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 샤를은 리카에게 말했다.
“저녁이라도 먹고 갈래? 고서점에서 꽤 시간을 썼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갔다. 리카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말했다.
“저기……. 교수님?”
“왜?”
“오, 오늘은 제가 갑자기 바쁜 일이 생각나서요.”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대신 저번에 제가 말씀드렸던 거 기억나세요?”
“어느 거?”
리카가 했던 말이 꽤 많아야지.
“작가 클럽에 관해서요.”
“아. 그랬었지.”
기억난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이 근처에서 모임을 가진다고 했다. 거기다 따로 장소까지 지정해서 간다고 했다. 대충 들었지만 분명 위치가 메트로폴 밖이었던 걸로 기억했다.
“저도 잘 아시던 분이 초대를 했어서요.”
“초대를 했다고?”
“네. 아는 사람이 있으면 한 명 더 데리고 와도 된다는데 혹시 교수님이 관심이 있으신가 해서요. 피터 스트라우브, 앨런 뷰커스, 솔로 킹, 로렌 필립스같은 작가들이 오거든요.”
작가 이름을 보아하니 하나같이 공포 소설을 작가였다. 샤를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음. 관심은 있긴 한데, 대답을 나중에 해줘도 될까? 스케쥴도 고려해봐야겠고.”
“그, 그럼요.”
리카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일어섰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어떡해!’
원래부터 스킨십을 유도할 생각이 있었는데 이렇게 불시에 손이 닿으니 너무 부끄럽고 창피했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게 멈추지 않아서 위험할 지경이었다. 더 얘기하다간 폭주할 거 같아서 헤어지자고 했는데 괜히 그랬나 싶기도 하고.
리카가 떠나자마자 샤를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플로나. 나와.”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플로나가 걸어 나왔다. 그녀의 눈빛이 무섭다.
“누구에요? 저 여자?”
샤를은 플로나의 머리를 꽁하고 쥐어박았다.
“제자라고 했잖아. 별 사이 아니야.”
“정말요?”
“오늘은 고서점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겠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한 거야. 결국 책도 샀고.”
샤를이 책을 들어 올리자 플로나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연하게도 플로나는 어렸을 적부터 샤를의 영재교육 때문에 혈주찬상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건 이단 신의 주문서가 아니에요?”
“그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자들 몇몇이 이런 보물을 쓸모없는 것들 사이에 끼워뒀거든.”
“그, 그렇구나.”
더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스토킹이 나쁘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허리춤에 걸려 있던 파기나 레코르가 깔깔거렸다.
-여자랑 만나러 간다고 하니까 쟤가 바로 알아채네.
-난 그냥 제자라고 했는데.
-촉이 좋은가 봐.
샤를은 한숨을 쉬면서 플로나에게 말했다.
“플로나, 저녁이라도 먹고 갈래?”
“네에에!”
보니의 마차까지 가서 저녁을 베이하버 항구의 근사한 식당에서 해결했다. 그날 하루는 그렇게 저물었다.
*
요나스 샤프트는 철두철미한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씨앗이 제대로 개화되기 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선택지를 간과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심각한 피해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씨앗이 제대로 개화하기도 전에 자신이 깨어날 줄은 알았지 그 핏물에 익사해서 죽어버리고, 기존의 조각구원회의 신도를 모두 잃게 되는 뼈아픈 실패를 겪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더군다나 성물까지 빼앗긴다? 그간 요나스가 일궜던 모든 기반이 파괴된 상태다.
인형사 하레는 요나스가 고른 인간 중에서도 충성심이 높고 조심성이 뛰어난 인간이었다. 잔인하다는 단점을 빼면 그렇게 떨어지는 것도 없었고.
그래서 그에게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조각구원회의 행방을 맡긴 것이었다. 그런데 하레가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하게 될 줄이야.
‘거기다 나머지 신도들도 너무 무방비하게 당했어.’
요나스는 창고에서 있었던 일을 그의 신, 조각 기계의 힘을 빌려서 머릿속에서 재생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가면을 쓴 남자. 그가 나타나자마자 곧바로 창고 옆의 벽면이 통째로 날아가면서 등장한다.
그리고 무차별적인 공격. 마지막에 하레가 죽어가면서 내렸던 결정도 패착이었다. 샤를이 죽인 조각구원회의 신도보다 하레의 인형들이 죽인 신도들이 더 많다.
‘하레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죽게 만든 것. 그것도 그의 능력이다. 하레의 점술 방벽을 뚫고 그를 간파한 다음, 가장 무방비할 때 기습으로 습격했어. 만약 정면 승부였으면 어떻게 됐을까?’
십중팔구 조각구원회의 승리였다. 요나스는 이 패배를 정보의 부재에서 얻었다. 적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리고 왜 공격하는지, 언제 공격하는지 전부 모르고 있었다.
