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화 - 위장용 회사겠지만 직접적인 소득과 실적도 있는 회사여야 했다. 그러다가 샤를은 자신이 가진 포도밭에 생각이 미쳤다.
“포도밭이 엄청 컸었지.”
메트로폴 교외에 대농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엄청난 크기의 땅, 그걸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포도밭을 이용해 회사를 만들어보자. 와인 회사가 좋겠지. 와인 회사를 이용해서 따로 주머니를 차야겠어.”
샤를은 와인에 관해서 알지 못했고 또 대학을 다니면서 회사를 운영하기는 어려웠으므로 전문 경영인이 필요했다. 생각이 제이큰에게 미친다.
그는 샤를의 집사였으며 포도농장을 경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이큰은 와인까지 맡기에는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사람 몸뚱이는 하나고 여력이 부족할 테니.
서재 벽에 걸려 있는 종을 흔들어 제이큰을 부르니 잠시 뒤에 집사가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제이큰. 내 계획을 좀 들어봤으면 하는데 말이야.”
샤를은 여태까지 자신이 생각했던 계획을 들려줬다. 자금 세탁용으로 회사를 세운다는 말은 하지 않았고 포도농장을 확장하기 위해 와이너리를 만들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물었다.
“와이너리 말씀이십니까? 흠. 그거라면 생각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오? 그 사람이 누군데?”
“베르나르도 프로벤짜노라는 남자입니다. 평판이 좀 나쁘지만 실력은 괜찮다고 소문이 나있습니다.”
“이름만 들어선 외국인 같은데.”
“예, 맞습니다. 기회가 되면 주인님과의 만남을 주선해볼까요?”
“그렇게 하지.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네.”
제이큰이 다음 주에 약속을 잡겠다고 하자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동안은 해야 할 일이 있긴 했다. 바로 교단에 관한 일이었다.
* * *
샤를은 그간 꾸준히 집회를 열었다. 나가서 그냥 이리저리 떠들거나 혹은 분쟁을 조정해오면서 ‘체질개선’에 힘을 써왔다. 그 결과, 이제는 평범한 교회로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낮아졌다. 심지어 여태까지 받아오던 봉헌금도 받지 않았다.
돈은 샤를의 사재를 털어서 썼다. 그간 써오던 기괴한 로브나 가면 따위는 집어 던졌다.
그간 집회를 해오면서 샤를은 어려움을 하나 느꼈는데 집회를 그가 계속 주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는 점이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그는 그를 대신해서 신도들을 다뤄줄 두 번째 제자가 필요했다.
플로나는 주도적으로 나서는 것보다 보조하는 것이 훨씬 더 잘 어울렸다. 어느 정도 신도들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그들 내부로 깊게 침투하지는 못한다.
그러니 또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그렇게 선택된 것이 오늘의 집회, ‘세례’식이었다. 세례의 대상은 샤를의 심상세계에서 봤었던 에세나를 선택했다.
그간 관찰해온 결과 나이 많은 중년인들보다 그녀가 더 강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집회장소에 들어서자 오늘은 더욱 웅성거리는 소리가 컸다. 세례식을 미리 예고했던 탓이다.
“과연 누가 세례를 받게 될까?”
“글쎄.”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부러워. 나도 무존자님의 세례를 받고 싶어.”
플로나가 준비된 의장을 입고 나서자 웅성거리던 신도들은 곧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뒤로 샤를이 나타났다.
그는 평소에 입던 예복이 아니라 훨씬 더 화려한 예복을 입었고 손에는 차가운 포도주가 담긴 황동잔을 들고 나섰다.
“이제부터 세례식을 거행하겠다.”
여기서 세례란 무존자의 등불 마법을 이용해 계몽치를 올리는 일이었다. 샤를은 앞으로 한 사람을 나오게 시켰다. 어제 미리 얘기를 해뒀으니 마음의 준비는 끝났을 것이다.
“나오거라. 에세나 플라크.”
“에세나? 에세나가?”
“에세나가 세례를 받는다. 그분의 두 번째 제자가 되는 거야.”
“가, 감동적이야 우리 딸이!”
사람들은 깜짝 놀라면서 중앙의 빈 공간을 통해 걸어 나오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에세나는 문데이크 거리의 빵집 주인, 플라크 부부의 딸이었다.
에세나는 이제 열일곱이었고 중학교까지는 다니다가 자퇴하고 부모님의 빵집을 돕고 있었다.
