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이대로 신도들과 플로나가 그를 끌고 나갔다. 집회가 끝날 때까지 루센 에포크는 플로나가 잡아두고 있을 것이다.
“자, 우리를 거짓된 미혹에 시달리게 했던 종자는 사라졌다. 이제 날 믿느냐?”
“믿습니다!”
“교주님을 한순간 의심한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저를 벌해주십시오!”
루센에게 휘둘린 신도들이 무릎을 꿇으면서 벌을 청하자 샤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들을 용서했다.
“너희는 그냥 사악한 미몽에 휘둘린 것뿐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집회에서 3번, 잡일을 담당하는 것으로 너희들의 죄를 사하겠다. 솔선수범함을 보이거라.”
“교주님은 관대하시다!”
“그분이 관대한 처분을 내리셨다!”
“감사합니다! 교주님!”
“회개하며 살겠습니다!”
샤를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손을 들어 올렸다. 이 광신도들을 어떻게든 정화해야만 한다.
“자, 오늘의 일로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불신자와 미혹에 빠진 자들이 많이 있는지 보았을 것이다. 이런 어둠 속에서 헤쳐 나갈 방법은 바로 믿음이다. 내가 무존자와 만났다는 증거를 여기 보이겠다.”
경전을 꺼내 들었다. 기존의 경전보다 훨씬 더 세련된 경전은 위에 달린 조명에 반사되어서 아름답게 반짝거렸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경전이다. 내가 무존자임을 자각하고 나서 쓴 경전이니라.”
이 경전에는 기존의 사악한 교리를 완전히 일체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 채워둔 상태였다. 기존의 사악하고 인종차별을 권장하다 못해 타 인종을 인신공양을 해야 한다는 미친 교리 대신에, 서로를 사랑하고 존엄을 요구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적대 대신에 화합을, 강탈 대신에 공유를 넣자 그럭저럭 평범한 종교가 되었다. 이 경전을 바탕으로 샤를은 신도들의 체질을 개선할 생각이었다. 적어도 경찰들에게 쫓기는 일은 없게끔.
“기존의 경전은 잊어라. 이 경전. ‘존엄의 서.’야 말로 진정한 무존자의 교리이며 나의 뜻일지니.”
“교주님 만세!”
“교주님께서 새로운 경전을 반포하셨다!”
그들의 소란이 가라앉자 샤를이 외쳤다.
“그리고 더불어 다른 교에 심취한 불신자들을 색출하는 자에게 상을 내리겠다. 거짓된 현혹은 없도록 하는 게 원칙이지만, 불가피하게 현혹된 자들은 내가 다루겠다.”
당부를 끝내둔 샤를은 집회장을 나왔다. 이제 루센 에포크를 따로 면담할 시간이었다. 식은땀이 나는 걸 느끼고 샤를은 자신의 목을 만져보았다.
‘후. 무리도 아니지.’
샤를의 특성이 있더라도 샤를의 몸에 깃든 것은 지구인 김연수였다. 그러니 이런 미친 상황을 주도하는데 긴장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롤플레잉에 익숙한 VR 고인물이라도 그게 실제라는 것을 깨달으면 긴장하기 마련이었다. 잠깐 땀을 닦은 다음에 샤를은 플로나가 준비한 다른 창고로 이동했다.
그곳에 루센 에포크가 꽁꽁 묶여서 의자에 앉혀 있었다. 주변에는 플로나를 비롯해 충성심이 높은 신도들이 각자 손에 무기를 쥔 채 둘러싸 있었다.
“이제 이야기할 준비가 된 것 같네.”
“꺼져라 이 사악한 종자야!”
“회개통이 준비되었습니다.”
‘응? 회개통?’
플로나는 싱긋 웃으면서 옆에 드럼통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가리켰다. 공구리 담그는 폭력 조직원이 된 것 같은 기묘한 기분을 느낀 샤를은 이 분위기를 이어가기로 했다.
