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30화 (30/221)

제30화 -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5대 교단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4대 교단이라고 불러야 했다. 샤를이 초인적인 능력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5대 교단이라고 불리지도 않을 것이었다. 무존자는 존재가 없는 신이었으니까.

4대 악신을 믿는 다른 사이비 교단에는 각자 하나씩 성물이 있다. 모두 각자 그들의 신이 내려준 물건으로 신비학에서 중요시하는 네 가지의 물건이었다.

‘컵, 지팡이, 검, 메달.’

그중 조각구원회는 컵을 상징화한 성물을 갖고 있었다. 남은 교단에는 다른 나머지 성물들이 보관되어 있을 것이다.

어제 성물을 가져온 뒤에 미리 함에 넣어서 보관해뒀다.

성물이 보관된 함을 열자 기이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환각이 느껴졌다. 사실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데도.

맨정신으로 이 성물을 바라보게 된다면 미쳐버리게 되고 이걸 직접 만지면 조각구원회가 믿고 있는 사악한 신, 조각 기계의 영향력에 들어가 버리기 때문에 직접 만질 수는 없다.

하지만 계몽이 높아진 지금, 조각 기계의 영향력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계몽 수치 때문에 마도사들 사이에서는 경지의 상승과 광기는 직접적으로 연관될 수밖에 없었다.

찬찬히 이 성물을 살핀다.

성배 전체에 걸쳐 화려한 장식이 음각으로 파여있다. 재질은 은이 분명하다. 아주 오랫동안 축성되었고 현실의 물건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

성배의 끝부분에는 조그맣게 구멍이 뚫려 있는 부분이 많다. 이곳을 통해 혈관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것이 조각구원회의 교주, 요나스 샤프트의 몸에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는데 중앙에 있는 절반으로 쪼개진 하트 모양 형태의 보석은 요사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왼쪽의 루비는 ‘조각’을, 오른쪽의 사파이어는 ‘기계’를 상징한다. 샤를은 이 보석을 뚫어지게 살폈다. 너무도 아름다워서 누구든 이 보석들의 형태를 보면 빠지지 않고 배기지 못할 것이다.

조각 기계는 문명과 예술을 좋아하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 파괴와 창조는 같은 것이었기 때문에 조각 기계를 따르다간 모든 것이 조각당하는 멸망의 엔딩을 맞게 된다.

샤를은 그것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음. 나는 소리가 없는 노래요, 형태가 없는 춤일지니.”

위대한 하늘의 선물을 받은 자여! 진실된 우정을 얻은 자여! 여성의 따뜻한 사랑을 얻은 자여! 다 함께 모여 환희의 노래를 부르자! 그렇다.비록하나의마음이라도땅위에그를가진사람들은다!그러나그조차가지지못한자는눈물을흘리며조용히떠나가리라.

-쭈인! 또 눈이 반쯤 맛이 갔는데.

파기나레코르의 말에 샤를은 번쩍 눈을 떴다. 방금 머릿속에서 찬송가를 들었다. 어느새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이건 정신오염이었다. 계몽이 높아지는 것과는 별개로 사악한 신에게 정신이 침범당하는 것. 두 개의 보석을 보고 사악한 신의 일면을 보았을 뿐인데 이런 위험함이라니.

-고맙다.

-고마우면 슬슬 달란트 좀……. 이제 배고파.

-고려해볼게.

파기나레코르는 주기적으로 달란트를 습득하지 않으면 허기에 질리게 된다. 이제 슬슬 새로운 주문도 얻어야 하니 달란트를 줄 때도 됐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걸 체크해야 한다.

어쨌든 성물을 분석하면서 파기나레코르에게 의존할 수는 없기에 샤를은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왼손 아래에 바늘을 올려놨다. 혹시라도 정신을 잃으면 바늘이 찔러서 고통으로 그를 깨울 것이다.

샤를은 그간 경험을 통해서 지배의 권능이 이 유물에는 씨알도 통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물을 약화시키는 것처럼 같은 방식으로 이 유물에 깃든 조각 기계의 영향력을 제거해야만 한다.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광명자의 성수. 아직까지도 주신의 좌(座)를 차지하고 있는 광명자는 모든 사악한 신들의 카운터나 다름없었다. 광명자의 성수 말고 다른 방법도 있었다.

조각 기계는 문명과 발전을 상징한다. 반대 속성, 야만과 퇴화의 속성을 가진 혈주찬상의 성물을 붙여두면 서로의 힘을 내뿜다가 자멸하게 된다. 헬파이어 클럽의 신인 혈주찬상은 당장은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첫 번째 안이 채택되었다.

