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화 - 이제부터 처음부터 창고를 채워나가야 한다. 샤를은 잡동사니 주변을 뒤졌다. 분명히 여기 있을 텐데.
대부분 가치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샤를은 그곳에서 잔돈으로 쓰고 남은 듯한 달란트 하나를 발견했다. 화려한 장식이 되어있는 알 수 없는 재질로 된 동전. 구리, 은, 금 등의 도금을 통해 구분하곤 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건 동 달란트 한 개로, 비밀 세계에서 거래되는 화폐의 가장 낮은 단위지만 현금으로 치면 약 오천 파운드나 하는 물건이다.
서민 4인 가족 월간 생활비가 30파운드 정도라는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비싼 물건이다.
‘문제는 이게 쓰고 남은 거란 말이지.’
창고 구석에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을 뿐. 원래의 샤를이 가진 재력은 얼마나 되었는지 상상도 안 간다. 그 재력을 ‘지배의 권능’을 얻기 위해 전부 소비해버리다니.
-달란트! 달란트으으!
파기나레코르가 간절한 눈빛으로 동 달란트를 바라보고 있었다.
-먹을래?
-나 줘! 주문 하나 맛깔나게 뽑아드릴게.
무슨 자동차 딜러처럼 얘기하는 파기나레코르를 보면서 샤를은 동전을 꺼내 들었다. 따로 의식을 거행할 필요는 없었다.
샤를이 달란트를 튕겨서 파기나레코르에게 던져주자, 파기나레코르가 양손으로 받았다. 본인의 얼굴만 한 물건을 쿠키 뜯어 먹듯이 먹기 시작했다.
-옴뇸뇸뇸.
-맛있냐?
끄덕끄덕.
샤를은 달란트가 저렇게 두부처럼 으깨지는 건 처음 봤다. 비밀 세계의 화폐인 달란트는 굉장한 내구도를 지니고 있으며 강한 영성을 포함하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영체로 나타난 파기나레코르가 조그만 달란트를 먹고 있는 광경은 꽤 귀엽기도 했다. 마도서일 때는 그냥 좀 그로테스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단 말이지.
달란트를 먹어치운 파기나레코르가 짧게 꺼억 하고 트림을 했다. 아니, 이 녀석 소화기관도 없으면서 뭐야 대체?
-자. 내 능력이 점점 돌아오는 것 같아. 거래를 했으니 대가를 지불하겠다!
-그래.
샤를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파기나레코르를 바라봤다. 홀로그램 파기나레코르는 손을 뻗었다. 그러자 캔디와 쿠키, 젤리 등으로 만들어진 슬롯머신이 나타났다.
-돌려돌려 돌림판!
-슬롯머신이잖아!
-아무튼 골라보라고.
고르는 것도 아니다. 샤를은 팔짱을 끼면서 영 믿음직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고전적인 앤틱 형태의 슬롯머신을 바라보았다.
파기나레코르가 캔디로 된 동전을 꺼내서 샤를에게 건넸다. 동전을 넣자마자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한다.
각 문양을 보니 샤를은 이것들이 뭔지 알 수 있었다. 이계의 상층에 존재하는 고대신들의 문양이었다.
‘혈주찬상, 수몰왕, 암격사, 조각기계의 문양도 있네. 사악한 4대신의 문양이 끼어있지만, 대부분은 중립적인 신들이야.’
혈주찬상, 수몰왕, 암격사, 조각기계는 하나같이 현 메트로폴에서 암약하는 4대 사이비 교단이 모시고 있는 이계의 신들이었다.
샤를은 이 돌림판 세 개를 합친 것이 바로 파기나레코르가 꺼낼 주문이라는 걸 깨달았다. 문양 세 개가 똑같다면, 그 문양이 상징하는 신의 주문일 것이다.
‘4대 악신의 주문은 안 나왔으면 좋겠는데.’
오른쪽 아래에 있는 캔디스틱을 아래로 당겼다.
슬롯머신은 빙글빙글 돌아가면서 여러 문양이 나타나다가 곧 멈췄다. 첫 번째 문양은 현 주류 교회인 광명교회의 신, 광명자의 태양 문양이었다.
‘다행인데.’
4대 악신의 주문만 아니면 된다. 그들의 주문을 쓰면 샤를이 오히려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문양도 광명자의 태양 문양이다. 그러다가 다음번에는 기묘한 등불처럼 생긴 문양이 떠올랐다.
‘이건 처음 보는 문양인데.’