“그건 됐다. 루센. 왜 무존자를 배신했느냐?”
“나, 난 모르는 일입니다!”
-쟤한테 그거 시켜봐. 조각 기계 개xx라고 해보라고.
-어허. 그런 말 하면 못써.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를은 능글능글 웃으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옆에 있는 신도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귓속말했다.
“정말 모른다고? 그럼 조각 기계 개xx라고 해봐.”
“조, 조, 조, 조, 조까라 이 개새끼야!”
퉤! 루센이 침을 뱉기 전에 샤를이 뒤로 한걸음 물러나서 침을 피했다. 아직도 반항기가 남은 걸 보고 그를 둘러싼 신도들이 그를 미친 듯이 다구리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군. 이단자.”
“신성한 무존자님의 벌을 받아라!”
-어우 너무 심하게 패는데.
-댁이 의도한 거잖아!
-아닌데? 이제 좀 말려야겠다. 내가 재밌는 마법 보여줄까?
-응? 마법이라고?
계속 얻어맞아서 너덜너덜해진 루센을 보고 샤를이 다가갔다.
“폭력 멈춰!”
-……
그러자 신도들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이 파워……. 엄청나군. 이것이 권력이라는 것인가? 샤를은 권력이 가진 치밀하고도 사악한 실체를 느끼면서 어쩌면 이것이 마법보다 더 강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친.
“루센. 나는 네게 별 악감정은 없다네.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본인의 선택이니까 말이지. 조각 기계와 무존자 말이야.”
“닥쳐! 조각 기계님은 실존하지만, 무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그것도 모를 줄 아는가?”
“글쎄. 루센. 조각 기계를 본 적 있는가?”
“나는 그분의 은총을 마주한 적이 있다. 손에서 하얀색 빛이 밀려왔고 나는 그것에서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샤를은 루센의 말을 듣고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건 바로 영성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 영성이란 본디 인간이 가진 영혼의 힘으로 누구나 갖고 있지만 아무나 깨울 수는 없는 특별한 것이었다.
오로지 비밀 세계의 사람들만이 이 영성을 깨닫고 사용할 줄 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을 영성자라고 부른다. 그리고 샤를은 수백 번의 경험으로 영성을 아주 자유자재로 다룰 줄 알았다.
경험이 너무 쌓여서 어쩌면 본래의 샤를보다도 더 잘 다룰지도 모른다.
“이런 걸 말하는 것이냐?”
샤를의 손에서 기이하게 생긴 연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뭉게뭉게 하얀 것이 솟아오르자 루센은 마치 엑토플라즘같은 그것을 보면서 기이한 표정을 지었다.
“그, 그건 분명히 사제님의…….”
“이건 영성을 시각화한 것에 불과하다.”
“여, 영성?”
“사람의 영혼에 깃든 힘을 말하는 거지. 그것도 모르는 것을 보면 아직 교단의 중추에 들어선 것은 아니군. 평범한 말단 첩자 정도구나.”
“그, 그게 무슨.”
샤를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진짜 교단의 중추에 있다면 영성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이 지식은 신비학의 가장 기초였으니.
그리고 말단 첩자 정도만 파견해서 무명교단을 감시한 것을 보면 조각구원회에서는 무명교단을 적으로 보고 있지도 않은 것이다.
“네가 본 것은 조각 기계의 은총이 아니라 속임수라는 말이다. 그들이 해내는 걸 나도 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자, 이것에도 네가 느꼈던 그 힘이 느껴지느냐?”
평범한 인간은 영성을 마주하고도 그 실체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루센은 예외로 영성을 느낄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인 듯싶었다.
“느,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내 영혼의 힘이다. 그리고 무존자의 힘이기도 하지. 자 보아라! 그놈이 보여줬던 나약한 영성과 달리 신의 영성을!”
“……아아. 따뜻해!”
샤를은 기이하게 눈이 풀린 루센을 보면서 약간 소름이 돋는 것 같아서 손을 살짝 뒤로 빼고는 말했다.
