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9화 - “왜? 치료하려는데.”
“제 몸……. 어떻게 됐는지 아시잖아요.”
샤를은 의문을 표하지는 않고 그냥 말없이 플로나를 끌어당긴 다음에 소매를 걷어 올렸다. 플로나의 부러진 팔의 피부는 마치 비늘이 올라오는 것처럼 톡톡 돋아 있었다.
샤를은 이게 플로나의 ‘비상식적인 힘’의 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계에 있는 생물과 거래를 해서 신체를 변형시킨 것.
그러고보니 샤를은 플로나의 스탯창을 확인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심상세계에서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상처를 만졌다.
평소에는 발현되지 않던 모습이 긴급한 전투로 인해 즉각적으로 변한 것. 플로나는 부끄러워하면서 얼굴이 빨개진 채 샤를의 손을 밀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라.”
“부, 부상은 금방 낫는데…….”
샤를은 부상 부위를 살펴봤다. 비늘이 갈려 나간 듯 깨져 있었고 그 위로 시뻘겋게 변한 피부가 보였다. 샤를은 비밀 서재에서 준비해뒀던 상비 연고를 꺼냈다.
호랑이의 연골과 인어의 아가미를 베이스로 한 상비약으로 외상에는 탁월한 물건이었다. 경매장에 들렀을 때 모아둔 재료로 조악하게나마 포션 비슷한 흉내를 내봤다.
샤를의 손길을 느끼면서 플로나는 완전히 새빨갛게 타버린 모습이 되었다. 평소에는 무감정해보이는 데 이런 것을 보면 또 감정이 풍부해 보인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빠, 빨리 샤워하러 가세요.”
플로나는 피범벅인 샤를이 씻도록 얼른 그를 밀어 세웠다. 아침이 되어 저택 내부가 분주해지자 그는 곧 샤워하러 들어갔다.
플로나는 옷가지들을 가져오면서 샤를이 샤워하고 있는 곳을 바라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샤를님이 위험해지는 건 이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교단 사람들은 자신을 조금 더 지킬 힘을 길러야 해. 내가 없더라도 괜찮게 말이야.’
플로나는 샤를에게 교단 사람들의 힘을 기를 방법 건의해보기로 했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교단을 지킬 중요 인력은 무력을 갖고 있을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속 한구석에는 차라리 이 모든 교단을 전부 버리더라도 샤를과 홀로 남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인간이 죽게 되면 샤를은 플로나만을 봐줬을 텐데…….
기묘한 망상이 떠오르는데 샤워기 소리가 플로나의 귀를 때리자 곧 망상은 사라졌다. 그녀의 광기는 아직 심연 깊은 곳에서 잠들어있었다.
* * *
칼튼 교수는 아침부터 와인을 땄다. 외국산 산지오베제로 만든 와인. 그가 아끼고 아껴뒀던 오래된 와인이었다.
“역시 와인하면 이탈리 왕국이죠. 안 그렇습니까?”
“하하. 메트로폴 와인도 나쁘지는 않답니다.”
이런 고급 와인을, 그것도 아침부터 따는 이유는 중요한 손님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의 앞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매우 젊어 보였으며 이국적인 피부를 갖고 있었다. 이마에 찍인 계인 하나가 그의 절대적인 미모를 돋보였다. 누가 봐도 청년이라고 할 것 같은 이 남자는 이제 40대였다.
제롬 모슌, 유명한 외과의사이면서 암흑성도회의 고위 계파, ‘샴발라’의 일원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를 암흑성도회로 끌어들인 남자이기도 했다.
이 새벽같이 찾아온 손님에게 맨 처음에 그는 화를 낼 뻔했지만, 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겸허히 받아들였다.
“1890? 이 귀한 빈티지의 와인을 꺼내 드시다니, 이거 감사하군요.”
“자, 어서 드시죠.”
둘은 상당한 애주가이기도 했다. 가끔 만나면 와인잔을 꺼내서 서로 얘기하면서 와인 자체를 즐기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제롬은 레드와인을 입에 한 모금 머금으면서 말했다.
“과일 맛이 탄탄하군요.”
“미네랄 느낌이 그 위에 흐르면서 균형 잡힌 산미 또한 훌륭한데 탄닌은 묵직하지만 우아한 느낌이 들지요.”
“아주 좋은 와인이로군요.”
제롬은 즐거운 표정으로 와인을 넘겼다. 생과 사. 즐거움과 고통. 그리고 절망과 쾌락을 알기에 그는 진심으로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남자였다.
