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화 - 얼마 지나지 않아 클럽을 찾은 샤를은 가려던 장소를 찾아냈다. 디모 클럽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서 보니를 기다리게 했다. 내리기 전에 샤를은 미리 준비해온 아무 무늬 없는 하얀색 가면을 꺼내서 썼다.
클럽 앞에 가면을 파는 상점이 있어서 이렇게 가면을 쓰고 돌아다녀도 사람들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가면을 쓴 사람들을 지나 움직인다.
클럽 옆에 있는 극장을 쓱 바라본 샤를은 그대로 클럽 내부로 들어갔다. 이 시대의 클럽은 현대의 카페랑 비슷했다. 위치나 역할이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사람들이 모여서 사교의 장이 되는 것은 비슷했다.
한 남자가 앞에서 가로막았다. 잘 차려입은 제복을 입었는데, 흰 피부에 인상적인 미소를 지닌 훈남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자리로 안내해드릴까요?”
“달빛이 보이는 자리로 안내해주시오.”
“이쪽으로.”
남자가 안내한 것은 테이블이 아니라,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였다. 샤를은 군말 없이 따랐다. 이곳이 바로 오라클 경매장의 입구였다. 클럽은 위장이었을 뿐.
이 남자도 일종의 영성자로 보였다. 문지기부터 영성을 가진 존재라. 오라클 경매장이 얼마나 비밀 세계에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초행이라는 것이 들키진 않은 것 같네.’
엄밀히 말하면 사실 초행도 아니다. 샤를은 형태는 다르지만 이름은 같은 오라클 경매장을 게임 속에서 수십 차례는 미리 방문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몇 가지는 같았다. 대개 방문 시에 가면을 써야 했고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 고객에 대한 비밀은 오라클 경매장에서 무엇보다도 중요시하는 내용이었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남자는 안내데스크로 샤를을 안내하고는 올라갔다. 그 앞의 젊은 직원이 싱긋 웃으면서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환전했으면 하는데.”
샤를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굵었다. 미리 준비된 목소리였다. 체형은 바꿀 수 없지만 목소리와 태도를 변경하는 것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을 흉내 낼 수 있다.
배우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의 이 연기력은 이건 샤를이 그간 VR게임을 하면서 익힌 롤플레잉 기술이었다. 김연수가 샤를을 연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동 달란트는 5천 파운드. 은 달란트는 5만 파운드. 금 달란트는 50만 파운드입니다.”
“동 스무 개.”
샤를은 품에서 10만 파운드짜리 수표를 꺼냈다. 이 많은 돈이 어디서 났냐면, 샤를의 비밀 서재에서 발견했다.
헥센 가문의 서자로 자라온 샤를은 물려받은 얼마 안 되는 돈을 밑천으로 사용해 마도사 일을 하면서 그간 비합법적인 일로 돈을 벌어왔던 것.
파운드를 달란트로 바꾸자마자 파기나레코르가 난리를 쳤다. 샤를의 어깨 위로 날아오르더니 그의 뺨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나! 나! 나 줘! 나 줘!
-잠깐 기다려.
샤를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 달란트들은 전부 써야 할 것이 있었다. 그래도 남는다면 파기나레코르에게 주면 된다.
환전소 너머에는 바로 경매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매장에서 살짝 떨어진 곳에는 경매로 출품하지는 않지만 값비싼 물건들이 상시 정리되어 있는 가판대가 있었다.
유리로 된 칸막이 안으로 비밀 세계의 귀중품, 물리 세계의 귀중품들이 섞여 있었다.
“부적은 어떠십니까? 이 부적은 글리치 노만이 만든 펜타클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위대한 제작자 글리치죠.”
“이 목걸이는 얼마나 하오?”
“이건 파텍스 가문에서 만든 회중시계입니다. 영성자의 축성이 깃들어 있는 물건이죠.”
“어머! 당신, 나 이거 갖고 싶어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가판 근처에서 물건을 사고 있었다. 하나같이 완제품으로 특이하게 생긴 부적이나 축성된 단검은 물론이고 예술가들이 만들었을 법한 장신구들도 많아서 여자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샤를이 노리는 것은 이런 완제품을 파는 곳이 아니라 재료들이 있는 곳이었다. 재료들은 경매에는 올라오지 않지만, 비밀 세계에서는 고가로 취급되는 물건들이 한 상인에게서 팔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재료를 보러 왔소.”
“딱 맞춰 오셨네요. 어제 대량의 재료들이 입고되었거든요.”
