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화 - 소년의 뒤에는 마도서 한 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책이 방정맞게 펄럭이는 게 다급해 보인다.
-쭈이이인!
-야! 쟤 데리고 멀리 떨어지라고 했잖아.
-쟤가 말을 안 듣는걸? 맨 처음에는 잘만 따라오더니 알고 보니까 바이올린 현을 찾으려고 움직이던 거였어!
-뭐?!
모리는 지하실로 내려온 다음 마치 숙련된 바이올리니스트처럼 존재하지도 않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한 다음, 허공에서 괴성을 지르는 크텔레곤에게 악기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미려한 바이올린 현이 울리자마자 크텔레곤은 광란을 벌이는 것을 멈추고 우뚝 서서 모리를 바라보았다. 실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쭈인! 쟤 죽는다아앗!
-아니, 기다려봐.
샤를은 모리를 구하려다가 말고 가만히 멈춰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괴물과 백치. 크텔레곤에게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던 소년은 계속해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조그만 소년이 연주하는 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유려한 연주. 현이 울릴 때마다 청각이 이상해질 것만 같은 착각이 든다.
괴물조차도 멍하게 모리를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선율에 실린 기이한 기분이 크텔레곤을 사로잡은 것 같았다.
이 곡은……. 진혼곡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진혼곡이 울려 퍼지고 기억에 무언가 재생되기 시작했다.
그건 크텔레곤에 대한 에브렌 린덴의 마음이었다. 수십 년도 전의 과거의 기억들이 마치 재생되듯 울려 퍼졌다.
샤를조차도 에브렌이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저질렀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고아원에서 기른 아이들을 자신의 자식으로 삼아 기르는 에브렌 린덴의 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건 단순한 연주가 아니었다. 샤를이 가진 지배의 권능과도 같은 이능력…….
괴물조차 넋을 잃게 만드는 선율. 그 선율에 감탄했지만, 그는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에브렌 린덴의 마음은 알겠으나, 그 방식은 잘못되어 있었다.
샤를은 천천히 걸어갔다. 바이올린의 소리에 완전히 정신이 나간 크텔레곤의 옆으로 걸어간 그는 화염창을 들어서 크텔레곤의 가슴에 박아넣었다.
강력한 불길에 크텔레곤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진혼곡을 듣고 있는 크텔레곤은 저항할 생각도 없는 듯,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다.
죽어가는 크텔레곤과 눈이 마주쳤다. 샤를은 멍하게 그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죽어가는 괴물의 정신이 이어진다.
주변의 모든 풍경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사라지고 바이올린 소리조차 진혼곡이 만든 침묵의 바닷속으로 침전한다.
아기의 내면에 깃든 계시의 석판 조각이 보인다. 샤를의 눈앞에서는 그 계시의 석판 조각이 수천 년 동안 변질되는 모습이 보였다.
처음에는 위대한 물건의 파편이었다. 에이브라함은 그 물건을 현명하게 사용했다. 석판 조각의 힘을 사용해서 아무것도 없는 사막에 물을 끌어당겨 옥토를 만들었고, 이계에서 기어들어 오는 것들을 막았다.
새로운 신비학파를 만들고 주문을 생성했으며 신비가 깃든 물건을 만들기도 했다. 에이브라함이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는 아주 긴 수명을 끝마치고 죽음에 이르렀을 때, 에이브라함의 혈족 누군가에게 석판 조각이 전송되었다.
에이브라함의 혈족은 석판 조각을 그의 선조처럼 완벽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석판 조각의 영롱한 힘은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대한 능력을 얻었다.
에이브라함의 자손은 석판 조각의 힘 때문에 번창했다. 그러나 수천 년이 흐르고 에이브라함의 혈족을 통해서 석판 조각이 계승되면서 점차 그 힘은 변질되어 갔다.
인간의 욕망 때문이었다. 인간의 욕망과 마음이 위대한 물건이었던 석판 조각을 변질시켰고 석판 조각은 결국 무언가 다른 것이 되었다.
“그럼 그 안에서 꺼내줘야겠지.”
샤를은 아기의 눈을 계속 바라보았다. 심상 세계가 서로 이어진다. 마치 우주선이 서로 도킹하듯이 샤를의 심상 세계 한쪽 면이 덜커덩 맞붙었다. 그 순간 샤를은 곧바로 심상 세계로 파고 들어갔다.
반대편 심상 세계를 보자마자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것이 느껴졌다. 이건 부활한 아기의 심상 세계가 아니었다. 에이브라함 혈족들에게 이어져 내려오는 심상 세계였다. 그들이 수천 년간 공유해왔던 심상 세계.
