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인종이라는 카테고리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한데 묶는다.
‘차별’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인종의 벽은 유효하고, 그런 의미에서 인종과 관련된 범죄는 여전히 일어나며, 인종 간 넘을 수 없는 벽이 존재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그리고 동양인, 그러니까 아시아권 사람들은 그런 인종들 중에서는 타 인종들에게 상당히 차별받기도 한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들이 많다.
가령-
백인들이 주를 이루는 할리우드 영화에서 당당히 주연을 차지하는 것이라든가.
유명 채널이 제작하는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드라마의 주연 배우가 된다든가.
혹은.
구기종목 스포츠에서 최상위권의 세계적인 선수가 된다든가.
여하튼.
이런 고정관념이 존재하지만.
한 사람은 조금 달랐다.
“최도윤 배우! 여기 좀 봐주세요!”
“최도윤 배우! <데드 로드> 시즌 4 촬영을 끝내고 돌아온 소감이 어떠십니까!”
“<더 보이머> 후속작을 제안받았다는 루머가 있습니다! 한 말씀 해주시죠!”
지금.
“꺄아아악!”
“최도윤! 최도윤!”
공항 입국 게이트에서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채 웃고 있는 한 남자.
최도윤 말이다.
한때 몰락했고.
그러나 회귀해서 개과천선한.
한국이 낳은 최고의 배우.
아직 서른도 안 됐는데 국내만 따져도 쌓은 커리어는 이미 어마어마한 수준이라 대적할 배우가 없는 데다-
일본, 미국 등지에서 쌓아 올린 필모그래피 역시 ‘동양인 배우’로는 전무후무한 수준.
그런 배우가.
오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드라마, <데드 로드> 시즌 4 촬영을 마친 후에.
입국 기자회견.
스포츠 스타나 올림픽 선수단 귀국, 혹은 엄청나게 유명한 사람이 아닌 이상 이 정도 규모로 열리는 경우는 없다.
아니,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이런 규모는 없을 것이다.
공항 자체가 거의 마비될 지경이었으니까.
몰려든 기자의 숫자만 백 명이 넘고.
팬들은 그 몇 배다.
그나마도 공항 측이 통제해서 망정이지.
그보다 훨씬 많은 수의 팬들이 공항 밖을 서성이고 있었다.
도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기 위해서.
“최도윤 배우님, 귀국 후 국내 활동이 이어질 거란 전망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한 말씀…….”
“할리우드에서 수많은 제안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혹시 염두에 둔 작품이 있을까요?”
“<더 보이머>의 성공으로 할리우드가 한국 배우들에게 꽤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 선구자로서 한 말씀 해주신다면…….”
기자회견.
이제는 거의 도윤의 전담 프로듀서가 되다시피 한 빌이 오른쪽에 앉고.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준 덕에 꽤 유명해진 성호가 왼쪽에.
그리고 성호 옆에는 민주와 두칠이.
사뭇 다른 캐릭터의 다섯 사람이 미동조차 하지 않고 평온한 표정으로 기자와 팬들을 마주하는 광경은-
묘하게 어울렸다.
“한국에서의 활동은 아직 정한 바 없습니다.”
이런 가운데.
도윤이 입을 열고 꺼낸 첫마디는 기자들을 꽤나 실망시켰다.
하지만 아직 완전히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이전에도 그렇게 말씀하신 뒤 강미나 작가의 작품에 특별출연한 바 있습니다. 혹, 이번에도 그럴 계획이 있으십니까?”
“아뇨. 없습니다. 이번 귀국에서는 작품 활동 없이 지낼 생각입니다. 대신…….”
대신이라는 단어에.
기자들의 귀가 쫑긋한다.
최도윤.
그 행보만으로도 포털 메인을 장식할 만큼 영향력 넘치는 배우.
그런 배우가 어딘가에 출연한다는 건.
그 작품의 성공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출연한 모든 작품이 그랬었으니까.
그래서 기자들은 혹 도윤이 작품이 아니라 예능이라도 출연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팬들과의 만남을 준비할 생각입니다. 팬카페 ‘달달한도라떼’ 회원분들을 못 뵌 지 꽤 오래됐거든요.”
막상 도윤이 팬미팅을 가진다는 이야기를 꺼내자.
기자들은 무척이나 실망했고.
팬들은 크게 환호했다.
“역시!”
