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92화 (192/200)

192.좀 시큰둥하죠?

일본으로 출국하기 하루 전.

도윤은.

짐을 정리하던 도중 민주의 연락을 받았다.

“오늘?”

-네, 오빠만 괜찮으면요.

사실 정리할 짐도 거의 없었다.

두칠과 성호의 반복 작업 덕분에 도윤이 지금까지 모은 자료들을 개인 클라우드에 담아두기도 했거니와-

도윤 자체가 애초에 개인 소지품이 많지도 않았다.

그래서 도윤은 민주의 말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그래. 그러자.”

-그럼 1시간 후에 제가 픽업 갈게요.

전화가 끊어지고.

도윤은 오늘 시간 괜찮냐는 민주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이런 애가 아닌데.”

민주는 뭐라고 해야 할까.

상대의 의사를 묻지 않는다.

애초에 물어볼 필요도 없이 모든 일들을 완벽히 처리하고 보고하는 쪽에 가까웠으니까.

그도 아니면-

상대가 무조건 ‘yes’만 하게 만들도록 판을 미리 짜 두던가.

물론 그 과정이 불쾌한 건 전혀 아니다.

민주는 그런 애였으니까.

그래서 도윤은 무슨 일일까 궁금해하면서도 크게 마음을 두지 않았다.

민주가 저렇게까지 자신의 의사를 물어볼 정도라면.

어쩌면 정말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래서 도윤이 신경 쓸지도 모르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마음 쓰지 않도록 분명히 준비했을 테니까.

여하튼.

1시간이라는 시간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덤덤하게 흘러갔고.

시간 맞춰 집 앞으로 나온 도윤은-

“……내가 보너스를 그렇게나 많이 줬나?”

“아, 오빠는 처음 보죠?”

그르렁대며 엔진음을 옅게 토해내는 스포츠카 한 대와 그 앞에 선 민주를 볼 수 있었다.

두 가지 이유로 감탄이 나왔다.

하나는 스타일리시하게 차려입은 민주와 노란색 스포츠카가 너무도 잘 어울려 화보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그냥 모은 돈으로 질렀어요. 언제 이런 차 타 보겠어요.”

민주의 실행력 때문이었다.

뭐, 도윤도 마음만 먹으면 뽑을 수 있지만…….

사실 도윤은 크게 차에 관심이 없고, 관심이 있다 하더라도 저런 차를 뽑는 데엔 충분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돈이 있더라도 말이다.

“넌 내가 진짜 리스펙한다.”

“원래는 안 그랬구요?”

민주는 피식거리며 차 문을 열었다.

옆이 아니라 위로 올라가는 창문만 봐도.

사람들이 왜 이런 차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타세요. 아, 옛날 버전으로 할까요? 야, 타?”

“그건 좀 갔다.”

도윤은 그렇게 차에 올랐고.

문이 닫힌 뒤.

민주가 운전하는 노란 스포츠카는 빠르게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사실 국내에 이런 차를 타는 사람이 민주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도윤도 공도에서 이런 차를 몇 번 봐 온 데다.

결정적으로 미국에서 빌에게 선물 받았고, 지금은 성호가 막 몰고 다니는 차를 몇 번 운전해 본 지라.

그다지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운전자가 중요한가?”

차 안에서 느껴지는 바깥의 시선이.

장난이 아니었다.

진한 틴팅 덕에 안이 보일 리는 없지만.

지금 이걸 바라보는 사람들의 모든 시선은 차체를 한번 훑은 뒤 자연스럽게 운전석 쪽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요. 운전자도 중요하죠.”

“다른 사람이 했으면 재수 없었을 것 같은데, 네가 그러니까 납득된다.”

아마 성호가 저 말을 했으면.

이 돼지가 무슨 헛소리를 하나 싶었을 텐데.

도윤은 속으로 성호에게 사과한 뒤 물었다.

“그럼 다른 애들은 아는 거야?”

“성호랑 두칠 오빠는 알걸요. 제가 말하지 말라고 그런 건 아닌데.”

아니다마다.

둘이 쫄아서 그냥 민주 이야기를 못 했겠지.

두 녀석은 민주 말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그때 문득 도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갑자기 생각 난 건데,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야? 민주 너 나랑 한 살 차이 아니야? 그럼 두칠이는 왜 나한테 형님이라고 하는 거지?”

“두칠 오빠는 빠른년생이요. 원래는 오빠랑 같은 나이로 취급하긴 하는데, 자기는 그러기 싫다고 형님이라 부른다고 했었어요.”

“나 참.”

이래서 빠른년생들이란.

그렇게 둘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는 사이.

차는 서울 시내를 빠져나가 강변북로를 탔고.

어느새 자유로에 진입하며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단속 카메라는 칼 같이 지키는 게.

성호에겐 미안하지만, 민주가 더 운전을 잘하는 것 같았다.

‘왜 맨날 성호냐.’

도윤은 슬슬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저희 아빠가 오빠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요.”

“너희 아버지가?”

“네.”

민주의 아버지라면.

동대문에서 예전부터 옷 장사를 하면서 민주를 먹여 살렸고 동대문에 상주하던 양아치를 맨주먹으로 때려눕힌-

말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분이 아닌가.

살짝 몸이 떨렸지만.

도윤은 내색하지 않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예전부터 아빠가 말은 꺼냈는데 오빠 바빠서 그냥 제가 이야기 안 했거든요. 근데 오늘은 한가해 보이셔서.”

“……귀신같네.”

하긴.

