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93화 (193/200)

193.꿈을 꾸는 건 좋은 거니까

빌은 역정을 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없는 거야!”

한국에서 말이다.

마음에 드는 배우가 없었다.

그러니까.

도윤 같은 조건의 배우가 말이다.

“이 녀석은 너무 오만하고, 이 녀석은 너무 저자세고, 이 녀석은…… 제길, ‘도윤’만 한 녀석이 없군.”

사실 아니다.

따지고 보면 데리고 갈 만한 인재는 충분히 있다.

다만.

도윤 덕분에 눈이 너무 높아져 있었을 뿐.

빌은 완벽을 추구하는 프로듀서다.

그래서 완벽에 가까운, 아니 완벽한 배우인 도윤을 데려와 <데드 로드> 시즌1, 2 최고의 수혜자로 만들었고.

아시아인에겐 불모지나 다름없던 미국에서 ‘아시아인을 가장 성공적으로 프로듀싱한 남자’라는 타이틀도 얻었다.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뭐 대수인가.

돈 잘 벌고.

명예 그득하면 그만이지.

그래서 빌은 또 한 번 그 명예를 거머쥐고 싶었다.

하지만.

없었다.

마음에 드는 녀석이.

‘가만, 도윤이 한국에 엔터 회사를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그리고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도윤에게 연락을 해봐야겠다는 생각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뭐? 지금 일본이라고? 도대체 왜!”

-왜는요. 일이 있어서 왔는데.

“이런 망할!”

-조만간 다시…….

애석하게도.

도윤의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은 채 전화가 끊어졌고.

빌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실패다.

<데드 로드> 시즌3 촬영 시작 전까지 괜찮은 배우를 하나 찾나 싶었는데.

이래서야 원.

‘동양인 배우 한 명은 있어야 할 텐데.’

빌은 지금 시즌3를 장대하게 구상하고 있었다.

빌은 <데드 로드>를 오래 끌 생각이 없었다.

처음에는 흥하고 마지막에는 망하는, 이른바 ‘용두사미’라는 평가를 받는 드라마를 만들 생각이 없던 것.

그래서 퍼즐 하나하나를 모으는 데 굉장히 정성스러웠던 것이다.

‘그때 죽이는 게 아니었는데!’

빌은 빼도박도 못하게 퇴장시킨 시즌2의 인상적인 단역, ‘유준’을 떠올렸다.

적당히 ‘죽은 자’들에게 휩쓸리는 장면이 아니라 아예 ‘죽은 자’들에게 물어뜯기는 장면으로 처리한 터라.

대충 부활한 셈 치고 출연시키기도 어려웠다.

만약 그 ‘유준’만 있었어도.

이렇게 고민하진 않았을 텐데.

‘어쩔 수 없지.’

결국.

원점으로 돌아왔지만.

하는 수 없다.

찾아보는 수밖에.

‘어디 소개라도 시켜주면 덧나나.’

투덜대던 빌은 다시.

도심 속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디론가 바쁘게 전화를 걸면서 말이다.

* * *

급하긴 한 모양이다.

진짜 한국까지 가서 저렇게 찾아나선 걸 보면.

한편으로는-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작품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지 않은 이상 먼 타국까지 가서 배우를 직접 찾아보려는 노력은 하기 힘들 테니.

그래서 도윤은 빌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배우를 떠올려보려 했지만.

마땅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연기는 기본에.

영어 유창한 배우.

후보군이야 뽑아보면 없을 것도 없는데.

빌이 또 어떤 조건을 내세울지 알 수 없으니.

물론 빌은 도윤이 추천해 주는 배우라면 일단 무조건 만나보고 단역으로라도 출연시키겠다고 못을 박았지만.

어디 그걸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어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닳을 대로 닳은 프로듀선데.

여하튼 뭐.

도윤은 일단 빌의 아쉬움은 간단히 뒤로하고 대본을 펼쳤다.

곧 촬영에 들어갈 드라마, <너와 나의 만남 ~12월의 기적 같은 크리스마스~>의 대본.

참 세심하게도.

일본어 옆엔 한국어 해석이 적혀 있었다.

누가 한 건지 몰라도.

한국인이 한 해석이 분명해 보였다.

물론 도윤은 일본어를 읽고 쓰고 말하는 데 큰 무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배려는 배려.

덕분에 편안하게 대본을 읽어 내려가던 도윤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1화부터 키스신?”