샤를은 말끔하게 생긴 남자 상인을 보았다. 그에게서 몇 가지 불안감이 보이지만 물건에 대한 것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거기서 몇몇 재료를 샀다.
‘고갱이가 파인 푸른 딱총나무 가지, 별봄맞이꽃 추출액, 성전 향료, 사산된 새끼 양으로 만든 양가죽 양피지, 호랑이의 연골, 주목고리 나무 토막.’
이 중에 제일 비싼 것은 새끼 양가죽 양피지였다. 조건이 까다롭고 주문서의 재료로 쓸 수 있을 정도로 범용적인 재료라 공급이 모자랐다. 동 달란트 3개를 주고 샀다. 이외에도 이것저것 재료를 샀다.
‘재료는 얼추 구했군.’
주문 사용에 필요한 시료, 의식 마법의 재료, 등등 전반적으로 마도사에게 필요한 물건들이었다.
경매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각자 쇼핑을 즐기던 신사숙녀들이 자리를 뜨고 경매장으로 향했다.
지금까지의 준비는 그들에게 있어서 일종의 에피타이저 수준이었다. 그들이 좋아할 법한 물건은 지금부터 구할 수 있었다.
샤를은 경매에는 관심이 없으니 다음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어차피 경매장은 앞으로 계속 와야 할 곳이었다. 마차를 타고 저택으로 귀환한 뒤에 샤를은 서재로 돌아왔다.
-달란트! 달란트!
-옛다.
파기나레코르는 아까 전부터 달란트를 보채는 중이었다. 샤를이 얼마를 환전하고 얼마를 썼는지 알고 있기 때문. 남은 건 동 달란트 7개였다.
-7개면 얼마나 토큰으로 바꿀 수 있지?
-잠깐 기다려봐.
파기나레코르는 동 달란트를 그대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서 먹었다. 그리고는 생각하다가 말했다.
-얼추 토큰 2개는 될 거야.
-줄었군.
-달란트는 계속 먹을수록 요구량이 늘어나.
샤를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종의 내성 같다고 표현해야할까. 같은 종류의 달란트는 먹으면 먹을수록 요구 수치가 올라간다. 여태 동 달란트만 줬으니 요구 수량은 더 늘어날 터.
샤를은 현재 파운드와 달란트 교환비율에 맞춰서 적당히 손해를 보지 않는 한계치에 이르렀을 때쯤에 은 달란트를 줄 생각이었다.
7개를 다 먹고 난 파기나레코르는 이젠 손바닥 크기 정도로 커져 있었다. 요정에서 인형 수준으로 변했다고 해야 하나. 토큰을 받자 허공에 예의 동화 속에나 나올법한 슬롯머신이 떠올랐다.
토큰을 밀어 넣자 빙글빙글 돈다. 이번에도 광명자의 표식이 떠오른다. 그리고 또 광명자의 표식.
이쯤 되면 버그를 의심할 수준이었다. 세 번째에 이르러서 또 다른 표식이 떠올랐다. 마치 투창을 쥐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인간이 그려져 있는 문양이었다.
이 또한, 수많은 이계신들의 문양을 봐온 샤를도 모르는 문양이었다.
-완료!
사기가 아니냐고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슬롯머신이 뱉어낸 주문서를 들었다.
[■■■의 창]
[고열의 창을 허공에 생성해낸다. 창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폭발, 가열, 점화 세 가지 기능을 지닌다. 이형의 것에게 더 큰 피해를 가할 수 있다.]
-이거 완전 광명자의 창 판박이인데.
-아니라니까 그러네.
-흠.
샤를은 턱을 괴고 쓰다듬었다. 무존자의 창이라 이름 짓고 나자 샤를은 스스로의 영성이 더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무존자의 영향력이 이 세계에 퍼질 때마다 샤를의 힘도 강해지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다음 토큰을 집어넣고 돌렸다.
띵.
이번에는 시작부터 아는 문양이 나왔다. 설마하니, 이번에도 광명자의 문장이었다. 두 번째도 광명자의 문양이 나오자 이제 샤를의 의심의 눈초리는 더욱 더 커졌다.
-야, 너 사기 쳤지?
-아니라니까.
-바른대로 말해, 손모가지 날아가기 전에.
-아니라고 빼애애액!
중앙에 원이 그려져 있고 소용돌이 같은 것이 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명운의 문양이었다.
‘명운의 문양이야.’