“이제 무존자를 믿겠는가?”
“무, 무존자를 믿습니다.”
-이거 완전 사기꾼이네.
-닥쳐.
혼란에 빠진 루센을 보면서 샤를은 그를 ‘지배’하기에는 지금이 최적의 타이밍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순히 믿는 것을 넘어서 루센을 지배한다. 그것이 조각구원회를 무너트리려 하는 샤를의 첫번째 계획이었다.
손을 뻗었다. 지배의 권능을 발동하자 루센의 눈이 조금 더 흐리멍덩해지는 것을 보았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지배의 권능이 적용되는 찰나, 샤를은 뭔가의 간섭을 느꼈다.
-놈의 영혼에 무언가가 있어!
-깜짝이야.
샤를은 놀라면서 손을 뗐다. 영혼 가장 깊숙한 곳에 누군가 ‘장치’를 해뒀다. 이지를 잃고 매료되는 순간 루센의 몸이 이리저리 뒤틀리기 시작했다.
“끄아아아아아악!”
“교, 교주님?”
플로나가 당황한 듯 샤를을 보았다. 샤를은 곧 사람들을 뒤로 물리게 했다.
“놈이 곧 괴물로 변한다. 다른 신도들에게는 무기를 들고 오게 해라.”
“알겠습니다.”
플로나가 눈짓하자 충성스러운 신도 여럿이 자리를 비워서 도구들을 가져왔다.
-이건, 이계가 열리는 형태는 아닌데.
-그래 맞아. 놈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있어서 그걸로 그냥 계몽 수치가 미친 듯이 치솟고 있는 것뿐이야.
-그럼 아마 마도구나 유물 같은 거겠네.
-그렇겠지.
샤를은 상대가 놈의 머리에 무슨 장치를 해뒀는지 알아챘다. 머리에 조각 기계의 축성을 받은 ‘볼트’를 넣어서 조각 기계를 배신했을 때 발동되도록 해둔 것이다.
이런 악랄한 수법을 사용하다니. 저절로 눈이 찌푸려진다. 물론 샤를의 ‘지배’도 도덕적인 방법이라곤 할 수 없지만, 머리에 볼트를 이식하는건 선을 넘었지.
계몽 수치는 높으면 높을수록 주문과 이형의 것에 친해지게 되며 더 강한 주문을 사용하거나 주문서가 없어도 주문을 발동할 수 있게 해준다.
하지만 높아진 계몽 수치를 정신력이 감당하지 못한다면 미쳐버리거나 백치가 되고 심할 때는 저 루센 에포크처럼 내면에 숨겨진 괴물을 꺼내게 된다.
――뚜둑.
“그으윽. 그으르르르르륵.”
놈의 몸에서 시뻘건 핏물이 치솟는다. 내장과 살점이 뒤집히면서 팔과 다리가 뒤쪽으로 당겨지더니 네 발로 걷는 기괴한 짐승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묶인 줄을 그대로 풀어버리는 괴력을 발휘했다. 무기를 가져온 신도들이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젠장, 이게 실제라고? 이게?
-설마 멘탈 나간 건 아니지?
-당연히 멘탈이 나갔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샤를은 그들을 바라보면서 무언가 한마디 할 필요성을 느꼈다. 생각하자마자 그의 몸은 저절로 반응해 움직이고 있었다.
“보아라. 저자는 조각 기계라는 사악한 이교의 신을 믿었기 때문에 괴물로 변한 것이다! 스스로의 정체를 드러냈으니 이제 놈을 처단하자!”
“처단하자!”
플로나는 치마 아래에서 흉악한 크기의 모닝스타를 꺼냈다. 도저히 그곳에 들어있으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크기의 양손 둔기는 여기저기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었다.
‘저것도 유물이었던가?’
샤를은 플로나의 스탯이 가물가물했다. 나중에 한 번 상대를 간파하는 스킬 같은 것을 익혀서 제대로 알아볼 필요성을 느꼈다. 고개를 돌리자 괴물은 완전히 변신을 완료했다.
