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96화 (196/200)

196.슈퍼히어로 랜딩(1)

도윤의 커리어는 그리 길지 않다.

다른 배우였다면 아직 신인이라 불려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5년 이하의 필모그래피.

하지만 도윤은 그런 필모그래피에 무려 열 편 가까운 작품에서 주연을 맡아 열연하고, 모두 성공시켰다.

그래서.

그 덕분에 이런 평가를 받는다.

드라마 쪽에서는 두각을 드러냈지만.

상대적으로 영화를 잘 찍지 않아 아쉬운 배우.

물론 도윤은 한국에서만 두 개의 영화를 찍었다.

<기적의 레시피>.

그리고 <협조>.

여기에 지금 준비 중인 <너를 추억하며>까지 합치면 세 작품.

드라마를 전문적으로 하는 배우가 있고, 영화만 전문적으로 하는 배우가 있고, 둘 다 활발히 오가는 배우가 있다.

도윤은 그 중 세 번째였고.

그래서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너무 좋은 필모그래피를 쌓고 있었지만-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해야 할까.

여하튼 그런 평가다.

물론.

어디까지나 ‘숫자’에 한해서였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팬들이.

도윤을 스크린에서 더 보고 싶은 마음에 한 평가라고 해야 할까?

안 그래도 도윤은 최근 들어 드라마보다는 영화 쪽에 조금씩 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짧고 굵게 칠 수 있고, 때로는 드라마보다 임팩트도 강하며, 감독과 협의할 여지도 많은 데다.

결정적으로, 기억에 더 잘 남는다.

배우에게나.

사람들에게나.

뭐, 좋은 작품은 영화든 드라마든 가리지 않고 기억에 남겠지만 말이다.

하여간.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라는 거, 알고 있지?”

빌의 말마따나.

놓칠 수 없는 기회가 맞다.

슈퍼히어로 장르에.

주연 보장.

이만큼 좋은 조건이 또 있을까?

배우에게는 더할나위없는 제안이고.

20대의 나이에 거대한 명예를 거머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

하지만.

늘 그렇듯 도윤에게는 원칙이 존재한다.

“기존 작품들 먼저 찍고 가겠습니다.”

“이런 제기랄.”

빌이 학을 뗄 만큼.

대쪽같은 신념이.

그리고 그 신념은.

지금의 도윤을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미 도윤은 ‘반드시 약속을 지키는 배우’로 소문이 나 있다.

상황이야 어떻게 되든.

한번 체결한 계약은 이상하리만치 철저하게 지키는 배우.

계약을 지키는 게 당연한 건데 그게 무슨 대단하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 바닥은 원리원칙이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돈으로 위약금을 해결한 뒤 다른 작품으로 갈아타는 건 말할 필요도 없을 만큼 흔하고-

계약 위반을 해놓고도 배 째라고 나오는 일도 잦다.

그런 의미에서 광고를 찍든, 작품을 찍든 원칙대로만 가는 도윤은 이 바닥에서도 호평을 받고 있는 것.

배우가.

연기력만으로 승부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후우.”

물론.

빌은 미칠 노릇이었지만 말이다.

‘당장 다 때려치고 미국에 가도 모자랄 판에…….’

빌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었다.

이런 기회를.

지금 하는 작품 때문에 걷어차겠다?

아무리 봐도.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연을 거절할 만한 들마나 영화는 아니다.

어디 유명 스튜디오에서 찍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명 프로듀서나 감독이 참여한 것도 아니다.

그저 그런.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작품.

하도 열이 뻗쳐서 오는 동안 비서에게 부탁해 대본을 받아봤는데.

아무리 봐도 아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이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연이 될지도 모르는 동양인은 꿈쩍도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볼 수는 없어?”

“제 조건은 변하지 않습니다.”

“망할.”

도윤은.

그렇게 생각한다.

현재에 충실하자고.

미래도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회귀라는 거대한 일을 겪은 시점에서 도윤은 미래보다는 현재를 좀 더 치열하게 살아가기로 마음먹었고.

지금까지 계속 그래왔다.

기회?

좋다.

하지만 예측할 수 없다.

자신이 아는, 회귀했기에 완벽하게 알고 있는 미래를 제외한다면.

물론 미래가 두려운 건 아니다.

다만.