이계에는 4대 악신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저 명운의 문장은 삼라만상이라는 이름의 중립신이 가진 독특한 표식이었다. 신비학에서 이 신은 운명과 인연의 신으로 불린다.
문장 세 개가 드러나고 주문이 튀어나왔다. 샤를은 보지도 않고 파기나레코르를 노려보았다.
-이래도?
-……네가 이상하리만치 광명자에게 사랑받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럴 리가 없잖아! 난 광명자에 관해서 하나도 모른다고.
-솔직히 나도 이런 적은 처음이야.
어깨를 한 번 으쓱한 파기나레코르는 마치 배를 째보라는 듯 당당하게 가슴을 내밀고 허리에 손을 올렸다.
-나 파기나레코르! 일생에 단 한 번도 사기를 쳐본 적이 없다!
-…….
샤를은 침묵했다. 그래, 우연일 수도 있지. 어쨌든 같은 문양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샤를은 이상하다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다.
계속해서 광명자의 문양이 튀어나오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무언가 있다. 파기나레코르의 말처럼 샤를에게 광명자의 가호라도 붙어있는 것이 아닌 이상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그 문제는 지금 당장 생각해도 소용이 없었으니 샤를은 일단 튀어나온 주문서를 살폈다.
[■■■의 나비 소환술]
[재질이 불꽃으로 이뤄진 나비. 환상을 불러일으키거나 최면을 걸 수 있다. 이 환상은 숙련도가 오를수록 점점 더 실체를 갖추게 된다. 나비 소환에 익숙해지면 나비를 이용해 더 강력한 존재를 불러올 수도 있다.]
샤를은 이번에도 자신이 주문을 습득했다. 예상하건대 광명자의 문양이 두 개 이상이면 높은 확률로 앞의 이름이 지워지는 듯했다.
-파기, 방금 얻은 주문 두 개를 보관해줘.
-알겠어.
파기나레코르가 주문서를 수납하자, 책은 사라지고 글자만이 옮겨갔다. 샤를은 다른 주문을 더 얻고 싶었지만, 달란트는 더 없었다.
눈을 감고 심상세계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눈앞에 보였고 그 아래에 계시의 석판이 보인다.
샤를은 방금 전까지 얻은 주문을, 이 세계에서 사용해보기로 했다. 먼저 무존자의 등불 주문. 따로 랜턴 같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 샤를의 전신 어디에서나 빛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존자의 창 주문. 허공에 형성된 불길을 보자 샤를은 이 주문이 광명자의 주문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광명자의 주문은 맞아. 하지만 겉모습만 그럴 뿐.’
샤를은 그 주문들의 힘이 이 오벨리스크에서 전해진다는 것을 피부로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이 거대한 오벨리스크가 무존자인 샤를이 내야 할 힘을 대신 내주고 있었다.
‘이것도 계시의 석판 조각의 효과일까?’
그러고 보니, 이 세계를 돌아다니면서도 정작 제일 중요한 계시의 석판 조각은 찾아보지 않았었다. 샤를은 몸을 아래로 내려서 계시의 석판 조각을 향해 다가갔다.
오벨리스크에 파묻힌 계시의 석판은 떨어질 것 같지가 않았다. 가까이 가져가서 손을 댔다. 여기서 엄청난 영성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힘…….
그 순간 샤를은 자신이 이 세계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
허공에 떠다니는 부유석을 향해 손을 뻗자 거대한 부유석들이 옹기종기 모여들기 시작했고 찰흙 반죽처럼 샤를이 마음대로 주물럭거릴 수 있게 되었다.
샤를은 지반을 형성하고 그곳에 의자 하나를 만들 수 있었다. 무존자의 상징은 성좌. 머리 위에 별빛은 있었고, 이 부유석들로 의자를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샤를이 손쓰지 않아도 저절로 성좌가 만들어졌다. 마치 황제나 왕이 앉을 법한 거대하고 화려한 의자였다.
오벨리스크에 있던 힘의 얼마 정도가 저 성좌로 모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것이 샤를의 상징이다. 눈을 뜨자마자 샤를은 힘의 증가를 느낄 수 있었다.
현실에서의 영성은 조금만 증가하겠지만 이 심상 세계에서 샤를은 신이나 마찬가지였다. 저 성좌의 효과는……. 이 심상 세계로 가져온 물건을 ‘강화’시켜주는 것이다.
‘음? 이 심상 세계로 물리 세계의 물건을 가져 올 수 있을 까?’
왠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건 나중에 해보기로 했다. 샤를은 석판 조각에 아직 힘이 더 남아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