샤를은 수십 번 플레이를 반복하면서도 자신이 이계에 존재하는 모든 신의 계보를 외우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주류 신들은 전부 외웠으니까 저 문양은 비주류의 문양일 것이다.
-땡. 확정 완료!
슬롯머신 아래의 출입구에서 기묘하게 생긴 책 한 권이 떨어졌다. 그렇게 두껍지는 않은 소책자 정도의 크기였다. 파기나레코르는 그 책자를 집어다가 자신의 본체에 집어넣었다.
샤를은 확정이 끝나자 파기나레코르의 페이지를 열었다. 첫 번째 페이지에, 주문이 적혀 있었다.
[■■■의 등불 – 본디 있던 광명자의 등불 주문이 어떤 특이한 힘의 간섭으로 개조되었다. 이 주문을 사용하면 신체 어디에서나 광원을 사용할 수 있다. 이 광원은 자체적으로 영성을 지닌다. 이 빛을 직시한 자는 이계의 정수를 맞이하기에 계몽 수치가 치솟는다. 이 빛을 마주한 자는 빛의 흐름에 이끌리게 된다. 주문의 주인을 정하시오.]
설명만 봐서, 샤를은 이 주문이 기존에 광명자의 등불이라는 주문인 것을 알 수 있었다. 효과도 같았다. 광명교회의 이단심판관들이 처음 배우는 주문이다.
직접적인 공격 효과는 없지만 다양한 유틸 효과를 제공한다. 매료, 상대를 미치게 만들기, 혹은 자신의 계몽 수치를 일시적으로 증가시키거나, 마법적인 어둠을 제거하는데 쓰이기도 한다.
여러모로 만능 효과를 가진 주문에 샤를은 그럭저럭 만족했다. 하지만 광명교회에서 사용하는 주문이라, 이걸 사용하면 광명교회의 성기사단으로 몰리거나 혹은 성기사단에서 쫓아올 가능성도 있었다.
-어라, 주문에 이름이 없네?
-응? 이거 광명자의 등불 아니야?
-아닌데?
-뭐라고?
-주문서에 적힌 거 안 보여? 이 주문은 광명자의 힘이 일부 깃들어 있긴 하지만 다른 존재의 힘도 깃들어 있어.
샤를은 슬롯머신 세 번째 문양이 특이하게 생긴 등불 문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광명자는 등불 주문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게 아닐지도 몰라. 그 또한 다른 존재에게 빼앗거나 다른 존재의 힘을 이용해서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광명자도 지금 치명상을 입은 상태니까.’
현재 광명자는 모종의 이유로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다. 왜 치명상을 입었는지 모르지만, 그것도 게임의 초반 설정 중에 하나였다. 플레이어가 개입하지 않는 이상 이런 설정은 변하지 않는다.
이런 부분 때문에, 샤를은 그의 주문을 빼앗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샤를은 주문서의 위에 손을 올렸다. 일단 이 주문은 광명자의 등불 주문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이름을 새겨 넣어도 될 것 같다.
무존자는 샤를이 만들어낸 가상의 존재였지만 이런 가상의 존재가 숭앙받게 된다면 특이한 효과를 발휘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존자는 아직까지 미약한 수준이라고, 샤를은 판단하고 있었다.
-무존자의 등불로 바꾸자.
-그럼 그렇게 해…….
파기나레코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샤를은 자신의 의식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저항할 틈새도 없이 그곳에 도착해 있었다.
머리 위로 별빛 몇 개가 빛나는 어두운 하늘이 보였다.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리자 부유석이 둥둥 떠 있는 기괴한 장소를 바라볼 수 있었다. 고개를 아래로 내리자 땅이 보이지 않았다. 이 주변에는 바위들이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여긴 심상 세계다. 그는 명상을 하지도 않았고 어떤 존재의 부름에 이끌린 것도 아니었지만 어느새 심상세계로 들어와 있었다.
‘뭐지? 어째서?’
-야, 파기나레코르!
소리를 쳤지만, 반향은 없었다. 샤를의 특성, 냉정이 흥분하고 있는 그의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는 분명히 이름을 정하고 있을 터였다. 여러 가지 가정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분명 무존자의 이름을 불렀지. 그리고 무존자의 이름이 주문에 새겨졌을 거야. 여태까지 존재도 없고 형체도 없었으며 그 영향력조차 미미했던 무존자가 드디어 신비학적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던 거지. 하지만 그것 가지고는 내가 이곳에 온 것이 설명이 안 돼.’