그렇게 한참 와인에 대해 떠들다가 칼튼 교수가 물었다.
“저번에 마도서를 한 권 잃어버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아라네아의 서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대학 내에서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 사역마가 보내온 보고에 의하면 누군가 그 아라네아의 서를 사용해서 이계에서 아라크네를 소환했던 것 같군요. 드레이크 박사가 산탄총으로 아라크네들을 죽여버린 것 같습니다. 그 뒤 아라네아의 서의 행방은 불명이 되었습니다.”
“아라네아의 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건 일부러 그런 겁니다.”
“예?”
“아라네아의 서를 한 남자에게 건넸습니다. 스스로의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해내지 못했더군요.”
칼튼 교수는 살짝 기분이 상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어도 미스트위버 대학은 제 영역이라고 생각했는데요.”
“당신을 못 믿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내 호기심 때문에 그렇습니다. 남들에게 고통받던 소년이 스스로를 극복하는 과정이 있기를 바랐지만 역시 되어야할 것은 될 수밖에 없더군요.”
조용히 와인을 음미한 제롬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칼튼 교수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의 시선을 받자마자 기이한 느낌과 함께 섬뜩함도 동시에 느꼈다.
이 평범해 보이는 남자가 그간 저질러온 일들에 관해서 알고 있는 칼튼 교수는 언제 기분이 상했냐는 표정을 지었는지 모를 정도로 공손한 말투로 화제를 돌렸다. 더 자극할 필요는 없으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십니까? 이른 아침에 방문하시다뇨.”
“아, 참. 이야기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군요. 어젯밤, 조각구원회가 괴멸되었습니다.”
“……괴, 멸?”
“예. 괴멸입니다. 소수의 생존자들이 있지만 유의미한 세력을 형성하지는 못할 겁니다. 저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알았습니다. 무명교단이라는 곳에서 그들을 괴멸시켰다고 하더군요. 메트로폴 타임지에서는 도시 사람들의 대량실종이라는 이름으로 나갔을 겁니다.”
일상생활을 꾸려나가던 조각구원회 신도들이 전부 죽었으니까요, 그렇게 제롬이 덧붙였다.
아직 오늘자 신문을 보지 못한 칼튼 교수는 대량실종이라는 말에 대체 얼마나 많은 조각구원회의 신도들이 죽었을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얼핏 예상이 들지 않는다.
그들의 방비는 상당했을 터였다. 군대라도 끌고 가서 포격을 가하지 않는 이상 조각구원회의 근거지가 파괴될 일은 없을 것 같은데. 군대를 끌고 간다면 그 전에 미리 알아챌 테고.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들에게는 대량의 인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래도 ‘괜찮은’ 타이밍에 운이 좋게 습격한 모양이더군요. 자세한 것은 알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자도 점술에 대해 강한 방비를 하고 있더군요. 모든 점괘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무명교단이라는 곳은 대단한 곳인 것 같군요.”
제롬은 희미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글쎄요. 그건 물거품이나 잔상 같은 겁니다. 무명교단의 교주가 사실 중요한 인물이지요.”
“그렇습니까? 대체 그가 모시고 있는 신이 무엇이길래 그렇습니까?”
“신? 후후. 자신이 만들어낸 신을 모시고 있더군요. 그들 말로는 무존자(無尊子)라고 하던데요. 교리를 읽어보니 재미있더군요. 그들의 집회에 왠지 참가하고 싶어집니다.”
제롬은 흘흘 웃었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는 칼튼 교수를 기이한 눈동자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방해하던 조각구원회가 사라졌으니 차원문을 여는 일에 집중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아! 드디어 때가 되었군요! 본거지가 당하면서 대학 도서관에 숨어져 있던 그들의 스파이도 죽었을 테니.”
“네, 여태까지 조각구원회가 방해하지만 않았으면 충분히 할 수 있었던 일이지요. 도서관의 비밀 장서고 직원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생각보다 일은 쉬울 겁니다.”
칼튼은 환호했다. 그가 메트로폴 지하를 돌아다니면서 느꼈던 건 진정한 이계를 맛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층은 이 정도인데 대체 그 이상은 어떤 공간인 것일까?
“자원은 계속해서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수 있도록 해보겠습니다.”