마치 지옥에서 기어 나온 것 같은 끔찍한 흉악함. 이런 괴물은 자체적으로 주변 사람들의 계몽을 높이는 효과도 있었다. 서서히 계몽이 오르는 것을 느낀다.
-야, 네가 저 괴물을 깨웠잖아. 그럼 네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내가 한 건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저놈이 저절로 깨어난 거고.
지배의 권능을 제대로 사용할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다. 루센 에포크를 첩자로 집어넣으면 그것만큼 괜찮은 게 없는데 말이지.
‘아무래도 이 세계는 완전히 내가 예상한 대로만은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아.’
큰 계획을 세웠지만,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다. 이전 게임에서 샤를로 플레이할 때 루센 에포크를 이중첩자로 쏠쏠하게 써먹은 기억이 있는 샤를은 입맛을 다셨다. 머릿속에 함정이 있을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누군지 몰라도 이런 함정을 제작한 건 치밀하다는 뜻인데.’
샤를은 현재 조각구원회의 누가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생각하던 차에 괴물은 완전히 깨어났다.
그리고 첫 번째 타겟을 정했다. 그건 바로 샤를이었다. 마치 내재된 본성이 깨어나는 듯 놈은 순식간에 벌떡 일어나서 달려들었다.
“감히 교주님을 공격하려고 하다니! 용서 못 해!”
휘두른 모닝스타가 적중했다. 강력한 스파이크가 살점을 헤집으며 육중한 철퇴의 질량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다리가 그대로 부러진 채 쓰러졌다.
괴물이 가진 힘은 사람의 힘을 능가했지만, 플로나는 그 힘조차 능가했다. 저항하는 괴물은 마치 산채로 매장당하는 것처럼 압도적인 폭력에 파묻혔다.
“크억! 컥!”
“죽어라, 죽어! 이 배신자!”
플로나는 아주 능숙하게 철퇴를 이용해 네 개의 다리를 모두 작살냈다. 그리고 발악하듯 날아오는 촉수 돌기들을 피하면서 철퇴의 가시로 촉수를 찢어버렸다. 그리고 철퇴를 들어 올리면서 주변의 신도들을 바라보면서 외쳤다.
“놈을 죽이자! 무존자께서 지켜보신다!”
그 말을 듣고 용기백배해진 다른 신도들이 저마다 든 무기로 괴물을 내리쳤다.
“케에에에엑!”
“죽어라! 사악한 이단 괴물!”
“무존자께서 지켜보신다!”
뿌직. 뿌직.
괴물은 강하게 저항했지만, 워낙 둘러싸고 있는 신도들이 많았다. 좀 전처럼 다구리가 진행되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샤를이 마법의 단어, ‘폭력 멈춰’를 사용하지 않아서 죽을 때까지 두들기고 있다는 점일까.
-이거 완전 양아치네. 네가 깨웠으니 네가 없애야지.
-꺼억. 꼬우신가요?
샤를은 흥미진진한 전투를 지켜보면서 괴물이 죽는 것을 바라보았다. 놈은 완전히 찌그러진 채 그대로 사망했다. 괴물(이었던 것)을 보면서 샤를이 말했다.
“자, 이제 그만해도 됐다. 이자는 정화되었다.”
“우리가 승리했다! 괴물 배신자를 처단했다!”
“처단했다!”
“우리가 이겼다!”
정화되었다는 둥 사이비 교주처럼 말하긴 했지만, 샤를은 현대인의 상식을 벗어난 전근대식 해결법에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이 신도들은 하나같이 맛탱이가 간 것 같다.
아니, 사실 현대에서도 백 년 전까지는 창이나 칼 들고 싸웠었다. 1차 세계 대전 때는 말 탄 기병과 탱크가 함께 있던 시대였으니.
‘……어쩔 수 없어. 이 미친 세상으로 들어오게 된 내 운명을 저주하거나 익숙해지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