샤를은 습격하기 전부터 미리 준비를 해두고 있었다. 혹시 몰라서 광명자의 성수를 대량으로 구매해 둔 것. 광명 교단에 가서 구한 것은 아니고 경매장에서 나온 순수한 광명자의 성수를 구매해둔 게 지금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추가로. 아라네아의 심장을 살폈다. 샤를은 계몽 수치가 낮을 때와 다르게 아라네아의 심장이 더욱 아름답게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라네아의 심장은 계몽 수치가 높을 때 바라본다면 보석이 너무 투명해서 안쪽이 전부 보일 지경이었다.

영성을 부여하자 아라네아의 심장 안쪽에 있던 기이한 조직 세포가 움직이더니 실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실을 뿜어내자 세포가 쪼그라든다. 그리고 천천히 회복하는 것 같다.

“이런 원리였군.”

나중에 생명력을 돋굴 수 있는 특수한 포션 같은 것을 구하게 된다면 아라네아의 심장에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샤를은 뿜어낸 실을 다시 들어서 정리해뒀다. 실의 분량을 보니, 상의 한 벌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이런 신비스러운 물건을 평범한 모직기에 넣어서 옷을 짠다는 건 낭비였다.

비밀 세계의 재단사를 찾아가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연금술사가 있었던 즈카펠 클럽에 가입해야 하긴 한다는 것 같은데.’

저번에 점괘가 안 좋아서 가기가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다만. 인형사를 해치웠으니까 그 부분은 무시해도 될 것 같다.

* * *

샤를은 경매장에 들린 뒤에 재료를 구하고 곧장 귀환했다.

그의 비밀 서재는 꽤 완벽했다. 단순히 비밀 공간이라는 사실 이외에도 화학 실험을 통해 매캐한 독연이 발생할 때 그걸 걸러내 줄 환기장치를 따로 만들어뒀다.

독한 재료를 플라스크에 넣고 중탕하거나 혼합하는 등의 화학 과정을 끝낸 이후에 샤를은 계몽 중화제를 만들어냈다. 부글부글 끓는 유백색의 액체.

보기만 해도 역겨워 보이는데, 샤를은 무시하고 그걸 꿀꺽 삼켰다. 머리가 띵해지면서 액체가 기화하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졌다.

샤를의 코에서 검은색 타르같은 것이 형성되더니 그대로 앞으로 뿜어졌다. 기괴한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일이었지만 그는 침착하게 비커를 들어서 타르를 받아냈다.

계몽 중화제의 효과는 혼돈을 신체에서 걸러내는 것에 있었다. 다만 임시조치로, 광기 어린 것과 더 마주치게 된다면 이 수치는 급격하게 원래 수치를 되찾는다.

보니까 계몽이 3까지 떨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원상 복구였다.

“그 역겨운 고양이 같은 거 드디어 안 봐도 되겠네.”

생각하고 있던 걸 소리 내어 말할 정도로 샤를은 기분이 좋아진 상태였다.

환각이나 환청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양이나 기괴한 환상 같은 것들도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샤를은 떨어진 비커의 타르들을 바라봤다.

이것의 이름은 ‘꿈 조각’. 처음엔 액체였다가 금세 단단하게 굳는다.

저 꿈 조각들도 신비학에서는 충분히 재료로 쓰기 때문에 샤를은 비커의 덮개를 닫았다. 자신의 몸뚱이에서 나온 걸 쓰기는 좀 그렇긴 한데 어쩔 수 없다.

-저 뭉텅거리는 검은 것에서 익숙한 느낌이 나.

-저게 달란트의 재료거든.

-달란트?

-그래. 이제 약속을 지킬 때가 되었지.

샤를은 동 달란트를 여러 개 꺼냈다. 생각 외로 살 게 없어서 중화제 재료 정도만 구매했기 때문에 돈이 좀 남았다.

그걸 받아든 파기나레코르가 냠냠거리면서 달란트를 먹기 시작했다.

-새삼 그렇게 먹는 걸 보니 쿠키를 먹는 것처럼 먹냐.

-냠냠. 쩝쩝. 꺼억.

-…….

너에게 갖고 있던 환상이 깨지고 있어. 그만둬 파기.

-음. 새 토큰이야.

파기나레코르는 달란트를 먹은 다음에 새로운 토큰을 꺼냈다. 어느새 파기나레코르의 모습은 조금 더 자라 있어서 손바닥보다 큰 정도가 되었다. 토큰을 받아들자 또 기묘한 슬롯 머신이 등장했고 샤를은 또다시 동전을 넣었다.

“아, 제발. 광명자는 안나오게 해주세요.”

