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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사이비 교주가 되었다-22화 (22/221)

제22화 - 이계는 물리 세계와는 동떨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되지도 않았다. 꿈이라는 매개체를 관통해 물리 세계와 맞닿아 있는 장소라고 해야 할까.

그림으로 나누자면 이계 – 꿈 – 현실 순으로 마치 쐐기가 박혀 있는 형태였다. 찌르는 쪽은 이계였다.

현실에서 꿈으로 가는 건 쉽다. 특별한 초를 키고 잠을 자면 되니까. 하지만 꿈에서 이계로 갈 수 있는 건 아무나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비학을 공부하는 몇몇 사람들 중에서도 특출난 영성을 갖고 있는 존재는 특별한 의식을 통해서 현실에서 꿈을 향해 갈 수 있었다. 몇몇 교단의 교주급이라든가 아니면 고위급 마도사 정도만 가능한 일이다.

“준비가 됐어.”

샤를은 비밀 서재에서 여태 경매장에서 모아왔던 재료들을 나열해두고 바라보고 있었다. 에브렌 린덴에게 받은 의뢰금으로 이전에 사고도 모자란 재료를 사서 채워 넣었다.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을 이계라고 뭉뚱그려서 표현하지만 사실 이계도 여러 층위가 나뉘어 있었다.

샤를이 향하는 목표는 중간쯤의 층위에 해당했다. 그러려면 꽤 재료가 필요해서 오라클 경매장에서 샀던 상당한 재료를 소진하고 말았다.

“음, 책이 어디 있더라.”

-의식 마법 책? 그거라면 왼쪽에서 세 번째 서랍에 들어 있잖아.

-가끔 생각해보면 파기 네가 우리 엄마 같다니까.

-허, 허 헛소리하지 마!

파기나레코르의 이죽거림을 들으면서 샤를은 웃었다. 헛소리나 하면서 떠들 친구가 생긴 느낌이었다. 그렇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서랍 문을 열었다. 이전 샤를이 적어두었던 의식 마법책이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꿈속 이계로 가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비밀 서재의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밑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음. 별봄맞이꽃 추출액을 사용해 제례용으로 축성된 단검에 발라 준비된 선언문이 적힌 새끼 양의 양피지를 찌르란 말이지.”

양피지에는 준비된 선언문을 적었는데 이 선언문은 기존의 의식을 간략화한 것이었다. 꿈에서 이계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77개의 계단을 이용해야 할 필요가 있었는데 양피지 하나에 77개의 계단을 담는 것과 같다.

샤를은 중얼거리면서 의식용 재료를 모아서 의식 마법의 준비를 했다. 신체를 청결히 하고 준비된 향료를 몸에 발라서 냄새를 지웠다.

샤를은 중얼거리면서 의식 마법의 준비를 마쳤다. 양피지에 적힌 글자의 갈라진 틈 사이로 단검을 찌를 준비가 되었다.

“후, 좋아. 갈 준비가 됐어.”

여기까지는 비밀 세계의 재료들이 필요했지만, 이 의식 마법에 필요한 가장 큰 재료는 바로 시전자의 ‘열정’이었다.

큰 영성을 가진 존재의 열정을 일종의 입장권처럼 지불하는 것. 그래서 꿈속 이계로 갔다가 오면 한동안 축 늘어진 상태가 되겠지만 감정은 금방 복구된다.

준비된 진언을 외우면서 샤를은 자신의 내면에서 거대한 열정을 일으켰다. 그리고 순식간에 단검을 양피지에 찔렀다.

단검이 종이를 관통하자 현실이 분리되면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안개 속을 지나자 샤를은 어느새 깊고 좁은 동굴 안에 있었다.

샤를의 내면에서 들끓듯 돌아다니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내면의 에너지를 느껴보니 얼마간은 계속 돌아다녀도 충분할 것처럼 보였다.

-파기?

샤를은 허릿춤을 쳐다봤다. 파기나레코르는 없었다. 이 꿈속 이계는 허락받지 못한 존재는 들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게임 속에서는 교주급들은 이곳에 들어와서 독점적으로 ‘파밍’을 하곤 했다.

축축한 동굴은 은신처처럼 꾸며져 있었다. 샤를은 이곳에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감각이 이 초행길을 마치 익숙한 거리처럼 느껴지게 했다.

동굴 밖으로 나가자마자 샤를은 상큼한 바람을 느꼈다. 고원 특유의 공기가 느껴졌다. 지평선 아래로 거대한 협곡이 보였고 날씨가 좋아 협곡 아래 아주 저 멀리에 있는 평원까지 보였다.

‘우르그 고원.’