아직 벌어지지도 않을, 확실치도 않은 일 때문에 지금 잘되고 있는 것들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자신이 회귀 전 저지른 과오를 반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니까.

“내가 대신 위약금을 처리해 준다고 해도? 저쪽에서 화를 내려다가도 금액을 보고 수긍할 만큼 많은 돈을 준다고 해도?”

도윤은 가타부타 말없이 빌을 바라봤고.

빌은 마침내 도윤을 설득하는 게 불가능함을 완벽하게 납득했다.

아무리 이 산업이 돈으로 움직인다지만.

결국 그 돈으로 고용하고, 움직이고, 연기하고, 대중들 앞에 서는 건.

바로 배우다.

그 배우가 저렇게 요지부동인데.

방법이 있을 리가.

‘아니. 있지.’

그래서 빌은 머리 좋은 프로듀서답게 재빨리 마음을 고쳐먹었다.

“좋아. 정 그렇다면 한번 해보지.”

“뭘요?”

“설득해 보겠다는 거야. 그쪽을. 네가 그렇게 나온다고 내가 포기할 것 같아? 그럴 리가!”

포기.

빌의 사전에 포기라는 단어는 없었다.

한번 꽂힌 일은 반드시 해결했고.

그게 바로 현재의 빌을 만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가서 설득해 보지. 무조건 되게 만들 거야.”

“괜찮겠어요?”

“그럼, 지금 하던 거 다 그만두고 나랑 미국으로 갈래?”

도윤이 씩 웃었다.

“그럴 리가요.”

“좋아. 내가 해보지. 오랜만에 불타게 만들었어. 그래, 이게 프로듀서가 할 일이지.”

보통 이쯤이면 적당히 포기하고 욕이나 한 바가지 퍼붓고 돌아갈 법도 한데.

빌은 오히려 의지를 불태웠다.

도윤을 반드시 그 슈퍼히어로 영화의 주연으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10월이라고 했지. 좋아. 내 프로듀서 인생을 걸고 성공시켜보이지. 이건 약속이야!”

“기대하겠습니다. 대신, 저도 그렇게 된다면…… 제 배우 인생을 걸고 성공시킬 거라는 걸 약속드리겠습니다.”

여기가 일본이라 그럴까.

생전 주고받을 일 없을 오글거리는 대사를 치는 둘을 보며.

이를 지켜보던 세 사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물론.

이 줄다리기가 도윤의 승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빌 빼고.

* * *

“오케이-! 아주 완벽합니다!”

빌이.

하루도 지나지 않아 일본을 떠났고.

도윤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촬영에 열중했다.

이전보다 조금 더 열심히 말이다.

“더더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도윤 상. 일본어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네요. 통역사 실력이 좋은 건가요?”

“옆에 좋은 선생님이 있긴 하죠.”

“하하, 아마 일본 언론에서 도윤 상이 일본어가 이렇게 유창하다는 걸 알면 아주 좋아할 겁니다. 한국과 별로 다를 게 없는 언론이라서요.”

이런 와중.

드라마 촬영 중 PD가 해준 핵심을 뚫는 칭찬에 도윤은 피식거렸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타국 유명인이 와서 자국의 문화나 언어에 관심을 가지고 또 잘하기까지 하면 지나칠 정도로 열광하고 호들갑을 떤다.

안 그래도.

도윤은 얼마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준비한 대답만 일본어로 간단히 이야기했는데.

기자의 흥분된 표정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난 기사가 바로-

[한국의 톱스타, 일본어도 유창!]

[준비된 배우, 혹시 일본을 사랑할까?]

[일본, 한국의 톱스타도 빠지게 한 그 매력!]

이런 것들이다.

“얘들이나 한국이나.”

“그래도 얘들은 김치에 싸서 드셔보세요, 뭐 이런 건 안 하잖아요.”

“나중에 방송 나가면 김치 대신 낫토를 억지로 먹이려나?”

뭐.

도윤의 일상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다 가끔 한국에 가서 회사를 살피고, 전문경영인과 주섭의 보고를 받은 뒤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시간이 나면 영주를 가거나.

아니면 다른 배우들을 만나거나.

“좋아 보인다?”

“그래요?”

“우리는 죽겠는데. 하하.”

슬그머니 이엔 엔터에 들러 동민과 수철을 만난다.