“오빠는 다르다니까!”
“형님! 절 가지세요! 으아아악!”
흥분한 나머지 앞으로 뛰쳐나오려다 다른 팬들의 어깃장에 제지당한 팬이 있긴 했지만.
도윤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회사 운영에도 계속 신경을 쓸 예정입니다. 도엔터는 지금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지만, 여전히 성장하는 회사고 그래서 제가 해야 할 일을 할 생각입니다.”
팬미팅과.
회사 운영.
“아 그리고, 하나 더 있네요. 도엔터에서 진행하는 신인 배우 오디션의 심사위원으로 참가해야 합니다.”
배우 심사위원까지.
기자들이 원하는 것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정들.
팬들은 좋아하지만.
어쨌든 도윤이 어느 작품에 출연하고 그래서 시청률이나 관객이 얼마나 나올 것인지 예측하고 싶은 기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은 정보가 아닌 셈.
뭐.
도윤이 그걸 신경 쓰진 않았지만 말이다.
“그럼, 기자회견은 이쯤 해서 마치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기자회견은 채 1시간도 이어지지 않았고.
이대로 보내기 아쉽다는 듯 일어나는 도윤을 향한 기자들의 아우성이 있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몇몇 사정 모르는 기자들이나 끈질기게 달라붙었지, 그나마도 금방 제지당했다.
“왜?”
“야, 그냥 가만히 있어. 괜히 저기 있는 팬들한테 걸리면 그날로 메일함 터지고 전화통 불 난다.”
“뭔 소리야?”
“팬들 지랄맞다고.”
물론.
도윤의 소식이라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무례와 행패도 불사하는 기자들에게나 지랄맞다.
여하튼.
도윤은 기자들의 질문은 사뿐히 잘라주고 공항을 나가는 동안 마주하는 팬들의 종이에 일일이 사인하고 사진을 찍어주었고.
“형, 이대로 가면…….”
“또 라이더 하면 죽는다.”
“아, 그. 평생 공항 못 벗어날 것 같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성호의 말에 결국 못 이기는 척.
팬들에게 아쉬움을 표하고 공항을 빠져나갔다.
그 뒷모습은.
무척이나 빛이 나는 것 같았다.
* * *
<더 보이드>.
오리진 코믹스 원작의 ‘보이드 강’이라는 한국인 히어로 캐릭터를 실사화한 영화.
모두의 우려에도 불구-
한국에서만 무려 1,2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전 세계에서 3억 달러 이상의 수익을 기록하며 엄청나게 흥행했고.
그 결과.
속편 제작이 확정되었고.
최도윤이라는 배우의 이름은.
전 세계에 확실히 각인되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성과.
코믹스에서도 아시아계 히어로는 별다른 인기를 끌지 못하고, 때문에 처음에는 오리진 스튜디오의 이름값에 기대어봤자 소용없을 거란 평가를 받았는데.
그 예상을 완벽하게 깨뜨리고, 성공적으로 착륙(Landing)한 것이다.
그 덕분에 도윤은 일약 할리우드의 스타가 되었고.
<데드 로드> 시즌 4는 종전 두 배의 몸값으로 출연했으며.
이제는 할리우드의 수많은 제작자들에게 러브콜을 받고 있었다.
쉽게 말해.
국내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본을 쌓아두고 고를 만한 위치에 오른 셈.
다만.
-최도윤? 야, 몸값이 얼만데!
-그래도 일단 출연만 하면 대박이잖아요.
-대박이고 자시고 일단 돈이 문제라니까? 그리고 하겠냐? 해외 물 잔뜩 먹고?
이런 이유로 국내에서의 제안이 뚝 끊겨 버렸다.
몇몇 친한 제작자를 제외하면 말이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없다.
마음에 드는 작품이 나타나면 그냥 출연하면 그만이다.
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사업을 하는 이상, 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제공받을 수도 있을 테고.
참고로.
회사는 도윤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것처럼 아주 잘 돌아가고 있었다.
감사를 진행한 청진그룹에서 상당히 놀라워할 정도다.
물론 초기에 발생한 인건비를 비롯한 각종 비용을 메우려면 아직 조금 걸리겠지만.
그마저도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을 만큼 성장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대부분 도윤의 출연료가 주요 수입이라지만…….
중요한 건.
