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 “교수님은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물론이지. 다 나았다. 퇴원한지 며칠 됐어.”
샤를은 그녀들과 대화하다가 웹스에 대해서 떠올렸다.
웹스 가문은 헥센 가문 만큼이나 거대한 가문이었다. 동생인 리처드 웹스는 거대한 웹스 상단의 주인이고 형인 루크 웹스는…….
‘그렇군. 변호사 루크 웹스의 딸이 리카 웹스야.’
샤를은 리카의 이름을 드디어 기억해냈다. 주요 인물은 기억하기 쉽지만 주요 인물의 가족을 기억해내는 건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리카는 샤를에게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마치 아이돌을 만난 사생팬 같은 느낌이었는데 샤를은 그 기회를 살려서 리카 웹스와 친해져 볼 생각이었다.
웹스 가문의 사람이라면 기본적으로 영성을 얻게 될 확률이 높다. 혈족 계승으로 내려오는 신비학적인 특징들은 쉽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리카 웹스……. 흠. 공략집에서 봤던 것도 같은데.’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있는 만큼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있었다. 샤를은 게임을 하다가도 다른 사람들의 공략을 본 적이 있었는데 기억났다.
‘맞아. 한 번의 시련을 겪은 이후에 리카 웹스는 거의 무조건 영성자로 각성하게 된다고 했었지.’
시련이란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큰 정신적 충격을 겪거나 아니면 비밀 세계의 일에 휘말려서 봐서는 안 될 것들을 봐버렸다던가. 이런 재능있는 사람들을 보면 영입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조금 더 친해지고 나서 운이 좋다면 교단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겠지.
그때 샤를과 대화하던 여자들의 틈 사이로 몇몇 남자애들이 나타났다. 똑같이 이제 막 대학생이 된 듯한 앳된 얼굴을 지닌 소년들이 나타났다. 그 앞에 대표로 한 남자가 섰다. 다른 아이들보다 키가 훨씬 컸다.
키는 190cm가 넘어 보이고 전신이 근육질 덩어리였다. 누가 봐도 럭비 선수라고 알 수 있는 이 소년은 얼굴만 살짝 앳되어 보일 뿐이지 기본적으로 상남자의 관상을 하고 있었다.
“야, 이 기생오라비 같은 놈은 누구야? 선배냐?”
그의 말에 리카 웹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다. 좋은 시간을 보내는 차에 꼭 초를 치는 경우가 있다.
“피터. 교수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앙? 교수?”
사실을 알았음에도 껄렁껄렁하고 무례하게 대한다. 샤를은 보기만 해도 이 피터라는 남자가 왜 그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리카 웹스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리고 리카가 호감을 보이는 샤를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는 것이리라. 샤를은 꽤 동안이어서 그들과 나이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으니까.
샤를이 씨익 웃자 파기나레코르가 말을 걸었다.
-마스터, 죽일까?
-뭐?
-아냐, 놈을 죽여 버려 마스터!
약간 황당해졌다. 주인님 소리는 한 번도 안 하던 녀석이 발광하고 있었다.
-크르르르르륵. 감히 시비를 걸어? 놈을 오체분시 한 다음에 시체는 개 먹이로 던져줘라!
-진정해. 그냥 꼬마잖아.
마치 사이다패스를 연상케 하는 파기나레코르의 말투는 가만히 냅두면 게거품까지 물면서 눈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역시 이놈, 생긴 건 이쁘장하게 보여도 마도서의 자아가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미친 짓을 했다가 샤를은 미치광이 살인마가 되어 잡혀가게 되므로 의자에서 일어서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는 어느 학과지?”
“댁이 알아서 뭐하시려고?”
피터는 샤를을 향해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샤를은 놈이 같잖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자 빙그레 웃었다.
“자네처럼 무례한 친구가 자네의 교수에게도 그렇게 무례하게 굴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지. 그 교수는 자네의 불손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을지도 모르니 미리 전달해두는 게 좋겠군.”
“…….”
피터는 살짝 안색이 나빠졌다. 샤를의 말에는 이상할 정도로 강한 힘이 있었다. 그가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것은 사태의 해결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상대가 너무도 여유로운 태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지금 교수에게 협박하는 중이다. 그가 다니는 학과가 아니라 다른 학과의 교수이긴 했어도, 이런 식으로 구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피터는 뒤로 두 걸음 물러나서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혈기에 휩쓸려서 감정적으로 움직이는 것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야. 앞으로는 이성적으로 움직이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해두지.”
