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 그러나 허깨비처럼 모든 잔상이 사라졌다. 크게 헛손질해 빗나간 이후에야, 아라크네는 자신이 환상에 빠진 것을 알았다. 너무 흥분했다. 하얀색 나비가 일으킨 환상일뿐.
주문서도 없으면서, 영창도 하지 않은 상대가 주문을 쓰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 패착이었다.
탕!
멍청하게 허공을 바라보는 아라크네를 향해서 드레이크의 샷건이 불을 뿜었다. 1m도 안 되는 거리. 초보자라도 빗나가지 않는다. 산탄이 튀면서 머리를 곤죽으로 만들었다.
남은 총열에서 재차 쏴서, 아예 두개골을 부숴버렸다. 아라크네는 비틀거리다가 풀썩 쓰러져서 앞에서부터 무너졌다.
“해치웠나?”
“흠. 지금은 확실히 해치웠는데, 앞으로 그 단어는 사용하면 안 돼.”
“뭐?”
“국룰이야.”
“??”
무슨 헛소리냐는 드레이크의 표정을 뒤로하고 샤를은 쓰러진 아라크네에게 다가갔다. 기괴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아라크네의 기본 베이스는 생물이었다. 머리가 날아가면 죽게 된다.
샤를은 단검을 꺼냈다. 그리고 쓰러진 아라크네의 가슴팍에 꽂아 넣었다.
“자네, 지금 무슨 짓을 하는….”
“아라크네의 가슴 속에는 신비학에 사용되는 재료가 있지. 거미줄의 근원. 아라크네의 심장.”
인간을 닮은 상체를 파헤치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만 이계의 생물을 처치했을 때는 반드시 회수 작업이 들어가야 한다. 현실로 빠져나온 사체는 곧 사라지니까.
아라크네의 가슴에서 어떤 보석을 꺼냈다. 주먹만 한 심홍색 보석이었는데 금속이 마치 심장처럼 펌프질했다.
두근거리는 그 보석의 끝에는 기이하게 생긴 구멍이 있었다. 이 작은 구멍에서 아라크네는 실을 뿜어낼 수 있었다. 작은 실을 엉덩이 부분에 있는 거미줄로 옮긴 다음, 더 크게 증폭시키는 형식이다.
“자네가 그것에 칼을 대는 건 끔찍하지만, 그 보석은 아름답군.”
드레이크의 눈이 심홍색 보석으로 향했다. 샤를은 씨익 웃으면서 그걸 회수했다.
“별로 관심 가지지 않는 게 좋아. 위험하니까.”
그리고 마도서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라네아의 서는 일반인도 고 헤르메스어에 능통하면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물건이었다.
“회수할 건 전부 회수했군.”
“이젠 어떻게 할 셈이지?”
“일단 저 위에 있는 사람들부터 좀 내리자고.”
“그러지……. 음? 저 시체가 사라지고 있어?”
드레이크의 말에 샤를이 고개를 돌렸다. 아라크네의 시체가 엄청난 속도로 분해되고 있었다.
“이계의 생물은 주문서나 계약 같은 연결이 끊어졌을 때 물리 세계에 오래 나와 있을 수 없지.”
정식으로 차원문을 통과해서 오지 않는 이계의 생물들은 일종의 밀입국자 같은 것이라, 물리 세계가 자동으로 지워버리는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계의 생물들이 현실에 죽었을 때,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사체는 그대로 잿더미가 된다. 아라크네의 심장이 빠진 그 괴물은 가만히 내버려 둬도 재로 변해서 사라졌다.
드레이크는 이 뒤 경찰에 연락했고 장대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내렸다.
* * *
처리는 금방 끝났다. 경찰은 신고자인 드레이크의 이야기를 듣고 드레이크를 먼저 용의선상에 올리려고 했지만, 드레이크의 알리바이가 너무 확실하고 동기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긴 조사 끝에 댈러웨이의 범행을 인정했지만, 댈러웨이의 상태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이런 식으로 죽어버린 시체는 본 적이 없었으니까.
이 사건의 담당자인 혼멜 형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이 시체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생각했다.
제보자인 드레이크에 의하면 용의자는 ‘학생들을 구하기 위해’ 숲까지 수색 온 총 든 드레이크를 피해 숲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그런데 그를 찾으니 이렇게 쭈글쭈글한 시체가 되어 있었다는 것.
세간에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하이에나 같은 기자 떼들이 몰려들어서 ‘충격! 미라가 된 납치범!’ 따위의 이야기를 주르륵 써내려갈 것이었다.
안 그래도 청장님이 요즘 심기가 불편한데 굳이 일을 키울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상한 것은 또 있었다. 납치되었던 사람들에게 탐문을 해봤는데 하나 같이, 정상이 아니었다. 대부분 눈이 풀려 있었으며 진술도 이상했다.
‘거미가 어쩌니 뭐니, 뭔 개소리야?’
댈러웨이가 무슨 거대한 거미를 부려서 자신들을 납치했다는데,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그들이 하도 떠들어대서 주변을 수색했지만, 거미 인간 따위의 괴물은 발견하지 못했다.
“여 루이스.”