그녀는 푸른 눈빛을 갖고 있었고 머리카락은 짙은 주황색이었다. 주근깨가 좀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나면 근사하게 예쁜 여인이 될 것이었다.
여태 독실하게 무존자의 교리를 믿어왔으므로 샤를은 그녀를 더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똘똘한 표정의 소녀는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 채 단상 위로 올라와 섰다. 두려움은 전혀 없어 보였다. 플라크 부부도 오히려 잘됐다는 듯 화색을 짓고 있었고.
하지만 아직도 게임 속과 현실의 괴리 때문에 갈팡질팡하는 샤를의 마음에서 파문이 일어나곤 했다.
‘하아. 내가 정말로 잘하고 있는 건가?’
샤를은 잠시 회의 섞인 생각을 했지만, 교단을 키우는 것은 필요불가결이었다. 비밀 세계에 영향력을 높이려면 사람의 수를 늘려야만 했다.
그래야 심상 세계의 힘도 커지고 신의 힘도 흡수할 수 있을 터였다. 가장 필요한 것이 이능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샤를의 등불 주문으로 인해 손끝이 빛나자 신도들의 탄성이 이어졌다.
“아아――! 아름다운 빛이야.”
“저것이 세례의 빛.”
“사람이 어찌 빛을 만든단 말인가? 놀랍구나!”
신도들이 놀라운 듯 바라보고 있었고 샤를의 손이 에세나의 이마에 닿았다. 빛이 옮겨가듯 그녀의 이마에 스며들었다.
샤를은 에세나가 잠시 침묵과 명상 상태에 빠진 것을 알았다. 쉽사리 깨어나지 않을 것 같아 보여 그 틈을 타 샤를은 에세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얼마 전에 안 사실인데 제자의 상태창은 심상 세계에 있지 않더라도 마음만 먹는다면 샤를의 스탯창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제5교단 무명 교단의 신도】
【에세나 플라크】
[스탯]
[신체 1, 정신 4->5, 행운 1, 계몽 2]
[특성]
[정신 조종자, 심리주의자, 뛰어난 감각]
〔심리의 씨앗〕 - 사람들의 마음속에 담긴 분쟁거리를 끄집어내거나 마음속에 감정을 격발할 씨앗을 심어둘 수 있다. 이렇게 심어둔 씨앗은 필요한 때 격발시킬 수 있으며 감정을 격화시키거나 가라앉히게 할 수 있다.
역시 샤를의 예상대로 에세나의 계몽수치가 증가하면서 영성의 힘이 깨어났다. 계몽은 너무 오르면 미쳐버거나 괴물로 변하게 되지만 감당 가능한 수준으로 오른다면 이렇게 더욱 강력한 영적인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에세나는 눈을 뜨자마자 희미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에세나의 영성은 아직 확연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성향을 보아할 때 마도사 쪽으로 가거나 탐구자 쪽으로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플로나처럼 물리적으로 강력한 능력은 없지만 정신을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이것도 근대적인 도시에서는 굉장한 힘이 될 터.
“넌 이제 내 두 번째 제자다. 이제부터 내게 와서 영혼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배우게 된단다.”
“네 능력에 대해 알겠느냐?”
“네.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너에게 권한 한 가지를 양도하겠다. 새로운 신도를 끌어들일 수 있도록, 영입에 관한 권한을 위임하겠다.”
“네. 감사해요.”
에세나가 싱긋 웃었다. 세례를 받기 전과 같은 미소였지만 영성이 깃든 지금 완전히 달라진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원래부터 에세나는 신도들 사이에서 꽤 이야기가 있었다. 낭중지추라고 어디에 있건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특별한 사람은 눈에 띈다.
신도들이 에세나가 제자로 지목되었을 때 놀랐을 뿐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리지 않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샤를은 그날 집회는 그것으로 마쳤다. 에세나는 양지의 일로는 근처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플로나처럼 샤를의 집에서 일할 수는 없었고 휴일마다 와서 영성을 다루는 법에 대해서 배우기로 했다.
이번 주는 안 되겠군. 에브렌 린덴 부인의 초대가 있었다.
* * *
문데이크 거리는 선데이크 거리에서 그리 멀지 않다.
선데이크 거리가 메트로폴의 처절함 그 자체를 모은 거리였다면 문데이크 거리는 그나마 나은 중하층 계급들이 사는 지역으로 부분적으로 이곳에서는 마피아도 활동하지만 선데이크 거리처럼 대놓고 활보하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래도 99호는 선데이크 거리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치안이 꽤 불안정했다. 저녁에는 남녀 할 것 없이 돌아다니지 않았고 집에 하나씩 무기를 보관해둔 정도.
