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 여태까지 샤를은 이야기에 편승해왔다. 129개의 엔딩은 각 캐릭터마다 몇 개씩 있다.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는 암흑성도회, 헬파이어 클럽, 어부형제단, 조각구원회 등등의 교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야기대로 따라서 흘러가면, 몇몇 선택지에 따라 분기적인 엔딩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롤플레잉 배역에 충실했다.
하지만 샤를은 지금 130번째 엔딩을 찾는 중이었다. 이번에 세운 목표는, 이야기에 편승하지 않는 것이었다.
이 세계에는 변하지 않는 고정적인 불변의 사건들이 있었다. 칼튼 교수가 차원문을 여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이런 고정 사건들을 내버려 둔 채, 샤를은 스스로 만든 스토리를 따라갈 생각이었다.
‘이름이라.’
심상 세계에 있는 계시의 석판 조각을 만졌을 때 샤를은 대부분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름을 알 수 있었다.
계시의 석판을 만들었다고, 혹은 발견했다고 추정되는 노인의 이름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제자들의 이름은 알 수 있었는데 에이브라함과 마쉬. 그리고 사이먼이었다.
‘내가 알던 내용에는 없었어.’
계시의 석판 스토리는 메트로폴에서 벌어지는 메인 스토리와는 별개인 사건이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김연수는 수많은 게임 외적인 부분의 잡서들을 읽었는데 그중에서 샤를은 짐작 가는 책이 있었다.
미스트위버 대학은 여러 건물로 나누어져 있다. 가장 유명한 건물은 라페르테 언덕의 서쪽 끝에 있는 이실드너 도서관. 이 도서관은 전국에서 가장 큰 대학 도서관이자 가장 큰 사립 도서관이었다.
조금 걸어서 고서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고 헤르메스 시대 전에는 렘이라고 불리는 고대 국가가 있었다고 한다.
이 렘 시대는 현대로 치면 초창기 이집트, 혹은 이집트 이전이라고 불리는 까마득한 과거 시절, 인간이 태동하는 시기의 문명을 한데 뭉뚱그려서 렘 시대라고 불렀다.
그야말로 까마득한 과거.
이 시대에서 남은 것들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샤를은 그중 하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책을 들어서 꺼냈다.
‘에이브라함의 단장(斷章)’
이건 엄밀히 말해서 마도서가 아니었다. 렘 시대의 도시, 문명, 별자리 지도와 생물들에 관해 적혀 있는 책이었다. 그래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서 이렇게 사본이 도서관에 보관 중인 것이었고.
“샤를.”
“왔네?”
고개를 돌려보자 드레이크가 서 있었다. 오늘 드레이크에게 도움을 받기로 했다. 그는 평소 행실이 날라리 같지만 저명한 고고학 박사였다. 특히 렘 시대의 비밀을 파헤치는 것을 좋아했다.
“그 고서는……. 에이브라함의 단장이잖아?”
“이것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서.”
“음. 뭐든지 물어보도록 해.”
“에이브라함이 누군지 알아볼 수 있을까?”
“물론이지.”
드레이크는 흔쾌히 샤를을 돕기로 했다. 그는 먼저 아는 것을 얘기했다.
“에이브라함은 100년 전에 유명한 고고학자야. 아이토피아 대륙에서 수많은 고대 유물이나 서적들을 발굴해냈지. 그리고 그가 렘 시대를 정리해서 쓴 것이 바로 에이브라함의 단장이지.”
“개인적인 일로 렘 시대의 인물을 조사하고 있거든. 에이브라함 가문에 대해서 조금 조사해줄 수 있을까?”
“그런 것쯤이야.”
샤를은 에이브라함의 단장을 닫고 원래 자리에 가져다 뒀다. 드레이크는 이번 기회에 저번에 진 빚을 갚는다면서 흔쾌히 조사를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와 헤어져서 귀갓길에 올랐다. 정문 앞에 도착해 회중시계를 꺼내서 시간을 확인해보니 이제 6시. 곧 보니가 마차를 끌고 올 시간이었다.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기묘한 사람이 하나 있었다.
후줄근한 멜빵바지와 회색 셔츠를 입고 있는 게 보이는데 전형적인 공장 노동자들의 복장이었다. 한 30대의 남성이 연신 땀을 흘리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샤를은 순식간에 그를 분석하고 있었다. 기묘하게 흔들리는 눈동자는 길을 가는 대학생 중에서도 여자를 쫓고 있다. 나이 30살 중반.
손에 난 굳은살로 보아 숙련공이고 근처의 철강 공장에서 일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잔뜩 긴장해 살짝 들린 어깨. 분명히 무슨 짓을 저지를 것으로 추측된다.