시작부터 난리도 아니었다.

며칠 전 사전 미팅한 PD의 말에 따르면-

‘아주 화끈한’ 로맨스 드라마라던데.

이건 뭐.

한 화에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씩 키스신이 나오는 게…….

그렇다고 뭐.

못할 건 없다.

도윤이 키스 한번 못 해본 사람도 아니고.

그러던 그때였다.

“형.”

“왜.”

“저 배우 하겠습니다.”

이상한 데서 계기를 찾은 성호가.

“살부터 빼자.”

“예, 빼겠습니다.”

갑자기 다이어트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도윤 옆에서 대본을 나란히 읽으며 보인 반응이었다.

“저도 배우 할 겁니다.”

“그래, 살만 빼면 내가 단역으로라도 어떻게 꽂아주고 시작하게 해줄 테니까 좀 빼자.”

“형, 몇 년 뒤엔 대스타의 탄생을 목격할 겁니다. 그때 저 찾지 마세요.”

“제발 안 찾게 해줄래?”

도윤이 애원하듯 말했고.

그 모습에 두칠이 낄낄거렸으며.

미래를 본 건지 민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또 시작이네.”

“누나, 이번에는 달라요.”

“그래. 다르겠지. 옷 사이즈가 또 달라지겠지.”

낄낄대던 두칠은 결국 터져버렸고.

도윤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하지만 이쯤 되면 붉으락푸르락했을 성호가 오늘따라.

“아뇨. 저 진짜 진지해요.”

참 진지했다.

그렇게 갈구고 뭐라 하고 살 빼면 뭐든 다 해준다고 했는데.

이렇게 이상한 데서 계기를 찾을 줄이야.

‘빼도 배우는 못할 텐데…….’

아니다.

도윤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이야말로.

성호의 건강을 망치는 것 중 하나.

“그래. 성호야. 넌 할 수 있어.”

“맞아. 성호야. 할 수 있어. 파이팅.”

“봐요! 이렇게 두 사람도 응원해 주는데.”

결국.

민주는 마지못해 응원했다.

“그래…… 파이팅…….”

민주답지 않게.

말꼬리를 흐리면서까지 말이다.

어지간히도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

그래도.

이번에는 약간 기대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람마다.

계기라는 건 다른 법이니까.

“근데 여기 진짜 좋네요. 형님이라서 특별 대우로 이런 방 하나 떡하니 준 건가?”

“일본도 톱스타 대우는 좋지.”

민주의 말마따나.

도윤은 일본에서 톱스타 대우를 받고 있었고.

덕분에 두칠이 감탄한 것처럼 이렇게 널따란 대기실을 혼자 쓰고 있었다.

‘괜찮네.’

뭐, 미국의 스타들이 받는 대우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긴 하다.

도윤도 직접 겪어보진 못했지만.

정말 온갖 기상천외한 요구를 하는 스타들이 많다고 들었으니까.

물론 도윤은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알아서 해준다면 받을 용의는 있지만.

여하튼 뭐.

최적의 대기실이었다.

방해하는 사람 없고.

일면식도 없는데 쓸데없이 말 거는 사람도 없고.

이것만으로도.

아주 충분했다.

“형님, 일본어 실력이 나날이 늘어가시는군요.”

“그래?”

이런 와중 두칠이 한 말에 도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윤은.

솔직히 말하면 일본어 대사를 읽는다기보다는.

아직 외우는 쪽에 가까웠다.

그냥 그 한 개의 씬을 위해서.

대본을 통째로 외운다고 해야 할까.

처음에는 아마 그랬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두칠이 보기에는 조금씩 달라지는 모양이다.

“일본어 실력이 늘면 늘수록 톤과 강세를 갖추게 되죠. 제가 보기에 형님 일본어 톤은…… 상당히 나쁘지 않아요. 어차피 이번에 맡으신 배역도 ‘한국에서 유학 온’ 학생이잖아요?”

“그렇지.”

“그러니까 너무 완벽하게 하시는 건 오히려 어색할 것 같고, 지금이 딱 적당할 것 같습니다.”

자칭 일본어 마스터 두칠의 말이니.

믿어도 될 것 같았다.

일본 측에서 보내준 통역사가 잠시 자리를 비우면 두칠이 알아서 다 해결할 정도였으니까.

‘그럼 괜찮다는 거겠지.’

사실.

