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그런데요?
도윤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도엔터는.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
어떤 일이 터져서가 아니라.
그냥 일이 너무 많아서.
“네네, 네! 그 건이면…… 아, 예! 어제자로 받은 메일 확인했습니다. 계약서는 잘 받았는데 아직 검토가 필요해서요. 네네, 심사숙고하고 다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네네, 들어가세요!”
“아직 이전 건 결제가 안 된 상황이라 저희도 다음 건까지 드리기가 조금 어려워요. 양해를 좀 부탁…… 어유, 다들 그렇죠. 다들 어렵죠. 네네, 이해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네! 최도윤 대표님께 들어온 광고…… 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죄송하게도 저희가 당분간은…… 네네, 대표님 일본에 계시기도 하고 대표님이 작품 활동 중에는 따로 광고 촬영을 안 하시는 스타일이시라…… 아쉽네요. 네네. 들어가세요.”
온갖 이슈들.
신생 엔터.
하지만 최도윤이 대표로 있고.
굴지의 기업이 투자했다는 점에서.
지금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기업.
상장이야 금방일 테고, 상장만 하면 순식간에 시가총액을 끌어올릴 거라 입을 모아 말하는 기업.
“이거, 내가 일하러 오긴 한 게 맞긴 한데…….”
덕분에 도윤이 없는 사이 전문경영인과 함께 사실상 책임자 위치에 있는 주섭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다.
처음 하는 일들투성이라 경험과 관계없이 부딪치고 또 부딪치느라 상처투성이긴 해도.
재미있다.
이 열정이 얼마나 갈지는 알 수 없지만.
재미있다.
현장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는 것.
하지만.
막막함도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일들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내일 면접 보는 경력자 투입되면 좀 나아질 겁니다. 힘내세요.”
“그러길 바라야죠. 하하.”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아, 네. 대표님. 말씀하신 건은 처리됐습니다. 그리고 우정기금 기부 건은 어떻게 해야 할지도 여쭤봅니다. 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세금 문제요? 네, 그것도 세무사 쪽에 알아보겠습니다.”
도윤이 틈이 나는 대로 둘에게 연락해 주면서 필요한 일들을 해결해 주고, 지시를 해준다는 것.
무엇보다 대표라는 이유로 막무가내로 밀어붙이기보다는.
“네, 기업 이미지상 아무래도 조금 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당장 현금 동원은 쉬워지겠지만, 저희가 설령 청진 투자를 받지 않았다고 했어도 한들 캐피탈 쪽에서 하는 투자는 좀 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네, 그럼 그 건은 폐기하죠. 다른 쪽 투자 들어온 거 있으면 다시 알려주세요.
둘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 심사숙고하여 결정을 내렸다.
리더의 유형은 제각각이지만.
적어도 도윤은 지금까진 좋은 리더였다.
처리해야 할 일도 많고.
결정해야 할 일도 많았지만.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화를 낸 적이 없기도 했고.
이렇듯.
모두에게 신뢰를 받고 있었으니까.
이런 가운데.
“다시.”
이런 바쁘게 돌아가는 도엔터 안에서.
지옥 같은 트레이닝을 견뎌내는.
세 배우 지망생들이 있었다.
“셋 다 이런 식이면 데뷔는커녕 평생 여길 못 벗어나는 거야. 정신들 차려!”
우렁찬 고함.
철저한 방음벽 때문에 밖으로 새어 나갈 일은 없지만.
밖으로 새어나가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강하게 세 사람의 귓가로 파고들었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광섭의 외침은 여전히 심장을 떨리게 만들었다.
“다시. 감정 잡고. 카메라 앞은 더더욱 가혹해. 스태프랑 감독이 널 배려해 줄 것 같아? 수십 명이 널 쳐다본다고. 지금 고작 너 말고 세 명밖에 없는 곳에서 이런 식이면 안 돼. 다시.”
덕분에 셋은 죽을맛이었지만.
광섭의 시퍼런 서슬에 이를 악물고 연기를 펼칠 수밖에 없었고.
“봐, 하니까 되잖아.”
참, 들으면 화가 나면서도 힘이 나는 저 한마디를 드디어 얻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힐링 타임.
“자, 오늘은…… 현장 견학이라 하긴 뭐하고 제가 직접 촬영한 현장 동영상을 몇 개 보면서 강의를 할 거예요. 다들 편하게 앉아서 볼까요?”