“이봐!”
샤를의 강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그 남자는 샤를을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골목 어딘가로 사라졌다. 수상함을 느끼고 그자를 쫓아가려고 했지만, 그의 앞을 무언가가 가로막았다.
말끔한 정장을 입은 보니가 마차를 몰고 다가와 있었다. 샤를이 갑작스럽게 차도로 나오려고 하자 마차를 급히 세운 모양이었다.
시선을 빼앗겼던 샤를이 다시 눈을 돌렸지만 이미 사라진 뒤였다.
“샤를 주인님?”
“아, 아무것도 아니야. 보니. 가자.”
샤를의 눈빛은 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굉장히 강렬해서 그걸로 그자에게 충분한 경고가 되었을 거다. 당장 별문제는 없을 거라 생각하지만 역시 좀 마음에 걸린다.
‘스토리가 워낙 이리저리 튀어서 내가 아는 이야기가 없어져 가고 있어. 그 남자도 뭔가 일을 저지를지도 몰라. 하지만 당장 이상할 거라고 신고할 수는 없어. 내가 미친 사람으로 몰릴 테니까.’
샤를의 경고를 무시하고 범죄를 저지른다면 샤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미묘한 찜찜함을 느끼면서 샤를은 마차에 올라탄 뒤 집으로 향했다.
메트로폴 교외에 있는 자신의 저택으로 돌아온 샤를은 그를 마중하는 집사, 제이큰을 볼 수 있었다.
“저녁이 준비되었습니다. 주인님.”
“그래. 무슨 일은 없었지?”
“예, 주인님.”
“장원 쪽은 어때?”
“그곳도 문제없습니다.”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샤를의 장원은 포도밭이 즐비한 곳이었지만 이 포도밭의 수익만으로는 교단을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액수라 샤를은 수익 모델을 개선할 때 이 포도밭을 확장하거나 연계된 사업을 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샤를은 저녁을 먹고 나서는 어두운 밤하늘을 보면서 일기를 조금 썼다. 혼자 있을 때면 부쩍 현실이 그리워지곤 했다.
가족들은 잘 있을지, 대체 이 게임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 그가 실패한 경우에 사라지는 세계의 운명. 등등.
그러나 걱정거리와 의문은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라 그냥 가슴속에 묻어둔 채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 * *
어스름이지는 때, 순박한 얼굴의 경찰 하나가 구토를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젠장! 빌어먹을!”
평소 친절하다고 알려진 순박한 경관의 얼굴이 일그러진 채 욕설을 내뱉는 이유는 바로 그 시체 때문이었다.
이런 일을 하면서 시체를 보는 것이야 늘상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 시체는 특히 상태가 나빴다. 누군가 뒤에서 그를 토닥였다.
“루돌프, 괜찮나?”
“예 괜찮습니다. 형사님.”
“정신 차리고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수염이 가득한 형사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그의 내면에서도 분노와 슬픔이 몰려왔다. 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시체를 다시 확인하려고 들어갈 때 누군가 옆에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루이스 형사님.”
“……벡토.”
경정에게서 벡토라고 불린 남자는 선이 굵은 얼굴을 가진 키 큰 남성이었다. 줄무늬가 있는 말끔한 정장에 페도라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렇게 봐서는 그가 평범한 사업가처럼 보이지만 루이스는 벡토가 메트로폴 타임즈에 근무하는 기자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하이에나처럼 특종을 노리고 있는 것도.
벡토는 계속해서 경찰국의 사건을 취재하는 기자였지만 하지만 루이스는 이번 사건이 신사랍시고 거들먹거리는 놈들에게 안줏거리가 되는 걸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안됐지만 이번만큼은 안 돼. 사진도, 청취도 불가능하니 그냥 가는 게 어떤가.”
“케인 청장님이 보냈습니다.”
“조까라고 해.”
“청장님이 보냈다니까요?”
품에서 무언가 꺼내려는 벡토를 말끔히 무시하고 루이스는 중지 손가락을 내밀면서 사건 현장으로 돌아갔다. 케인 청장, 케인 청장. 매번 청장이 보냈다면서 들어오는 저 수법에 몇 번이나 당했는지 모른다.
잠깐 나갔다 온 사이 다른 경찰들의 숫자가 늘어나 있었다. 이번 시체는 종탑 아래에 걸려 있었다. 종지기는, 맨 처음에 그게 조각품인 줄 알았다고 했다.
상체만 있는 흉상 말이다. 그렇게 착각할 만도 했던 것이 그 시체에는 하반신이 없었다.