도윤은 지금 이 말에 안도하고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도윤이 쌓은 명성이 명성인지라 다들 추켜세워주고 지적은커녕 앞에서 웃기만 바쁜 것이다.

톱스타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

도윤이 그런 사람은 아닌데.

혹시라도 심기를 거스를까 걱정되어서 그랬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지 말라고 하면 더 그럴 테니.

여하튼 이렇게 두칠이 말해주니 이제야 좀 갈피가 잡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도윤은 대기하는 동안 오늘 촬영할 씬 몇 개를 위해 연습을 거듭했고.

“도윤 상, 스탠바이됐습니다.”

마침내 시간이 되었다.

“가자.”

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르는 광경은.

스태프의 눈에 참 위풍당당하게 보였다.

‘역시, 도사마!’

물론 도윤이 이 속마음을 들었다면 바로 경기를 일으켰을 것이다.

여전히.

‘도사마’라는 별명은 적응되질 않았으니까.

“도윤 상!”

모두가 도윤을 반긴다.

반기고.

환호하고.

격하게 모신다.

민망해질 만큼.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톱스타의 숙명인걸.

예전이었다면 분명 온몸에 닭살이 돋아 못 견뎠겠지만.

도윤은 이제 명백히 즐기고 있었다.

이 시선과.

관심을 말이다.

“형도 연예인 다 됐네.”

“이제야 연예인처럼 보이는 거지.”

“음, 민주 말이 맞아. 평소엔 연예인같지 않잖아?”

세 사람의 끄덕임 속.

도윤은 카메라 앞에 섰고.

오늘 도윤의 상대역이자 시작부터 불타는 로맨스를 함께 펼쳐줄 배우 ‘아야세 스즈’를 보며 싱긋 웃었다.

“잘 부탁합니다, 스즈 상.”

“저, 저도요. 도윤 상.”

부끄러운 건지.

눈을 마주치려다 못내 고개를 돌려버리고 마는 스즈.

하기야.

이쪽에서도 도윤은 큰 화제였다.

이미 출연했다 하면 싹 다 판권이 팔려나가고 리메이크까지 되는 도윤의 주연 드라마는 일본에서 광풍을 일으키는 중이고-

<알고 있는가>로 도윤의 연기를 처음 맛본 다른 배우들 역시 도윤이 출연한 다른 드라마를 당연히 보았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수줍어하는 것.

‘너무 잘생겼어!’

물론 저런 이유도 있었다.

“도윤 상. 오늘 씬, 부담될 수도 있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이런 가운데.

감독이 건넨 말은 도윤을 웃게 만들었다.

“그럴 리가요.”

“하긴, 도윤 상 정도면 키스씬이야 거뜬히…… 하하!”

도윤은 슬쩍 성호를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왜인지 모를 질투심과.

분노.

그리고 뭔가 해내야겠다는 열정이 가득한 눈빛이다.

‘꿈을 꾸는 건 좋은 거니까.’

뭐.

언젠가.

배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살만 잘 뺀다면 말이다.

물론 살 안 뺀다고 배우 못 하는 건 아니지만…….

여하튼.

“자, 도윤 상. 오늘 씬 설명 좀 드리겠습니다. 둘은 굉장히, 굉장히 애틋한 연인입니다. 서로 너무 오래도록 떨어져 지냈다가 짧게 만나길 반복한 연인이죠. 그래서 대사보다는 눈빛과 표정으로 이런 느낌을 좀 살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스즈 상도 최대한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상대를 바라보면 됩니다. 저는 오늘 촬영은 바스트가 아니라 클로즈업으로 잡을 겁니다. 물론 하이라이트에서만 말이죠! 이 점 유념해 주시면 됩니다.”

“네! 감독님!”

발랄한 외침.

싱그러운 미소가.

어쩐지 ‘애틋함’에 잘 어울릴 것 같다는 느낌이다.

‘여배우 앙케이트’에서 3위에 오른 배우라고 하던데.

딱히 중요한 사실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상대역 역시 최고라는 점에서-

연기할 맛은 충분할 것 같았다.

팬들이야 과장스러운 연기라는 이미지가 있는 일본 드라마에 도윤이 출연하는 걸 우려스러워하기도 했지만.

상관없다.

연기만 할 수 있다면.

도윤은 어디든 갈 테니까.

“자, 그럼 슛 들어가겠습니다!”

감독의 외침 속.

도윤은 마침내.

카메라 앞에 섰고.

서서히.

감정을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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