안에는 거대한 물로 가득 차 있었다. 물은 온통 검은색이었고 하늘은 먹구름이 가득 끼어있다. 거센 풍랑이 몰아치며 하늘에서는 번개와 폭우가 쏟아져 내린다.
세계가 섞이기 시작하면서 샤를의 부유석 아래의 가장 밑바닥층에 검은 바다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먹구름이 들어오면서 부유석 근처로 들이닥쳤다. 샤를은 갑자기 거센 바람에 직면하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앞을 보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였으나 샤를은 어떻게든 오벨리스크가 있는 부유석의 귀퉁이를 부여잡고 주변을 살폈다.
고개를 내려 바닷물 아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무언가’ 있는 것 같지만 어째서인지 샤를을 적대하지 않는 것 같다.
실눈을 뜨고 고개를 들자 번개 폭풍 사이에서 떠오른 거대한 석판 조각이 보였다. 석판 조각은 샤를의 것보다 훨씬 컸는데 그곳에 알 수 없는 글자가 수없이 적혀 있었다.
샤를은 그때, 손을 놔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오벨리스크의 부유석을 붙잡고만 있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겁이 나고 멈춰있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해피 엔딩’을 볼 수 없다.
이 세계의 운명 따위가 샤를의 운명을 종지부 찍는 것을 볼 수 없다. 인간 김연수가 아니라 샤를 헥센이라는 이름으로 살게 되면서 이 세계에 거세게 저항하리라고 마음먹었다.
손을 놓고 그곳을 향해 다가가려고 하자 거센 폭우가 샤를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거센 물살 위에서 움직이는 사람처럼 걸어 나간다. 무시무시한 번개가 그를 꿰뚫고 고통을 가했으나 소용없다.
그 세계를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걸어서 도착한 끝에 샤를은 석판 조각에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기어코 석판 조각을 집어 들었다.
석판 조각에서 엄청난 힘이 느껴졌다. 샤를은 그걸 들고 폭풍우를 재차 뚫고 돌아와 오벨리스크의 하단부에 있는 자신의 석판 조각에 가까이 가져갔다.
두 석판 조각이 달라붙으면서 하나가 되기 시작했다. 샤를의 오벨리스크가 거대한 빛을 내뿜는다.
무시무시한 힘이 내면에 들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샤를이 무존자라고 지은 그 힘이 더욱 강대해진다. 그 힘의 충만함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의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폭풍우를 가라앉힐 수는 없어서, 부유석과 분리해냈다. 부유석 일대는 검은 먹구름 위로 올리고 먹구름과 파도는 부유석 일대의 아래로 배열했다.
저 파도와 폭풍을 막으려면 아마 수 없는 시간이 흘러야 할지도 모른다. 저 세계는 에이브라함의 일가가 수천 년 동안 만들어낸 거대한 심상 세계였으니까.
석판을 회수하고나서 샤를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 힘을 사용할 때가 아니었다.
눈을 떠서 심상 세계 밖으로 의식을 부상하자 곧 눈앞에 현실이 나타났다.
-주인! 앞을 봐!
파기나레코르의 목소리가 들리고 샤를은 앞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허공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인간은 인지할 수 없는 공허가 열렸다.
크텔레곤의 몸체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저 안……. 본적이 있다. 이계 상층 어딘가의 ‘공허’였다.
정신에 한 번에 구멍이 뚫려서 공허가 열린 건가. 샤를은 모리를 잡아채서 곧바로 뒤로 잡아당겼다. 열린 공허로 모든 게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근처의 흙더미도, 제단도 제단에 소모되었던 시체들도 한꺼번에 빨려 들어간다. 이윽고 도어 린덴의 사체까지 먹어치운 공허가 닫혔다.
-뭐, 뭐야? 끝난 거야?
그때 사라졌다고 생각되던 공허가 마치 소화할 수 없이 탈이 난 무언가를 내뱉는 것처럼 사자소생의 서 1권과 함께 에메랄드 브로치를 뱉어냈다. 그리고 재차 닫힌다.
-방금 열린 곳은 공허잖아?
-그래.
공허는 모든 이계를 통틀어서 일종의 쓰레기 더미를 보관하는 장소였다. 계시의 석판이 정신에서 추출되면 공허가 열리는 건가……. 아니, 샤를은 다른 가설을 생각했다.
한 번에 계시의 석판을 뽑아내서 그런 거다. 현실에 너무 큰 빈공간이 생기니까 공허가 나타나서 그 나머지 부분을 메운 거라고 하면 말이 된다.