20대 여성. 양쪽 눈 손실. 양쪽 팔목에 X자의 자상. 살과 뼈를 막론하고 온몸이 마치 조각을 하는 것처럼 깎여나가 있었다. 그 외에도 내장을 비롯해 있어야 할 부분이 대부분 말끔하게 없어져 있었다. 사인은 과다출혈.
하반신은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얼굴 훼손이 너무 심해 시체를 특정하기가 어려워서 입고 있던 옷으로 대학생이라는 것만을 알아냈다.
검게 변색 된 피로 보아, 사망한 지 하루에서 이틀쯤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정황상 죽고 난 뒤에 내장을 빼낸 것처럼 보였다. 시신을 더 자세히 조사하는 도중, 누군가 종탑 위로 올라왔다.
“이게 그 시체군요.”
“앙?”
돌아보니 벡토가 올라와서 사진기를 꺼내는 중이었다. 루이스는 루돌프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루돌프는 별수 없다는 듯 항의했다.
“청장님 명령서가 왔다고요. 또 거부하면 뱃지 내려놓으랍니다.”
청장 개새끼. 그렇게 루이스는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벡토를 강하게 노려보았다. 그래, 이번에는 진짜 청장의 명령서를 가져 왔군.
“청장님이 엠바고 걸었으니 적어도 3일은 기사 안 나갈 겁니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빨리 잡으시면 되죠. 루이스 형사님 범죄자를 잡는 게 뛰어나기로 유명하지 않습니까.”
찡긋 웃는 벡토를 보면서 루이스는 신경을 껐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지금 어스름이 깔린 저녁이라는 점이었다.
“어?”
하늘에 붉은색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이 반사하는 요사스러운 붉은 빛이 시체와 사람들을 감쌌다. 그 핏빛 달빛은 이 비극적인 풍경을 감싸 안고 있었다. 그때 루돌프 경사가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소리질렀다.
“우, 움직였어요.”
“뭐?”
루이스 형사가 돌아보자 루돌프의 안색이 창백했다.
“지금 이 시체의 손가락이 움직였다고요!”
“허튼소리.”
루이스 형사는 시체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손가락도 그대로였다. 루돌프가 겁에 질린 것을 보고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이 친구 상태가 안 좋아 보이네. 집에 가서 쉬게 하고 감식반 불러서 모조리 알아내.”
형사는 다른 경찰에게 그렇게 말했다. 다시 돌아보았지만, 여전히, 시체는 미동도 없었다. 감식반이 시체를 들고가 부검실에 가져갈 때까지 그것은 미동도 없었다.
그러나 시체를 올려두고 감식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시체의 손가락 끝이 꿈틀거리면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새가 지저귀는 아침, 샤를은 하품하면서 일어났다.
샤를의 저택에는 하인이 여럿 있다. 집사 제이큰, 마부 머르보니, 기타 잡일을 할 하인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침실로 가져다주면서 매일 아침 신문을 가져다준다.
그리고 플로나는 샤를의 아침을 가져다주는 담당 하녀였다. 첫 번째 제자로서 교단을 관리하는 게 플로나의 음지의 일이라면 이 하녀 일은 그녀의 ‘양지’에서의 일인 셈이었다.
“샤를 님. 식사 가져왔어요.”
“그래, 고맙다.”
TV, 인터넷이 없는 이 세계에서는 이렇게 신문을 보는 것이 TV를 틀어서 보는 것과 똑같은 일이었다.
조금 뒤에 라디오가 개발되기는 한다. 이 시대는 우리가 아는 현대 문물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초창기라고 보면 된다.
샤를이 집어든 것은 이 도시에서 제일 메이저 신문인 메트로폴 타임즈였다.
“흠. 살인사건?”
며칠 전에 일어났다는 살인사건이 메트로폴 타임즈라는 기사에 실려 나갔다. 이 시대에는 현대랑 비슷해 보여도 인권 존중 사상이나 존엄 같은 게 바닥에 떨어진, 근대였다.
아동을 공장에서 오랜 시간 착취하거나 공장의 환경이 극악 그 자체여서 병에 걸리는 사람도 많았으니까. 빈부격차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이 크기도 했고, 윤리관도 현대의 윤리관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인지 기사에는 시체의 사진이 적나라하게 실려 있었는데 이 시체는 특이하게도 마치 조각된 것처럼 보였다. 샤를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조각구원회의 소행이군.’
양 손목에 난 x자 상흔 때문에 더 적나라하게 보였다. 암흑성도회와는 다른 또 다른 사교, 조각구원회의 소행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샤를의 교단에 스파이로 잠입시킨 신도 루센도 조각 기계의 졸개였다.
어제 봤던 그 남자가 마음에 걸린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 공장 노동자 차림의 남성. 샤를은 직감적으로 그가 저지른 범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세한 사안을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