처음에 뽑은 배우 세 명이 모두 시작부터 좋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셋 모두 영화와 드라마 각 분야에서 좋은 데뷔전을 치렀고.
이후 조연급으로 활약하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가고 있는 것.
특히.
이한영은 차세대 ‘충무로 황태자’로 불릴 정도.
“생각 이상으로 다들 잘해주고 있어서 이제 걱정 없을 것 같아요. 이번 오디션도 좋은 신인들 뽑으면 좋겠네요.”
“그래야지. 해영이 네가 보기엔 괜찮은 친구들 있어?”
“어, 음…… 있긴 있는데 일단 대표님 생각 좀 들어보고요. 유 선생님은요?”
“나야 뭐, 다 늙어서 누굴 뽑나. 가르치는 것도 힘든데. 허허.”
“아직 정정하신데요.”
그리고 해영과 광섭은 여전히 도엔터의 트레이너로 활약하고 있었으며.
여기에.
“……두 분 중 어딜 맞춰야 할지 잘 모르겠네요.”
이전에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함께했던 이승원이 새로운 트레이너로 합류했다.
정확히 말하면.
도엔터와 배우 계약을 맺으면서 트레이너 계약도 함께 맺은 것.
참고로 해영도 마찬가지.
배우 겸 선생님이라고 해야 할까.
신인들이 커주는 동안.
도엔터의 기둥이 되어 줄 배우들인 셈.
“근데 어떻게, 용케 한국에 왔구나. 미국에서 계속 붙잡지 않든?”
“붙잡았죠. 근데 해야 할 일을 두고 계속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오빠, 아니 대표님. 대표님은 제발 하나만 좀 할 필요가 있어요. 몸이 두 개예요? 혹시 미국에도 최도윤 한 명 더 있는 거 아니에요?”
이런 와중 해영의 농담에 도윤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기야.
스케줄을 보면 살인적이긴 하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도윤은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쪽잠으로 적당히 피로를 푸는 등.
쉴 때는 확실히 쉬는 것.
아까도 집에서 한숨 푸지게 자다가 회사로 나왔으니까.
여하튼.
모든 게 잘 돌아가고 있었다.
배우 도윤으로서의 일상도.
대표 도윤으로서의 일상도.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일상도.
아.
해영과 선우가 얼마 전 헤어지긴 했다만.
둘의 화려한 전적을 볼 때.
조만간 울며불며 다시 만날 것 같았다.
그리고…….
-도윤아, 응? 제발, 제발 딱 한 번만.
-저번에도 한 번만이라고 해서 나갔잖아요.
-이번이 진짜, 진짜 마지막!
-마지막이면 저 앞으로 안 보시게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이렇게 대뜸 연락해서 만나자고 안 할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
강미나는 여전히.
도윤을 끈질기게 원하고 있었다.
이제는 뭐, 자신의 작품에 출연했던 배우들보다 훨씬 유명해져서 어지간한 배우들 몸값은 상대도 안 되는데.
이런 모습을 보면 꼭 신인 작가 같았다.
-이번엔 진짜 특별출연도 없다고 못 박아뒀는데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네가 나오면 대박이라는 거지!
-저 거짓말쟁이 만드시려고.
-아니야, 내가 기사 낼게! 내가 협박해서 출연했다고. 최도윤의 비밀을 무기로 협박했다!
-그럼 더 큰 일 날 것 같은데.
결국.
-알았어요, 스케줄 보고 말씀드릴게요.
-진짜지? 진짜지?
도윤은 수락했다.
뭐.
사실 나쁠 건 없다.
강미나 작가와는 많은 작품을 하기도 했거니와…….
나가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기자들 또 난리 나겠네. 형, 요새 기자들이 저한테 자꾸 연락 와요.”
“성호야, 그건 네가 호구 같아서 그런 게 아닐까?”
“누나, 호구라뇨. 그냥 쉽게 보이는 남자라고 해줄래요?”
성호와 민주, 두칠은 이 소식을 접하곤 이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작품이 뭐든.
작가가 누구든.
상황이야 어떻든.
연기만 할 수 있다면.
행복해하는 천생 배우인데.
“어쩔 수 있나. 국내 복귀작으로 치지 뭐.”
도윤의 그 말에.
셋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피식거렸고.
도윤은.
늘 그래왔던 것처럼.
강미나가 보내온 대본을 집어 들어.
첫 페이지를 넘겼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