“죄송합니다. 제 무례를 사과드립니다.”
샤를이 고개를 끄덕이자 피터는 그대로 자기들의 패거리와 같이 사라졌다. 리카를 비롯한 여학생들은 또다시 샤를의 모습을 보면서 한 층 더 콩깍지가 붙었다.
파기나레코르가 징징거렸다.
-왜 안 죽여?
-그만 좀 죽여. 여긴 신성한 대학이라고.
-그치만 이전 주인들은 하나같이 시비 거는 새끼들은 다 쳐 죽였는걸?
-그치만이고 킹치만이고 나는 그런 사이코패스가 아니야.
-힝.
-성숙하게 굴어야지?
-힝입니다.
“그럼 다음 수업 때 만나자.”
“네에!”
여학생들과 대화하다가 점심시간이 끝나버렸기에 샤를은 작별 인사를 고했다. 샤를은 일단 대학을 벗어나 오후의 일정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러다가 샤를은, 움직임을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공원 옆의 길을 훑었다. 점심시간이 끝난 뒤의 대학교 내부는 고요했다. 그리고 고요한 그 길거리 위에 ‘무언가’가 있었다.
이제 막 신설한 가로등 위에 그것이 앉아 있다. 형태는 자세히 볼 수 없었지만, 눈알이 허공에 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주변을 지켜보고 있었다.
샤를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그대로 걸어갔다. 샤를이 지나가 그 눈은 계속해서 샤를을 따라오면서 주시했다. 별다른 공격은 하지 않고 계속해서 지켜보기만 할 뿐인 것 같다.
이윽고 그 눈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걷자 샤를은 긴장을 낮췄다.
-저거 봤어?
-응. 사역마 같은데.
-누군지 몰라도 대학 내부에 있는 마도사 한 명이 난리를 친 모양인 것 같은데.
사역마는 마도사가 부리는 하수인이었다. 저런 괴물은 대게 이계 하층에서 굴러다니는 놈들이었다. 낮 시간대에 대놓고 이런 짓을 하다니, 꽤 대담하다면 대담할 수 있겠다.
‘게임과 다른 부분이 있어.’
이 게임은, 보통 게임 시작하고 며칠 정도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시작한 당일부터 무명 교단을 제외한 나머지 교단의 교주들은 ‘씨앗을 주입받는다.’
샤를이 가진 신성의 씨앗과 효과는 비슷하다. 주입받으면 가진 바 능력이 증폭되고 모시는 신으로부터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강력한 권능을 받게 된다.
씨앗을 주입받으면 혼수상태에 빠지고, 깨어난 이후로도 인격이 변하거나 괴물이 될 수도 있었다. 각 교단의 교주 정도의 강력한 영성자가 아니면 감히 엄두도 못내는 위험한 의식이었다.
지금은 아직 대부분의 교주들이 각자의 씨앗을 삼킨 채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아직 아무도 행동할 때가 아니었다.
샤를의 예측보다 더 빨리 사건이 흘러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샤를은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형사도 그렇고, 이 대학 내부에서 갑자기 나타난 주시자 형태의 사역마도 그렇고, 이상한 사건이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지고 있어.’
샤를은 자신의 지식을 맹신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생각도 없었다. 큰 틀에서의 일들은 대부분 들어맞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의 사역마를 뒤로 하고 이동했다.
‘이제 오라클 경매장으로 가야겠어.’
샤를은 마도사다. 마도사는 준비하는 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마도구를 비롯해서 온갖 기이한 물건들을 통해서 자신을 강화하거나 결계를 만들고 주문에 사용할 시료를 습득한다.
그런데 프롤로그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재료는 전부 거래 재료로 써버렸으니 지금은 텅텅 빈 창고를 채울 시간이었다.
교문 앞에는 보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샤를은 마차에 올라타면서 말했다.
“린츠 거리로 가자.”
“동부 말씀이시군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보니는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말을 몰았다. 그는 오랫동안 이곳에서 지내온 훌륭한 마부로 도시 내부의 거리를 곳곳이 알고 있었다.
* * *
어떤 의미에서 샤를의 움직임은 반향을 일으켰다. 그건 피터와 그의 패거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피터는 인상을 찡그린 채 뒷마당에 가서 친구들과 대마초를 꺼내서 피웠다.