그런 곳에 어둠 속에 가면을 쓰고 움직이는 남자가 있었다. 샤를이었다. 그는 연금술사들의 습성을 알고 있었다. 낮에는 자고 밤에는 일하는 게 그들의 상식이라고 해야 하나.
깊은 어둠 속을 홀로 걸어가는데 두려움은 없었다. 주변을 대낮처럼 보이게 해주는 샤를의 영성 때문이었다. 위험한 것이 있다면 즉각적인 경고까지 해주는데 샤를이 두려워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어둠 속의 99호에 도착하자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곳은 일종의 클럽이었다. 클럽 중에서도 퇴폐적인 것으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보다 더 한곳.
‘홍등가로군.’
술집, 그것도 여자들이 문 앞에서 대놓고 헐벗은 채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다. 샤를이 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는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이 여자들은 얼굴의 형태만 보고도 그의 외모를 짐작할 수 있었나 보다. 몇몇 여자들이 휘파람을 불면서 말했다.
“멋진 오빠인데? 여기서 놀다 가려고?”
“오빠 가면 너무 멋있다.”
“헤헤. 나랑 놀래?”
여자들이 말을 걸 때 샤를은 그녀들의 외모에 현혹되지 않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만날 사람이 있다.”
“누굴 만나게?”
샤를의 어깨에 손을 얹으면서 고혹적으로 말하는 여성은 샤를의 다음 한마디에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연금술사.”
“……메달은?”
메달? 샤를은 빈스의 지하실에서도 쪽지 아래에 있던 메달을 떠올렸다. 혹시나 해서 가져왔는데 확실히 도움이 됐다.
“있다.”
옆에서 느긋하게 걸어오던 다른 여자들은 샤를의 목적이 매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자 곧 사라졌다. 처음 샤를에게 말을 걸었던 여자가 안으로 안내했다.
건물 지하에 있는 특이하게 생긴 창틀 앞까지 샤를을 안내하고는 말도 없이 쌩하고 사라졌다. 연금술사는, 아마 평범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틀 앞에 작은 문이 열렸다. 눈만 보이는데 상대가 나직하게 말했다. 여자 목소리였다.
“메달.”
샤를은 품에서 메달을 꺼내 그 앞에 가져갔다. 그걸 본 여자는 작은 문을 탁하고 닫고는 문을 열었다.
들어가면서 보자 남자보다 건장한 체격의 여자가 경비복을 입고 있었다. 허리춤에 찬 삼단봉은 경찰들이나 쓸 법한 것처럼 보였다.
“문제를 일으키면 추방이다.”
샤를은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느껴지는 건 코로 들어오는 특이한 화학 약품의 냄새였다.
중앙에는 특이하게 생긴 탁자가 있었고 하나같이 나른한 표정으로 대마를 피우는 여자들이 카페트 위에 있었다. 하나같이 거의 반쯤 헐벗은 상태로 뒤엉켜 있었다.
그중에 한 명 동양에서 들어왔다는 곰방대를 물고 대마를 피우고 있는 여자에게 샤를의 눈길이 갔다. 다른 여자들과 달리 속옷이 아니라 사우나용 가운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게 하나 있다. 사람을 단정 짓는 것은 바로 얼굴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샤를은 확장된 추리력을 통해서 얼굴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행동, 말투, 자주 사용하는 손짓이나 버릇 등을 통해서 샤를은 수많은 사람을 구별해낼 수 있었다.
비밀 세계의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행동학적 흔적을 남기고 다녔다. 그래서 샤를은 그걸 유심히 살피는 것으로 몇몇 사람들을 기억했다.
눈앞에서 곰방대를 들고 있는 이 여자는 파테스트로피였다. 가면을 쓰고 있지 않더라도 샤를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네가 연금술사인가.”
“어라 못 보던 사람인데? 메달을 구했어?”
샤를의 목소리를 듣고 느긋한 표정의 파테스트로피가 비스듬히 앉았다. 그녀는 머리카락의 옆 부분을 양의 뿔처럼 땋아서 올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아주 고혹적인 모습의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몽롱하게 취해서 옆에서 엉켜서 빈둥거리고 있는 여자들을 옆으로 밀어버리고 말했다.
“잘 왔어. 내 이름은 파테스트로피야. 고객님 이름은?”
샤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말했다.
“거래를 하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