해영은 꼭 광섭과 짜기라도 한 듯 편안한 시간을 제공했다.
물론 아주 편안하지는 않았다.
해영이 절대 유출 금물이라며 틀어준 동영상엔 이들이 아직 제대로 겪어보지 못한 세계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스탠바이…… 큐!
-그렇게 가면 어떻게 하라고! 다시 잡아. 야, 조연출! 너 정신 안 차릴래!
-왜 자꾸 톤을 못 잡아. 응? 이거 NG가 도대체 몇 번이야? 정신 안 차릴래?
해영의 기가 막힌 촬영으로 얼굴만 안 나왔다뿐.
그야말로 살벌한 말들이 날아다니는 촬영 현장.
오늘 해영이 준비한 건.
아직 이들이 겪어볼 수 없는 ‘경험’이었다.
물론 이걸 보고 간다고 해서 이들이 신인에서 중견 배우가 되는 건 아니지만…….
해영이 노리는 건, 이런 분위기를 이들에게 체험시켜주는 게 아니라 현장에서 어떤 방식으로 촬영이 이뤄지는지에 대한 ‘안내’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냥 보여주는 게 제격.
“우와…… 엄청 살벌하네요…….”
“선배들 촬영하는 곳 가서 봤을 때도 이런 정도는 아니었는데…….”
“감독님이…… 되게 강하게 말씀하시네요.”
물론 한국의 드라마 촬영 현장이 모두 이런 건 아니다.
PD나 감독, 작가의 성향이나 고참 배우의 성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이렇게 상명하복의 ‘문화’가 남은 것도 사실.
“결국 제가 신인 때 느낀 가장 중요한 건, ‘실수’를 가급적 하지 않는 것과 ‘예의’였어요. 여러분들의 소속사가 당장 듣는 욕을 줄여줄 수는 있겠지만, 줄어든 만큼 뒤에서 이야기가 나오게 되죠. 이 바닥은 그런 곳이랍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해영의 말은 세 사람이 마른침을 삼키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욕 안 먹으려면 열심히 해야겠죠? 데뷔할 때까지, 그리고 데뷔하고 나서도요.”
뼈를 치는 그 말에.
세 사람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도윤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잘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유광섭 선생님 말로는 조만간 데뷔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고 하시네요.
“좋네요. 다른 배우들 탐색은요?”
-일단 몇몇 배우들 후보군에 올려둔 상태입니다. 정리되는 대로 메일 드리겠습니다.
한국에서 온.
주섭의 전화 덕이었다.
배우 지망생 세 명이 생각 이상으로 열의 넘치게 트레이닝에 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전문경영인과 주섭이 열심히 뛰어다닌 덕에 회사가 잘 돌아가고 있다는 점.
두 가지 사실이 도윤을 고무시켰다.
물론 직접 가서 살펴 봐야 훨씬 더 정확한 견적이 나오겠으나-
지금은 이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참, 촬영은 좀 어떠세요? 사실 일만 아니면 따라가서 구경 좀 하고 싶었는데. PD 때려쳤지만요, 하하.
“좋습니다. 대우도 좋고, 환경도 나쁘지 않고. 언제 후임자 구해서 조금 널널해지면 그때 같이 오시죠. 아니면 미국 같이 가시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어우, 그럼 저 다시 PD한다고 설칠지도 모르는데요?
“지금 벌써 연봉협상 하시는 건가요?”
-하하, 그럴 리가요.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전화는 가볍게 마무리되었고.
도윤은 다시 태블릿을 터치해 자신이 연기한 영상을 돌려보기 시작했다.
톱스타가 되면.
다양한 대우를 받는다.
촬영한 영상을 카메라별로 매 촬영마다 전달받아 이렇게 복기하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렇고.
“도윤 상. 이게 바로 유바리 멜론입니다.”
아무리 됐다고 해도 방송사에서 부득부득 우겨서 각 지역의 특산품들을 주기적으로 대령하고 있었으니-
‘이젠 뭐, 어쩔 수 없지.’
도윤도 반쯤 포기하고 즐기고 있었다.
이거 줄 돈으로 다른 사람한테 더 풀라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애초에 깨닫기도 했지만.
도윤 스스로도 요새는 이런 대접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만해지는 것과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우와, 대박. 완전 달아.”
“미쳤는데.”
물론.