그 순간 가장 첫 번째로 광명자 문양이 드러났다.

-응 어림도 없지.

-야 이거 사기지? 어!?

파기나레코르의 멱살을 잡아챌까 하는데 이미 슈웅 날아서 도망쳐버렸다. 하긴 작아서 멱살이 잡히지도 않는다.

-그냥 받아들이면 편해.

두 번째 문양은 기이한 화로 문양이었다. 이건 중립신 ‘오색 망치’의 표식이다. 그리고 세 번째로 또 모르는 문양이 나타났다. 이 조합을 봐서는 대충 무슨 주문이 나올지 알 것 같았다.

일종의 창조 주문이 아닐까 싶었는데 비슷한 것 같다.

떨어진 주문서를 꺼내 들자 정보가 뜬다.

[■■■의 화로]

[거대한 불길을 가둘 수 있는 가상의 화로를 형성한다. 이 화로의 형태는 고정적이지 않으며 어떤 형태도 될 수 있고 또 다른 위상에 겹쳐있을 수 있다. 시전하는 데 매우 긴 시간이 걸리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다. 이곳에서 형체가 없는 것을 가공하거나 형성할 수 있다.]

-이 주문은 제작자용이잖아!

본디 이건 광명자의 화로 주문이었다. 이걸 통해 가공하기 어려운 특수 금속들을 가공하거나 재료를 이용해서 폭탄을 만들기도 했다.

위상을 겹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상당히 많은 특이한 방법으로 공격이나 방어에 사용되곤 하는데 제대로 된 공격용 주문과 비교하면 그렇게까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샤를은 한숨을 쉬면서 무존자의 이름을 새겼다. 그러자 엄청난 힘이 심상 세계로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역시 이름을 새길 때마다 굉장하다.

하지만 불안한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랜덤이라고 하면서 계속 광명자와 연계된 주문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이 확률을 보면 아마도 다음 주문도 광명자의 주문일 것 같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튀어나왔다.

전생에 광명자와 척을 진 적도 없었는데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게임 상에서 샤를로 플레이할 때도 이렇게 광명자의 주문만 미친 듯이 나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샤를은 애꿎은 파기나레코르에게 화를 내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화내봐야 소용 없으니까.

-아 주인. 그리고 나 한가지 기능이 더 생겼어.

-뭔데?

-이제 다른 사람들의 인식에서 벗어날 수 있어.

-괜찮네.

인식 저하 기능은 파기나레코르에게 달란트를 계속 먹이다 보면 생기는 능력이었다. 특별한 마법을 익히고 있거나 유물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인식 저하를 꿰뚫어 볼 테지만 웬만한 영성자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의 강한 인식 저하 능력이었다.

똑똑.

서재 문을 누군가 두들겼다. 비밀 서재에서도 들릴 수 있게끔 미리 이전의 샤를이 조치해뒀으므로 샤를은 그 소리를 듣고 서재로 올라가서 말했다.

“무슨 일이지?”

제이큰이 들어오면서 말했다.

“주인님. 드레이크 박사님께서 오셨습니다.”

“아, 서재로 안내하게.”

에이브라함의 소재를 파악해달라고 요청했었는데 마침 밝혀진 모양이었다. 샤를은 오래간만에 응접실에서 드레이크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드레이크는 왜인지 모르겠는데 예전보다 조금 더 살이 빠진 것 같은 모양이었다. 눈도 퀭했고 평소 관리하던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해졌다.

-쟤……. 누구?

-드레이크…. 인 것 같긴 한데.

샤를은 드레이크와 헤어진 날짜가 그리 오래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는 다른 삶을 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드레이크?”

“나도 알아. 내 모습이 꼴사나운 걸 말이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한 달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드레이크 박사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의문에 대답하는 것보다 그가 먼저 무언가를 꺼내서 건넸다. 보고서가 들어갈 서류첩이었다.

“먼저……. 여기 자료를 받아.”

샤를은 서류첩을 열고 좀 놀랐다. 그가 구한 자료는 겨우 종이 몇 장짜리의 보고서였다. 그가 조사한 기간에 비교해서 턱없이 적은 양의 정보였다.

“몇몇 정보는 물리적인 자료를 구할 수 없었어. 하지만 처음부터 설명하도록 하지.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혹은 그 가문에 대한 정보를 말이야. 럼 있나?”

샤를은 제이큰을 시켜서 술을 꺼내오게 했다. 드레이크는 럼이 든 유리잔을 들어서 벌컥벌컥 마시더니 술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목을 조이는 넥타이를 잡아당겨서 헐겁게 풀고는 의자로 푹 늘어졌다.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다가 추적을 벗어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