거대한 장관을 보면서 기이한 기분을 느꼈다. 이곳은 샤를이 목적으로 한 곳이었다.

로그라이크 형식으로 매번 새로운 세계로 창조되었던 ‘사이비 교주 시뮬레이터’에서도 이계에 들렸던 적이 있다. 그때는 다른 이름의, 다른 배경의 장소였지만 장소마다 특징이 있다.

[고원]에는 ‘유물, 소환수, 이능력’의 드랍 테이블이 있다.

[평원]에는 ‘동료, 무기, 음식’

[강]에는 ‘무기, 음식, 주문’

[호수]에는 ‘가호, 유물, 무기’ 등등. 이 외에도 화산, 극지, 달, 숲 등등 여러 장소가 있었고 각자의 지형에 맞춰 드랍 테이블이 다르다.

샤를이 게임 속 설정을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곧 시야가 흐려지는 걸 느꼈다. 안개가 끼고 있었다. 원래는 하늘 위에 걸려 있어야 할 그것이 지평선 저 멀리에서 안개가 되어서 몰려든 것.

샤를은 자신의 심장 속에 있는 열정이 거세게 고동치는 것을 느꼈다.

‘느껴져. 뭔가 일이 일어나려고 하는 거 같아.’

이것이 ‘조우’. 게임 용어로는 이벤트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분명 열정 스택 하나당 이벤트 한 번이 발동이라고 기억했다.

게임이 현실이 된 이상 지금 어떻게 될지는 완전히 미지수였다.

안개 저 너머에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마치 귀를 찢는 것 같은 고함이 북소리에 섞여 있는 것 같다. 맨 처음에 보이는 안개 속의 그림자는 용머리였다.

그래서 용종이라도 나타난 것인지 잔뜩 긴장한 샤를은 용머리가 단순히 조각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건 거대한 배였다. 북구의 바이킹들이나 탈법한 거대한 배였는데 문제는 그것이 육지 위를 걷고 있다는 점이었다.

쿵. 쿵. 쿵.

자세히 보니 팔이 네 개나 달린 개미처럼 생긴 종이 이족 보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팔로 배를 받쳐 들며 올려서 짊어진 상태였다.

배의 용머리 살짝 뒤에는 황금 가면을 쓴 왕이 있었는데 커다란 망토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옆에 있는 개미들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이스카반의 개미종…….’

샤를은 저 종족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었다. 저들은 이스카반의 개미라고 불리는 종으로 노예처럼 배를 짊어지고 가고 있는 저 개미가 지상에 나타난다면 시골 마을 하나쯤은 어렵잖게 전멸시킬 수 있는 생물이었다.

평범한 영성자나 소총을 들고다니는 사람이라면 피해를 감수한다면 처리할 수 있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스카반의 개미는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거기다 꽤나 불길한 감각이 들어서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고 몸을 숨긴 채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다. 느낌이 왔다. 이번 조우 이벤트는 별로 좋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리를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개 속에 있는 거대한 개미왕의 배를 뒤로하고 움직이자 숲이 있었다.

마치 버섯처럼 생긴 나무들은 가까이 가서 보니 나뭇잎 대신 슬라임 같은 젤리가 매달려 있었다. 기묘한 숲 군락지에 도착한 샤를은 이곳에서 거대한 나무를 하나 발견했다.

아주 멀리서 봐도 보일 정도로 하늘로 높이 치솟은 나무. 그곳의 위쪽은 다른 나무들과 달리 휑했다. 그러나 겨울의 싸늘한 추위를 겪는 나무처럼 보이지도 않았고 죽어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언가 정기를 빼앗긴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샤를은 두 번째 조우 이벤트를 만난 것을 느끼고 움직였다.

족히 수천 년은 되었을 법한 나무의 위에는 둥지 같은 것이 있었다. 샤를은 어떤 운명의 부름 같은 것이 그를 둥지로 이끈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을 느껴 올라가 보니 새가 살법한 둥지가 아니라 웬 도시가 나타났다. 둥지 위의 도시라니 신기한 모습이었다.

‘여기는……우르그 고원의 주술사 도시군.’

아주 오래전에 멸망당한 주술사 부족이 살던 도시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마치 유령들이나 살법한 폐가들만 즐비했다.

주술사 부족은 오래전에 모종의 이유로 멸망했는데 아직 그들의 유산의 잔재가 남아있는 듯했다.

이런 곳에서는 샤를이 고대하던 이능력 드랍 테이블을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마을에 머무르기로 했다.

하늘을 지배한 먹구름은 좀체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샤를은 건물 내부에서 뭔가 특별할 게 없나 찾아봤다. 그러다가 벽면에 그려진 글자를 보았다.