개당 수백만 원에 달하는 멜론이 도윤이 아니라 나머지 세 사람의 입에 거의 다 들어가고 있다는 걸.
관계자들은 잘 몰랐지만.
여하튼 뭐.
일본에서의 촬영은 참 순조로웠다.
촬영이 끝나면 호텔로 돌아가고.
아니면 행사처에 들르든가.
광고 촬영을 한다.
그 일상의 반복이었고, 늘 하던 것들이라.
도윤은 매번 완벽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혹시나 싶었던 관계자들도 마음을 놓고 도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할 만큼.
그리고.
내친김에 도윤은 영화 대본도 살피고 있었다.
이전에는 촬영이 끝나기 전까지는 가급적 다른 작품의 대본을 살피지 않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여유가 생겼다고 해야 할까.
‘드라마도 로맨스, 영화도 로맨스.’
도윤은 제목부터 참 서정적인 <너를 추억하며> 대본을 살피며 피식거렸다.
도윤이 장르를 편식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로맨스 장르 쪽은 이상하게 많이 안 찍었던 것도 사실.
그래서일까.
드라마도 로맨스, 영화도 로맨스를 찍는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옆에서 느껴지는 성호의 시선은 덤이다.
“살, 살 빼야 해…….”
“그러면서 오늘 햄버거 세 개를 먹었니?”
“누나, 저 평소에 다섯 개 먹어요. 오늘 심지어 감자튀김도 안 먹고 콜라는 제로로 먹었어요.”
“아.”
그거참 다행이라는 표정의 민주.
“살 빼고, 배우 할 거에요.”
“제발 그렇게 좀 할래?”
“누나, 두고 보세요.”
도윤은 별 소득 없을 의지를 불태우는 성호를 바라보며 피식거렸고.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너를 추억하며>.
문을 열고 나온 남자 주인공이 일본에서 흔한 복도식 아파트의 난간에 팔꿈치를 괴고, 담배를 피우면서 하는 회상을 시작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여전히 일본에서는 흔하게 제작되는 서정적인 로맨스지만.
대본 겉면에 적힌 감독의 이름을 고려해 볼 때.
단순히 서정적인 장르로만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다.
‘좋네. 대사도 그렇고.’
도윤은 모르는 부분은 두칠에게 물어가며 대본을 분석하는 한편.
휴대폰으로 속속 날아드는 연락에 답장을 하고, 기사를 살피고, 전문경영인이 전해주는 업계 이슈를 탐색하는 등.
하루하루.
여유롭지만 바쁜.
묘하게 신기한 나날들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수많은 연락 사이로 유독 존재감을 내뿜는 한 사람의 전화.
“왜 안 받으세요?”
“받아 봤자야. 이러다 잠잠해질걸.”
바로 빌의 전화였다.
안 그래도.
일본에 도착한 이후부터 쉴 새 없이 걸려오는 빌의 전화 덕분에 도윤은 꽤나 고생한 바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의도적으로 받지 않는 건데.
이상하게도.
“근데 계속 오네요.”
아까부터 끊길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도윤은 한숨을 내쉬었다.
‘배우 소개해달라 그건가?’
진짜 그냥 아무나 소개해 주고 말까 싶어서 몇 명을 떠올려봤지만.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빌이 누군가.
도윤이 아무리 연기를 잘했다 해도, 빌이 아니었으면 미국에 갈 기회 자체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윤은 긍정적으로 마음먹고 일단 전화를 받았다.
-젠장! 몇 번을 거는데 왜 이렇게 안 받는 거야! 설마 거기 아직 새벽은 아니잖아? 여기 이렇게 해가 쨍쨍한데!
“아직 한국이에요?”
-그래. 아직 못 갔지. 못 찾았거든!
시작부터 예상대로 역정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원래 이런걸.
“그래서 어떻게 하려는데요?”
-그거야 잘 모르지.
역시나다.
그런데.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생겼어.
“중요한 일?”
설마 미국 갈 티켓을 못 구한 건 아닐 테고.
아니면 뭐, 기업 하나를 인수하려고 하나?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던 그때였다.
-스튜디오 하나에서 제안이 왔어. 도윤 너에게 말이지. 어떤 스튜디온지 알아?
“어떤 스튜디온데요?”
-슈퍼히어로 영화 만드는 곳!
도윤은 그 말에.
빌의 예상과는 전혀 달리.
무덤덤하게 답했다.
“그런데요?”
-……그런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