 여정이라고 들었는걸요.”
샤를은 안으로 따라가면서 내부를 살폈다. 먼저 처음 들어간 곳은 응접실이 보였다. 상당히 컸고 이런저런 가구들이 보인다. 옆에 벽난로가 있었는데 그 주변으로는 커다란 소파가 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