‘고 헤르메스어가 아닌데.’

렘어도 아닌 듯했다. 샤를이 전혀 모르는 언어에 빠져있었을 때,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꼈다. 적의는 없었지만, 갑자기 나타난 게 문제였다. 놀라면서 고개를 돌리자 무언가 있었다.

팔 대신 새처럼 날개가 달리고 이족보행 하는 존재였는데 얼굴에는 새 깃털로 장식된 기괴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길 잃은 새가 왔군.”

그는 자신의 손에서 지팡이를 들었다. 고대 이집트의 앙크처럼 생긴 지팡이를 들고 있는 존재는 적의가 없어 보였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흩어져가는 잔상이지.”

그렇게 말하는 그자의 몸에는 영성이 느껴졌지만 물질은 느껴지지 않았다. 즉 육체는 없고 영혼만 남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길 잃은 새. 나는 네가 원하는 것을 안다.”

“…….”

샤를은 침묵했다. 일단 상대방에 대해 알아낸 게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주술사는 샤를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점술을 원하지?”

“그걸 어떻게……?”

“그것 또한 점술로 알아냈지. 우리가 만날 것도 점을 쳐서 알아냈다.”

샤를은 가면 너머로 보이는 주술사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선명한 네모 동공은 그가 종족도 다른 존재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그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굉장한 점술가였다. 거의 자신의 영성을 모두 점술에 특화시킨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미래를 거의 읽거나 예언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샤를은 입을 열었다.

“점술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 원하는 것을 들어드리죠.”

“우리가 있는 이 신목에는 빛이 필요해. 빛을 가져와다오. 그러면 가르쳐주겠노라.”

“빛?”

“오만과 불손으로 빚어진 항아리를 보아라.”

주술사가 지팡이를 뻗자 건물의 중앙에 있던 탁자가 빙그르르 움직이더니 그 아래에서 기이하게 생긴 항아리가 나타났다. 병 입구 아래가 오목한 병이었는데 크기가 상당히 컸다.

이건 카노푸스의 단지였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미라를 만들기 위해 신체를 바짝 말리는 방법을 익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인간의 몸에 남아있는 ‘악한 독기’가 담겨 있는 것을 빼낸다면서 장기를 빼냈는데 바로 그 빼낸 장기를 담아둔 것이 카노푸르의 단지다.

이 세계에서도 이 카노푸스의 함은 비슷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주술사가 이어서 말했다.

빛이라. 샤를은 공교롭게도 이 상자가 판도라의 상자와 역할까지도 흡사하다는 걸 알았다. 이걸로 뭘 원하는지 궁금해서 계속 들었다.

“우리 종족은 이 카노푸스 단지를 만들어냈다. 영생불멸을 위한 비술을 만들겠다며 이 안에 자신들의 악을 넣고 ‘빛’을 빚어내기 위해 의식을 치렀다.”

“그래서?”

“의식은 성공해서 단지 안에 ‘빛’을 빚어는 냈다만 문제가 생겼다. 안에서 꺼내지 못한 것이다. 이 안에는 천 개의 어둠과 하나의 빛이 있다.”

“…….”

“존재는 이 항아리에 딱 한 번만 손을 집어넣을 수 있다. 항아리에서 빛을 꺼내라. 그렇게 된다면 그대는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나 항아리에서 빛을 꺼내지 못한다면 그 얻어낸 어둠을 가져가리라.”

만약 손을 집어넣었는데 주술사가 말한 ‘빛’이라는 것을 뽑지 못한다면 별로 좋은 꼴은 못 볼 것이다. 어둠이 있을 테니까.

하지만 왠지 샤를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뽑기라고? 자신 있지.”

내가 가챠게임에서 못 뽑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라고. 샤를은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카노푸스함에 손을 집어넣었다.

물컹물컹.

“으. 뭐야 이거.”

안에 있는 어둠은 죄다 진짜 내장 같은 불쾌한 기분을 선사했다. 이건 아닌 것 같아서 뽑으려다가 말고 고르기를 여러 번.

뒤적거리다가 샤를은 곧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꼈다. 똑같이 물컹거리고 있는데 뭔가 반짝인다는 느낌이 든다고 할까.

보통 사람이라면 단지 촉감만으로, 이건 당첨된 로또야! 라고 외칠 수는 없겠지만 샤를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영성이 가리키는 대로 행하니 손에 무언가 들려 나왔다.

“이거군.”

카노푸스 함에서 손을 빼내자 샤를의 손에는 빛이 들려 있었다. 정확히는 빛에 둘러싸인 채 반짝거리는 동그란 구체였다. 크기는 주먹만 했다. 어찌 보면 알처럼 생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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