여긴 자신의 심상 세계기도 했지만 처음 보는 장소기도 했다. 샤를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거대한, 마치 오벨리스크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것을 알아채고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자 몸이 두둥실 떠서 저절로 이동하고 있었다. 오벨리스크 앞에 도착하자 오벨리스크 앞에 어떤 문양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저건, 무존자의 문양이잖아.’
샤를은 신을 창조하면서 문양조차 없는 게 말이 되냐고 혼자 문양을 창조해냈다. 마치 왕관처럼 보이기도 하는 어떤 좌(座)를 형성했고 그 위에 별빛 여러 개가 박혀 있는 모습이었다.
이른바, 성좌의 문양이었다. 이것을 심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무존자였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 오벨리스크의 하단부로 향했다. 그리고 그것이 있었다.
“계시의 석판 조각!?”
샤를은 너무 당황해서 입 밖으로 소리를 내버렸다. 그랬다. 이전 회차의 게임에서, 샤를이 마지막으로 얻었던 물건이 바로 계시의 석판 조각이었다.
엔딩 이후로 아이템이 초기화되니 당연히 없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물건이 샤를의 심상세계 속에 콕 박혀 있었던 것. 그러자 샤를은 ‘???’라고 적혀 있는 특성의 정체가 이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예상이 맞다면, 계시의 석판 조각이 만든 효과로 인해 내 심상 세계가 이렇게 구체화 되었을 거야. 명상을 하거나 혹은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열리는 심상 세계가 단순히 비밀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무존자로 인해 바로 열리는 건 그런 이유 때문일지도 몰라.’
그가 끌려온 이유를 알았다.
새로 개정된 경전에서, 무존자는 곧 샤를이었다. 그리고 무존자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신이니 샤를이 신이 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었다.
‘분명 계시의 석판 조각에는 가능성이라는 말이 있었지.’
[존재의 도약,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 계시의 조각. 운명의 완성]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새로운 세계, 어쩌면 샤를의 심상 세계를 이르는지도 몰랐다.
샤를은 곰곰이 생각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세계를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샤를은 이 공간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
주변에 떠 있는 거대한 부유석들은 끝도 없이 놓여 있어서 마치 자신이 우주 공간에 떠다니는 소행성 벨트의 한 공간에 서 있는 듯한 착각을 줬다.
샤를은 자신이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냈다. 손을 뻗자 저 멀리, 본래라면 몇 억 광년은 더 떨어져 있어야 할 별이 손에 이끌려 왔다.
한 손에 쥘 정도의 사이즈가 된 별에서는 특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바로 무존자에게 기도하는 소리였다.
한 소녀가 무릎을 꿇고 자신들의 가족들과 기도하고 있었는데 별의 시점은 계속해서 소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존자님, 오늘도 무존자님의 가호 덕분에 우리 가족이 무탈하였습니다. 항상 감사합니다.”
이건 무존자를 향한 기도였다. 하늘에 떠 있는 저 별 같은 것들은 무존자에게 내리는 기도였다. 샤를은 별의 힘 내부에서 소녀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녀는 독실한 무명 교단의 신도로 문데이크 거리의 빵집 주인, 플라크 부부의 딸로, 이름은 에세나였다. 에세나는 이제 열일곱이었고 중학교까지는 다니다가 자퇴하고 부모님의 빵집을 돕고 있었다.
샤를은 그런 물리적인 배경 외에도 에세나가 가진 힘을 깨달을 수 있었는데 그녀는 아직 영성자는 아니었지만 이미 영성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는 수준에 올라 있었고 얼마나 에세나가 영악한지도 알 수 있었다.
주변 또래를 거의 장악하다시피 하달까. 그녀는 천부적으로 타인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거나 조종할 수 있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에세나의 스탯창이 저절로 열렸다.
【제5교단 무명 교단의 신도】
【에세나 플라크】
[스탯]
[신체 1, 정신 4, 행운 1, 계몽 1]
[특성]
[정신 조종자, 심리주의자, 뛰어난 감각]
통찰 계열의 스킬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의 스탯을 볼 수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마도 무존자의 신자를 대상으로 스탯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 같다.
‘플로나 다음으로 제자가 될 만한 자질이야. 신체 능력은 일반인 수준이지만 정신 능력이 상당히 높아.’
샤를은 에세나에 대해서 기억만 해두었다. 별을 그대로 올려 보냈다. 그리고 밤하늘의 다른 별들을 둘러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