“요새 기사 많이 나더라. 난 한국 기자들이 일본에서 활동하는 배우 소식을 그렇게 내는 건 예전 그 ‘욘사마’ 이후로 처음이야.”

“제발 그 사마 소리 좀.”

“야,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지. 캬, 국격도 높이고, 외화도 벌어오고. 얼마나 좋냐?”

“아니, 형님. 무슨 쌍팔년도에요? 국격이니 외화니…… 글로벌 시대에 말이야.”

둘은 바빠 보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도윤이 비공식적으로 독립한 이후부터 꽤나 힘들었을 텐데도.

주가도 잘 방어하고, 배우들도 문제없이 영입하는 걸 보면 역시 기우였던 모양이다.

역시나.

잘 흘러가고 있었다.

도윤뿐만 아니라.

도윤과 관계된, 그리고 관계되었던 모든 사람들의 일상이.

“그럼, 전 가볼게요.”

“야, 벌써 일어나?”

“애들이랑 밥 먹기로 했어요.”

도윤은 그리고.

동하와 리나를 만나 어느 소박한 밥집에서 백반 정식을 주문했다.

“살다 살다 내가 톱스타랑 이런 백반집에서 밥을 다 먹네.”

“나는 뭐 맨날 스테이크에 파스타만 먹냐?”

“아니. 백반을 먹어도 호텔 룸서비스로 먹을 줄 알았지.”

나쁘지 않은 일상이었다.

몸이 한 두어 개쯤 더 있으면 좋긴 하겠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난다.

특히, 병원에 가서 자신의 미래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로는 더더욱.

“요새 오빠 얼굴 좋아 보인다. 일본이랑 한국 오가면서 힘들어할 줄 알았는데.”

“그래? 그렇게 보이면 다행이고.”

“톱스타에 대표에…… 어우, 하나만 해도 힘들 것 같은데.”

“공부는 안 힘드냐?”

“완전 힘들어.”

리나는 투덜거렸다.

“근데 오빠 때문에 힘들다는 티를 못 내겠어. 오빠 하는 거 생각하면 난 아무것도 아닌 것 같거든.”

“타인의 힘듦이나 성공을 보고 자기를 비교하는 건 별로 안 좋은데.”

“우리 엄마 아빠는 안 그렇잖아. 안 그래? 맨날 그러잖아. 저기 아프리카 애들 봐라, 저렇게 굶는데 너희들은 축복받은 거다. 엄마랑 아빠 어릴 때는 단칸방에서…….”

도윤은 입술을 비죽이는 리나를 보며 피식거렸다.

예전에는 내내 떼만 쓰는 것 같더니.

그래도 몇 년 사이에 훌쩍 성장한 것 같았다.

“야, 그래서 일본은 나 같은 비주얼 먹힌대?”

“잡아먹힌대.”

“아.”

동하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래도 뭐.

아들이라고 요새 취업 준비하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특하기만 하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둘 다 취직만 하면 서울에 집도 잡아주고 차도 한 대씩 사 주면서 결혼할 때까지 아무런 걱정 없이 살게 해주고 싶었지만.

강하게 커야 한다는 어머니의 지론에 따라 그러지 않았을 뿐.

도윤에게는 소중한 가족이었다.

“근데 오빠, 일본 왔다 갔다 하다가 다시 한국 오면 이제 좀 한국에 계속 있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는데.”

“왜에? 회사도 운영해야 하고, 작품도 계속해야 하고.”

“좋은 기회가 있거든. 음, 근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그 기회가 확실하게 올지는 몰라서.”

“어차피 너 미국 다시 가잖아. <데드 로드> 시즌 3 찍으러.”

“그거 말고도 할 일이 생길 것 같아서.”

동하와 리나는 도통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하기야.

도윤은 팀 최도윤을 제외하면 그 누구에게도 슈퍼히어로 영화 출연 제안 건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결정되지도 않았거니와.

스스로도 설레발을 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

이런 걸 보면.

도윤도 확실히,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뭐.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되면 좋고.

안 되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고.

요새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된장찌개에 뽀얀 고등어 살을 한 젓가락 푸짐하게 올려 입에 넣기 직전.

휴대폰이 울릴 때까지는 말이다.

지이이이이잉.

도윤은 잠시 숟가락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확인했고.

휴대폰에 찍힌.

빌의 이름을 보며.

씩 웃었다.

아주.

좋은 소식이 들려올 것 같은 예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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