이걸 알아내는 것이 급선무. 요나스는 몇 번이고 주변의 공간을 재생했다. 요나스가 첫 번째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의 1시간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가, 단서가 될 만한 것을 찾았다.
[마침 보고드릴 일이 있습니다. 저번에 말씀하시던 가면을 쓴 두 남녀에 대해서 말입니다. 저희 신도들이 적들의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무명교단입니다.]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단서는 여기서부터였다. 눈을 뜬 요나스가 시작한 것은 당연하게도 조직의 재정비였다. 그는 윈즈 강이 아주 잘 보이는 카페테리아에서 샐러드를 곁들인 청어 요리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회색 정장을 입은 남자가 요나스에게 다가왔다. 말상의 얼굴에 키가 크다. 그리고 머리를 길러서 꽁무니만 남게끔 뒤로 묶었다.
거의 실눈을 뜨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 남자는 요나스의 앞에 있는 철제 의자에 앉은 뒤에 자신의 장갑을 벗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마스터.”
“잘 왔다. 데이저스트 비드통”
데이저는 자신의 모자도 내려놓고는 편하게 얘기했다.
“마스터.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씨앗을 완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건 내가 극복해야하는 시련 중에 하나에 불과하다. 그다지 상심할 것 없다.”
“역시 대단하시군요, 마스터.”
데이저는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창고쪽은 아주 화려하게 불타올랐더군요. 대체 누가 그런 겁니까?”
“적은 무명 교단이다. 그리고 고위급 예지 능력자가 있는 게 분명해.”
“―예지?!”
놀란 데이저가 생각을 정리할 때까지. 요나스는 청어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다 씹은 뒤에 아직 반이나 남은 청어를 내버려 두고 그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럼 다른 도시의 일은…….”
“그건 작업 중지다. 내가 잘못 생각했어. 메트로폴에 이렇게 강력한 경쟁자들이 많을 줄은 몰랐다. 이곳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한다면 다른 곳에서 어떤 식으로 세력을 넓혀도 소용없어. 전심전력으로 무명 교단을 박살내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만큼의 대가를 감수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제가 무엇을 하면 되겠습니까?”
“자네가 해야 할 일은 근처 마피아들을 정리하는 일이야. 선데이크 거리에서 문데이크 거리에 걸친 마피아 조직들. 놈들을 흡수해야겠어.”
본래 요나스는 마피아를 무시할 생각이었다. 조직의 초기 시작부터 경찰국에게 감시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조각구원회가 망가진 이상 과격한 방식을 사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
미스트위버 대학은 몇몇 세력이 침투해 있었다. 평소에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몇몇 비밀 세계의 세력들이 들어서 있었다.
첫째는 조각구원회의 신도, 두 번째는 암흑성도회, 마지막으로 미스트위버 대학 도서관 비밀장서고 소속의 영성자.
비밀 장서고 사서들은 세력이라고 하기에는 그렇고 아미티지 교수를 비롯해서 몇몇 사람들이 속해있다. 야생의 영성자들의 모임이라고 보면 된다.
샤를이 개입하지 않았으면 드레이크 박사도 스무스하게 이쪽 세력으로 편입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고서적을 분석해 비의를 탐색해 영성을 깨달은 자들이다. 다른 야생의 영성자들과는 성격이 좀 다르다.
이실드너 도서관에 몰려오는 신비학 고서적을 보고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성을 깨우치게 된 것.
샤를이 조각구원회를 습격한 이후 대학 내부의 사역마는 제거되었다. 인물을 특정하기는 쉬웠다.
대학의 도서관 사서 한 명이 바로 조각구원회의 신도였다. 그는 샤를이 습격했던 베이하버 항구에서 당했을 거라고 추정된다.
‘이제 조각구원회의 신도가 사라졌으니 암흑성도회가 날뛰겠네.’
비밀 장서고 사서들은 암흑성도회의 힘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비등하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암흑성도회는 강해진다.
그 첫 번째 신호탄이 바로 칼튼 교수의 차원문이었다. 이제 샤를은 미스트위버 대학에서 암흑성도회의 계략을 막아내야만 한다.
그래서 그간 샤를은 대학 내부에서 여러 인맥을 넓히고 활동할 장치를 만들어뒀다. 그중에서도 드레이크 박사와의 유대는 꽤 중요한 일이었다.
딸랑 딸랑.
므냐시 펍. 여긴 라페르테 거리 30호 근처에 있었다. 미스트 위버의 대학 사람들이 사적으로 모이는 장소는 보통 이곳이었다.
가끔 오면 조교수들이나 대학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는 사무원들을 볼 수 있었다. 묘하게 교수들이 가끔 보이는 탓에 학생들은 잘 오지 않는 장소기도 했다.