“도넛 먹어라.”
“잘 먹을게.”
혼멜 형사는 동료가 건넨 도넛을 입에 물고는 타자기를 쳤다.
타탁. 탁탁탁.
납치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심신이 쇠약해져서 헛것을 본 것이라고, 그래서 정신 병원에 며칠간 수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형사의 의견을 덧붙였다. 안 쓰던 타자기를 하도 쳤더니 손가락이 아프다.
하지만 의문인 것은 덩치도 작아 보이는 댈러웨이가 어떻게 그들을 납치할 수 있었느냐인데, 생각해보니 덩치가 크건 작던 사람이라는 건 원래 뒤통수에 손 망치를 얻어맞으면 픽하고 쓰러지기 마련이었다. 뒤에서 습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또 적었다.
음. 그리고 어떻게 수많은 사람을 꽁꽁 묶어 장대에 높이 올라갔느냐, 음. 이건 댈러웨이가 근력 운동을 틈틈이 해서 상당히 힘이 셌다고 적어뒀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대충 만든 조서였지만 괴물 거미가 나오는 것보다야 말이 된다. 그렇게 그는 조서 작성을 끝마쳤다.
진득하게 파보면 분명히 이상한 부분이 나오긴 하지만 뭐 이쯤 보니 만족스러운 공문서였다. 더 귀찮은 일이 생기기 전에 청장에게 올려 보내기로 했다.
뭐, 대충 이 명예욕에 눈이 먼 드레이크라는 교수에게 표창장 하나 던져주면 기자들은 거기에 붙어서 이 엉망진창의 경찰 조서에서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었고 그는 귀찮음에서 해방된다.
그렇게 사건은 종결되었다.
* * *
이 사건을 통해서 제일 당황한 것은 드레이크였다. 경찰은 이 기괴한 사건에 대해서 일말의 흥미도 없어 보였다. 시체가 사라졌고 죽은 사람은 댈러웨이뿐이니, 그냥 사람들의 망상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사건이 끝난 뒤에 드레이크는 샤를을 불러서 근처의 주점으로 불러서 술을 마셨다.
“난 이해가 안 가. 그렇게 많은 일을 경험했는데 어째서 세상은 조용한 거지? 경찰들은 왜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사실, 그 일에 관해서 사람들은 선뜻 믿기 힘들지.”
“그건 그렇긴 해.”
“대부분의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지. 괴물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납치했다는 것보다, 댈러웨이가 사람들을 기습해서 기절시킨 뒤에 데려갔다는 게 더 말이 돼.”
“하지만, 납치된 사람들은?”
“정신병자로 몰려서 정신병동에 수감되는 것보다 혼자 정신적 트라우마를 끙끙 안으면서 살아가는 게 낫지. 적어도 자유는 있을 게 아닌가.”
“…….”
드레이크는 어처구니없는 결과에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샤를이 나서서 의도적으로 사건을 은폐한 것이라고 보기엔 말이 안 됐으니까. 그는 그냥 괴물의 시체를 불태웠을 뿐, 형사에게 압력을 가하거나 하는 행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괴물들을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럼 그들은 미쳐버리거나 현실을 회피하게 될 거야. 모든 비밀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계몽이 낮은 일반인들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못해.”
“응? 계몽이 뭐지?”
샤를은 자신의 머리를 두들겼다.
“이계의 존재와 마주하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이 이상해지지. 공포에 질리거나 환각을 봤다고 말하기도 해. 하지만 그것들은 현실에 실제로 존재하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 그것이 계몽이다.”
“……그럼 나는?”
“넌 아미티지 교수님하고 꽤 인연이 있었지?”
“그래.”
“정신력이 강한 몇몇 사람들은 계몽 수치가 올라도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아. 네 정신력은 강한 편이야. 그리고 네 주변에는 아미티지 교수님이 있지. 그분은 알게 모르게 주변 사람들이 계몽에 영향받지 않게끔 도와주고 계셔.”
샤를은 드레이크가 평소에 잘 차고 다니는 팔찌를 가리켰다. 흔하고 그다지 장식이 없는 평범한 팔찌였다.
“그거, 아미티지 교수님에게 받았지?”
“그걸 어떻게?”
“그런 사소한 물건들이 괴물에게서 정신을 보호해주는 부적이 되는 거야.”
“……그런 건 처음 알았다.”
“드레이크.”
“뭐지?”
샤를은 드레이크의 능력에 대해서 잘 알았다. 아라크네를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능력. 공포에 질리지 않는다는 것은 영성자에게는 기본기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기본기조차 없는 인간들이 수두룩했다.
당장이라도 영입하고 싶지만, 아직 아니었다. 체질 개선이 끝나지 않아서 지금, 샤를의 무명교단의 신도들은 전부 광신도 수준이었다.
‘바뀐 교리에 적응해야 하고, 여러모로 시간이 걸려.’
거기다 드레이크의 주변에는 아미티지 교무처장이 있었다. 그도 영성자였으니.
“아냐. 아무것도.”
“싱겁긴. 그나저나 이 은혜는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드레이크는 감사의 인사를 했다. 샤를이 아니었다면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었다.