명문인 미스트위버 대학에서 이런 불법행위를 걸리면 무조건 정학이지만, 안 걸리면 그만이었다.
“아이씨, 그 새끼 누구야?”
“학기 초에 잠깐 본 적 있어. 무슨 고고학 교수라고. 그리고 집에 돈도 많다던데.”
“그냥 개한테 물렸다 쳐.”
“아 생각만 해도 열 받네. 혼자 다닐 때 쥐어패고 싶은데 보니까 핸섬 마차도 타고 다니더만.”
피터는 궐련을 피우면서 연기를 들이마셨다. 대마 연기가 들어오면서 몸은 나른해졌지만, 정신은 또렷해졌다.
샤를 헥센이라는 놈에 대해서 좀 알아봤는데 헥센이라는 이름은 꽤 유명한 집안이었다. 지금 당장은 틈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기회가 생기면 놈을 흠씬 두들겨 패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던 찰나에, 누군가 이 뒷골목으로 들어오는 것을 봤다. 망보고 있었던 또 다른 패거리 놈 중에 하나였다.
그런데 그 녀석은 다른 녀석의 목덜미를 잡아서 데리고 오고 있었다. 피터가 게슴츠레 눈을 뜨면서 보다가,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엥? 이게 누구야. 우리 범생이 댈러웨이 아니냐? 웨인, 그놈은 어디서 잡았냐?”
“망보고 있었는데, 요 앞에 지나가더라고.”
“자, 잠깐만. 놔줘. 난 그냥 여길 지나가고 있었다고.”
그놈을 끌고 오던 덩치 큰 웨인이 씨익 웃으면서 피터와 일당들을 바라봤다. 피터는 마침 잘됐다는 표정이었다.
“아, 스트레스 받았었는데 잘 됐다.”
잠시 뒤, 댈러웨이는 너덜너덜해진 채, 자신의 안경을 찾았다. 하도 맞아서 입술은 다까진 채였고 품에 있던 지갑도 빼앗겼다.
“요건 잘 쓴다.”
“꼰지르면 알지? 너희 아빠가 우리 회사에 다니는 거 잊지 마라. 내가 말 한 마디만 하면 넌 끝이야.”
피터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피터 일당은 낄낄거리면서 댈러웨이를 지나쳤다. 댈러웨이는 다 박살나서 떨어져 있는 안경을 겨우 집은 댈러웨이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일으켰다.
‘개새끼들. 피터, 글렌, 웨인……!’
하이스쿨에 다닐 때도 피터 일당은 그를 괴롭히는 주범이었다. 댈러웨이는 미스트위버라는 명문대에 입학해서 너무 기분이 좋았다. 피터와 다른 대학을 가게 될 거라고 믿었으니까.
겨우겨우 마련한 학비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들렸다. 피터 일당도 미스트위버 대학에 들어간다는 말 때문이었다.
애석하게도 피터 일당의 부모는 하나같이 자산가였다. 돈으로 미스트위버 대학에 놈들을 꽂아 넣은 것이었다.
‘절대 용서 못 해. 복수하고 싶어.’
댈러웨이는 분노에 가득 찬 채 속으로 울분을 삼킬 뿐이었다. 아직은 아니다. 며칠의 시간만 더 있으면, 그것을 완벽하게 탐독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댈러웨이는 그 남자에 대해서 떠올렸다.
그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서 자신에게 어떤 책을 건넸었다. 댈러웨이는 자신의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수상해 보이는 보라색 겉장이 보였다.
[아라네아의 서.]
피터 일당은 책에는 일절 관심 없었으므로 그냥 가방에 방치된 채 있었다. 그는 코를 휑하고 풀어서 피를 빼내고는 병원에도 가지 않은 채 행정관 옆 건물인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에 돌아오자마자 댈러웨이는 곧바로 그 책을 열었다. 맨 처음에는 이상한 제목의 이상한 삼류 소설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상당히 체계적이고 기이한 오컬트 서적이었다. 이걸 공부하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
댈러웨이는 그 책 안에 들어있는 끔찍한 주문들을 떠올렸다. 허무맹랑해 보이지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책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기운이 댈러웨이에게 어떤 확신을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재료가 좀 구하기 어려운 것들인데. 하지만 해볼 가치는 있는 것 같아.’
댈러웨이는 그 책을 꼭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