샤를은 게임 속 메인스토리를 전부 꿰차고 있다.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누굴 죽이거나 살리게 된다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도 어느 정도는 예측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시의 석판과 관련된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건 샤를의 계획에서 완전히 벗어난 범주에 있었다.
계시의 석판 조각으로 인해 발생한 일이 나비효과처럼 메인 스토리를 강타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니?”
샤를이 고개를 돌려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던 모리를 바라보았다. 그 소년은 왜인지 모르겠는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샤를은 그걸 보고 이 아이에 대해서 조금 다시 생각해봐야겠다고 판단했다. 단순히 정신적인 부분에 문제가 있다고 희로애락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쩌면 치료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파기나레코르에게 모리를 감시하게 두고 샤를은 주변을 살폈다. 먼저 에메랄드 브로치부터. 샤를은 이 브로치가 뭔지 깨달았다. 에브렌이 갖고 있던 물리적 공격에 대한 보호를 얻게 해주는 유물이다.
‘나중에 심상 세계에서 제대로 파악해봐야겠군.’
그리고 사자소생의 서 1권을 꺼내 들었다. 이 마도서는 보통의 마도서가 아니다. 단순히 소생 주문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라 고 헤르메스 시대의 몇몇 정보들, 그리고 뼈와 시체를 다루는 강령술이 적혀 있었다.
마도서를 덮었다. 마도서에서 올라온 계몽 때문에 머리가 빙빙 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샤를이 컨트롤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사자소생의 서는 3권까지 있다. 권수가 모일수록 어마어마한 능력을 갖게 되는데 그때가 되면 지금 샤를의 능력으로는 컨트롤 할 수 없을 거다.
‘그나저나, 뒷수습은 대체 어떻게 하지?’
멍하게 서 있는 모리를 바라보면서 샤를은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등불 주문을 응용해서 일일이 최면을 거는 수밖에.
*
배를 긁은 더글라스는 메트로폴 타임즈를 읽었다. 실종된 린덴 가문의 내외에 관해서 적혀 있었다.
“여기 기자들도 하이에나나 다름 없구만. 아직 조사가 끝나지도 않은 걸 가지고 벌떼처럼 달려드네. 경찰보다 소식이 더 빨라.”
달걀을 입혀서 프라이팬에 구워낸 프렌치 토스트에 설탕을 잔뜩 뿌린 다음에 우유를 들었다. 여기에 소세지와 구운 버섯과 베이컨을 깃들여서 아침을 먹는다.
메트로폴 타임즈를 읽으면서 그간 조사해온 자료를 끄적거렸다. 베이하버 항구 근처의 창고에서 일어난 사건은 여전히 미제 사건이었다. 조사할만한 단서가 거의 없다. 새벽이라 목격자도 없었고.
순간 그 집시 꼬마애가 생각났으나 더글라스는 신경을 껐다. 이상한 소리만 중얼거리는데 보기만해도 좀 소름 끼친달까. 그는 오컬트와는 전혀 접점도 없는 사람이었다.
“어이 더씨.”
“헨치다.”
혼멜 형사가 손을 흔들면서 지하로 내려왔다. 얼마 전에 친해진 경찰로 더글라스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에 혼멜 형사는 꽤 무능했다.
짜증나는 건 혼멜 형사가 더글라스를 자신과 같은 무능한 동료 경찰로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친한척하는데, 솔직히 속내가 훤히 보이지만 일단 인맥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는 걸 그간의 사회생활을 통해 알고 있으므로 친한 척하는 것뿐이었다.
“여기 도넛 받으셔.”
“뭔 일이야?”
도넛을 받으면서 더글라스가 묻자 혼멜이 말했다.
“전령. 청장님이 말하는데 이번 사건에 관해서는 네가 필요하다던데.”
“왜?”
“실종된 거 말이야. 단순히 린덴 가문의 내외 뿐만 아니라 린덴 가족의 자식들 전부가 실종 된 것 같아.”
“음?”
“대충 듣기로는 말이야, 보통 방법으로 사라진 게 아닌 것 같데. 린덴 가문의 저택을 뒤져보니 오컬트에 관련된 서적도 많이 나왔고 말이야.”
더글라스는 인상을 찡그렸다.
“뭐야, 자식들이 사라져? 그럼 그네 일가족이 뭔가의 제물로라도 바쳐졌대?”
“그거야 난 모르지. 아무튼 열심히 해보라고 오컬트 범죄 수사본부 부장님.”
사람은 나 혼자인데 부장은 지랄. 혼멜이 떠나가는 걸 보고 더글라스는 또 귀찮은 일에 휘말렸다는 것을 납득해야만 했다. 자신의 아침에다가 도넛까지 전부 먹어치운 더글라스는 무거운 몸뚱이를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