“음. 하나 도와줄 게 있는데.”
“뭐지?”
* * *
드레이크와 대담을 마친 샤를은 서재로 돌아와서 아라네아의 서를 읽었다. 이건 확실히 번역본이었다. 거기다 필사까지 해서 부분 부분이 비어 있었다.
‘이건 조각이야. 원본은 [암세천경(暗世天經)]이고. 그중에서 암흑에 속하는 권속을 불러내는 주문 몇 가지만 따로 빠져있군. 완전한 마도서도 아니었네.’
암흑성도회에서 모시고 있는 사악한 신 암격사는 자신을 숭배하는 교주에게 암세천경을 내렸는데 이 원본을 읽고만, 초대 교주는 미쳐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암세천경은 너무 위험해서 여러 부분으로 나뉘어서 보관되고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라네아의 서였다.
완전한 아라네아의 서는 아니었지만, 암흑에 속하는 주문은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이 주문을 쓰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텐데.’
보통 힘을 빌려주는 주체인 사악한 신은, 빌려달라는 사람이 누구건 빌려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샤를의 경우, 스스로 무명교단을 창조하고 교주 행세를 하고 있으니 암격사의 눈에 띄어 관심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라네아의 서 말고 습득한 물건인 아라크네의 심장을 꺼낸 뒤 가볍게 지배의 권능을 걸었다.
[아라크네의 심장]
[분류 : 마도구
개요 : 불완전한 마도서 암세천경에서 빠져나온 아라크네의 심장. 주인 행세를 하고 있던 자를 죽인 뒤로 매우 빠르게 뛰면서 마도구화 되었다.
능력 : 영성을 부여하면 실을 짜낼 수 있다. 점성을 부여할 수도 있으며 탄성을 증가시키거나 강도를 올릴 수도 있다.
부작용 : 없음.]
이 물건이 있으면 온갖 상황에 대처하기 쉽다. 이 실을 굉장히 많이 짜낸 다음에 옷처럼 입어도 될 것이고 어떤 상황에서는 와이어로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영성을 아무리 부여해봐도 하루에 일정량 이상의 실은 뿜어내지 못하는 듯 했다.
아라크네의 몸에서 나왔으니 기존의 성질은 유지했지만, 결과적으론 다른 물건이 된 듯했다. 샤를은 매일 이걸로 실을 짜내기로 했다. 언젠가는 이걸로 쓸 만한 옷을 만들 수 있으리라.
샤를은 파기나레코르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어?! 여긴 어디야? 그 찐따 녀석은 어떻게 됐어?
-죽었어.
-에에에에에에! 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건 놈이 쥐고 있던 마도서야.
파기나레코르에게 아라네아의 서를 보여주자 파기나레코르가 다가와서 냄새를 킁킁 맡더니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가짜잖아.
-정확히는 부분 부분이 비어있긴 해.
-그럼 마도서가 아니라 주문서라고 해야지.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파기나레코르는 팔짱을 끼고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말했다.
-이걸 나한테 먹일 것은 아니지?
-고민 중이야.
-난 가짜는 안 먹어.
샤를은 어깨를 으쓱했다. 본인이 필요 없다고 하니 내버려 뒀다가 오라클 경매장에 넘겨버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쓰지도 못하는 주문, 필요 없다.
-그리고 하나 말해둘 게 있는데.
-뭐지?
-앞으로 잠금장치는 안 닫았으면 하는데. 닫고 나면 잠에 빠져든 것처럼 시간 감각이 사라져버려. 계속 날 재우게 한다면 파업할 거다.”
원래 무언가를 조련할 때는 먹이와 관심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싫어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구분해야 한다. 보상으로 좋아하는 것을 주고 체벌로 싫어하는 것을 줘야 하니까.
아무래도 파기나레코르가 극도로 싫어하는 것은 잠금장치를 닫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 양보가 필요했다.
-음. 고려해보도록 하지.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며칠 동안 샤를은 대학으로 출근해서 수업을 하면서 평범한 일상을 지냈다. 샤를은 무시무시한 겜창이었는데 고 헤르메스어의 경우, 게임에 무조건 필요하다시피 하는 언어였다.
특성 중에 ‘고 헤르메스어 능통’ 과 같은 특성이 없으면 자동 번역이 안 된다. 여러모로 게임 플레이에 방해가 되었기에 그는 그냥 아예 고 헤르메스어를 완전히 외워버렸다.
현실에서는 영어도 고등학생 수준이었던 김연수가 게임 속 언어인 고 헤르메스어는 완전 전문가 수준급으로 익힌 것. 톨키니스트들이 엘프어를 직접 익히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었다.
그래서 강의는 별문제가 없었다. 약간 게임 공략서 올리는 기분으로 정리해서 설명하는 식이었으니까.
대학을 다니면서 리카와는 상당히 친해져서 가끔 사적으로도 만나기도 했다. 물론 데이트 정도는 아니고 대학 내에서 가끔 밥을 먹는다거나 인사하고 얘기를 나누는 수준이었다.
오늘은 도서관에 갈 생각이었다.
‘계시의 석판 조각이 보여준 환상에서 들은 이름들……. 거기서부터 시작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