* * *
샤를은 한참이나 잠들어있었다. 샤워를 끝마치고 나자 짙은 안도감과 피곤함이 그를 벼랑 끝까지 내몰았고 잠깐 침대에 앉아서 플로나와 대화를 하는 도중에 그대로 끔뻑 잠들고 말았다.
“헉!”
깜짝 놀라 샤를이 눈을 뜨자 여태 계속 그를 바라보고 있던 플로나가 다가와 말했다.
“괜찮으세요!?”
“아, 괜찮다.”
꿈속에서 악몽을 꾼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샤를은 자신의 영성이 일부러 꿈을 거부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주 위험한 꿈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얼핏 보니 플로나의 팔은 전부 나아있었고 피부도 원래의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연고의 효과인지 아니면 그녀가 계약한 이계의 존재가 특별한 건지 상처는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때 띵한 느낌과 함께 주변의 풍경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플로나의 모습에 기이한 것이 겹쳐서 보인다. 샤를은 그 광경을 보고도 내색하지 않았다. 플로나가 샤를에게 물었다.
“배고프지 않으세요? 뭔가 가져올까요.”
“그래.”
플로나가 나가자마자 상태창을 연 샤를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제5교단 무명 교단의 교주】
【샤를 헥센】
[스탯]
[신체 5, 정신 7, 행운 6, 계몽 7]
[특성]
[카리스마, 경전 연구가, 냉정함, 비신지체 , ???]
[보유 기술]
〔지배의 권능〕 - 이계에 상주하고 있던 마도사 헤르메스와 거래해 얻어낸 권능. 생물, 무생물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배’할 수 있다. 정신 스탯에 비례해 최대 지배 개수가 증가한다.
▶현재 지배중인 개체 2
“아오. 계몽이 7점이잖아.”
격렬한 전투 덕분인지 몇몇 스탯이 증가해 있었다. 제일 큰 변화는 계몽의 증가였다. 파기나레코르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왜, 왜? 헛것이라도 보여?
-그래. 지금 정상이 아니야.
조금 전에도 플로나의 눈구멍이 사라지고 그곳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것 같은 환각이 보였었다. 지금 샤를의 눈앞에도 환각이 생겨나고 있었다.
-무야호! 무야호! 무야호!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20개의 다리가 달린 고양이가 샤를의 방을 지네처럼 기어다니고 있었는데 벽면을 타고 올라가고 있다.
‘싀벌.’
계몽이 증가 되었을 때의 부작용이었다.
이럴 땐 여러 가지 대응법이 있다. 하나는 이대로 계몽을 유지하고 이계에 있는 ‘계몽 상점’에 들러서 계몽 수치를 대가로 지불하고 물건을 구매하는 것.
또 하나는 그냥 이대로 유지하기.
계몽이 높으면 마법 능력이 치솟고 주문서가 없어도 주문을 기억할 수 있으므로 마도사들은 항상 이렇게 계몽 수치를 높이고 싶어 했지만 지금 샤를에게는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당장 계몽 상점에 들르기에는 시간이 없었으니 샤를은 또 다른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무시무시한 겜창이었던 샤를의 뇌에는 계몽 중화제의 제작법이 들어있었다.
‘궐련 조각, 눈이 세 개 달린 문어의 뇌, 여섯 빛깔의 털을 가진 몽구스 간…….’
그 외 재료들을 떠올리자 한 번쯤 오라클 경매장에 들려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당장은 아니었다.
계몽의 증가는 단순히 페널티만 있는 게 아니었다. 계몽이 높아지면 이계의 것들에 더욱 친숙해지게 되니까. 계몽이 높아진 지금, 조각구원회의 성물을 분석하기 딱 좋았으니 좀 참아보기로 했다.
근데 문제가 있다.
-무야호! 무야호! 무야호!
-오우! 좀 치는 놈인가!? 나도 질 수 없지!
20개의 다리가 달린 고양이 앞에 테크노 드워프가 나타나서 갑자기 브레이크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또 그 옆에 벌크업 된 근육을 가진 파란색 피부의 남성이 드라군 자세를 취하더니 외쳤다.
-아 X스! X스!
‘싀벌’
이 기이한 환각들은 샤를이 현대에 있을 때 흔히 보던 ‘혐짤’이나 ‘강한 인상을 주는 밈’ 같은 것에서 파생된 것들이었다.
그것들이 생겨났다 사라지곤 한다. 샤를은 자신이 조각구원회의 성물을 연구하는 요 며칠 동안 이어질 이 혼돈을 버틸 수 있을지 두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