이런 펍이라면 보통 공연을 하는 음악가를 두기 마련이지만 신식이라 이건가, 보급되지 얼마 되지 않은 라디오 소리가 입구에서 들려왔다. 낮은 음질의 라디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 소리가 울려 퍼진다.
“드레이크.”
“여어. 이제 오는군?”
맥주병을 한 손에 쥐고 드레이크가 손을 흔들었다. 오늘은 드레이크와 만날 약속이 있었다. 에이브라함 이후, 크래프트라는 존재를 알아낸 뒤 샤를은 곧장 드레이크에게 편지를 썼었다.
거기서 샤를은 크래프트에 관해 조사해달라고 의뢰를 했었는데 드레이크는 흔쾌히 승낙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들으려고 왔다.
드레이크의 옆에는 재즈 음악에 심취한 채 버번을 마시는 라이스 교수가 보였다. 뚱뚱하고 이마는 조금 벗겨졌지만, 안경 속에서 그의 현기가 느껴진다.
“내가 좀 늦었지.”
샤를은 옷을 털었다.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치긴 했는데 옷이 조금 젖었다.
“메트로폴의 날씨는 원래 지랄 맞긴 하지.”
“오랜만이네, 헥센.”
“라이스 자네도.”
샤를과 라이스 교수가 가볍게 인사했다. 친구의 친구와 초면에 만날 때 느끼는 그 어색함. 둘은 안면만 있을 뿐이었지 이렇게 따로 모인 적은 없었다.
사실 둘의 이름은 같은 표기를 쓰고 있지만, 부르는 이름이 달랐다. 드레이크가 담배를 꺼내 들면서 샤를에게 물었다.
“자네도 필 텐가?”
“난 됐어.”
“이거 나만 비흡연자야?”
그렇게 말은 하면서도 드레이크는 성냥을 꺼내서 불을 붙였다. 라이스 교수는 버번을 다 넘기곤 자신의 옆좌석에 뒀던 서류 가방을 꺼내 들었다. 낡은 가죽 서류 가방에서 꽤 많은 종이가나왔다.
“헥센. 자네의 의뢰 말이야.”
“라이스. 아직 저 친구는 술도 안 시켰다고.”
“아 참 그랬지.”
“아냐, 오히려 난 의뢰의 내용을 듣고 싶군. 술이야 지금 시켜도 되니까.”
샤를은 손짓해서 가벼운 위스키를 골랐다. 서빙을 하던 여성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인에게 종종걸음으로 달려간다. 고개를 돌려서 라이스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래. 어때?”
“크래프트는 내가 좀 알고 있어서 쉬웠어.”
“알고 있었다고?”
“요즘 렘 시대 고서적을 탐구하는 중이었거든. 그는 렘 시대의 유명한 천문학자이자 수학자, 문학자, 시인, 법률가, 미술가였어. 그래서 그 유명세 덕에 기록이 꽤 있더군.”
“흐음.”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같은 재능 넘치는 인사라. 계시의 석판 조각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어색하지 않았다.
라이스 교수가 샤를에게 서류들을 넘겼다. 샤를은 페이지를 넘기면서 탐독하는 동안 귀여운 인상의 종업원이 위스키를 두고 약간 멈칫거리다가 갔다.
드레이크가 귀신같이 그 낌새를 알아채고는 음흉하게 웃었다.
“저 종업원, 자네한테 한 눈에 반한 모양인데.”
“응?”
샤를은 서류를 살펴보다가 드레이크를 바라보았다. 드레이크가 손으로 마치 무언가를 움켜쥐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커.”
“관심 없다.”
“매몰차구먼. 관심 없으면 내가 얘기해봐도?”
샤를은 드레이크의 말을 무시로 대답하고 서류로 눈을 돌렸다. 그래도 소득은 크래프트에 관한조사가 거의 없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서류를 다 읽은 것 같자 라이스 교수가 덧붙여 말했다.
“에이브라함 가문처럼 자취를 파악할 수가 없더군. 공식적으로 자손을 낳았다는 흔적이 없어.”
“그렇진 않을 거야.”
크래프트는 계시의 석판 조각을 이어받았다. 자손을 낳지 않으면 그 계시의 석판 조각이 물리 세계에 나타나게 된다. 그럼 어떻게 될까?
계시의 석판 조각을 구하려고 온갖 조직들이 몰려올지도 모른다. 이계에서 괴물 같은 놈들이 강림하거나 제자들끼리 더 많은 석판 조각을 모으려고 혈안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개판이 날 걸 생각하면 현명했던 렘 노인의 제자들은 각자 자손을 보았을 것이 분명했다. 너무 오래되어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았을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