민주는 안 될 것 같으면 애초에 말도 안 꺼낸다.

상대를 설득할 자신이 있을 때만 무언가 제안을 하는 타입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이런 민주의 아버지라고 하니.

어떤 분인지 궁금하긴 했다.

“뭐, 상견례하거나 남자친구 소개하는 자리도 아닌데 긴장 안 하셔도 돼요. 그냥 한번, 보고 싶다고 해서요.”

이유야 뭐.

딸내미 직장 상사이면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고.

도윤이 일본이다 미국이다 해외로 열심히 끌고 다녔으니.

걱정도 되고 했을 것이다.

민주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뭐.

만나 뵙고 신뢰를 줄 수만 있다면야.

나쁠 건 없어 보인다.

“그래, 그럴게.”

그리고-

도윤은 민주의 아버지가.

자신이 상상한 것 이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여기는.”

“원단 공장이요. 아빠가 운영해요.”

“아.”

어마어마한 크기의.

원단 공장.

그냥 밖에서 봐도 규모가 짐작되지 않을 정도.

“동대문에 계시다고…….”

“10년 전에는 그랬죠.”

“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도윤은 민주와 전혀 닮지 않은 한 남자가 여기로 걸어오는 걸 발견하고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어이구, 우리 딸! 왔어?”

딸바보 아빠였다.

이 공장의 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일반 작업자와 같은 작업복 차림의 한 중년 남자.

“이거, 처음 뵙겠습니다. 남궁섭이라고 합니다. 아비가 되어서 딸내미 일하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제대로 못 살펴서…….”

“처음 뵙겠습니다, 최도윤입니다. 따님 덕분에 제가 매번 편하게 일하고 있습니다.”

주거니 받거니.

악수를 교환하며 바라본 남자, 남궁섭의 인상은 호탕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딸에게 시선을 줄 때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참.

돌아가신 아버지가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우리 딸내미, 좀 시큰둥하죠?”

“아유, 아닙니다. 프로페셔녈해서 좋은데요 전.”

“지 엄마 죽은 뒤로 마음을 안 열어서 그래요.”

도윤은 공장 근처 벤치에 앉아 남궁섭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민주가 잠시 커피를 가지러 간다고 한 사이 남궁섭이 꺼낸 이야기가 도윤의 마음에 파문을 남겼다.

생각해 보면.

민주는 지금껏 아버지 이야기만 했지.

어머니 이야기를 한 적이 별로 없었다.

있다 해도 아주 단편적인 이야기일 뿐.

“그래서 걱정도 많고, 동대문에서 옷하고 원단 팔 때 쟤를 제대로 못 보살펴서 걱정이었는데…… 이제는 나름대로 잘 적응하는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잘하는데요. 제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멋진 사람이에요.”

“그래요?”

민주의 칭찬에.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오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어지는 팔불출다운 자랑이 조금 길긴 했다.

“지 아빠 공장 놀러 올 때마다 도윤 씨 이야기밖에 안 해요. 좋은 직장 상사라고. 그래서 언제 한번 꼭 만나 뵙고 인사라도 드리고 싶었는데, 이거 참. 민주 쟤가 맨날 이래요.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갑자기 라인에서 발견되질 않나, 대뜸 찾아오더니 선물이라고 차를 한 대 주질 않나…….”

그래도.

기분 좋게 들을 수 있었다.

행복하게 이야기하는 남궁섭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이 회귀 후 참 좋은 사람들만 만나왔다는 걸 깨닫고 있었으니까.

“아빠. 여기.”

“오, 딸내미. 오랜만에 민주표 커피네?”

“이상한 소리 말고 마셔.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뜨거우니까 조심하고.

민주가 저런 말을 했던 적이 있던가?

새삼.

놀라운 일의 연속이다.

“역시, 내가 타면 이 맛이 안 나는데. 역시 우리 딸내미 커피가 최고다.”

후르릅.

한 모금.

커피를 마신 남궁섭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딸이 누굴 잘 안 믿어요. 근데, 이야기하는 거 들어보니까 도윤 씨는 믿는 것 같더라구요.”

도윤은 그 말에 멍해졌고.

“그러니까 우리 딸, 잘 이끌어주면 감사할 것 같아요. 아직 많이 부족한 아이라서…….”

민주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도윤은 그저.

느껴지는 아버지의 사랑에.

고개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저야말로 배울 게 많습니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앞으로도 종종 인사드리겠습니다.”

* * *

“성호야.”

“네?”

“어머니는 잘 계시지?”

“그럼요.”

“그럼 됐다.”

“뭐에요. 싱겁게.”

도윤은 성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티켓을 바라봤다.

출국까지는 이제 두 시간.

매번 그렇듯.

너무 일찍 와서 문제다.

기자들의 인터뷰와 이것저것 소요되는 시간까지 고려했는데.

막상 마쳐보면 항상 한두 시간씩은 꼭 시간이 남았다.

하지만.

나쁠 건 없다.

“저, 사, 사인 한 장만 부탁드려도 될까요…….”

“그럼요. 사진도 찍을까요?”

“꺄악!”

자신을 알아보는 면세점 직원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형, 오늘은 대본 안 보세요?”

“어제 밤새도록 봤다.”

“보기 좋네요. 그렇게 좀 앞으로도 쉬세요.”

“그러려고.”

좀 쉬라는 성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등.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중간중간 걸려오는 전화나 급한 업무 연락을 피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청진 쪽 계열사랑 이미지가 겹치는지 한번 알아봐 주시고, 광고 단가랑 견적 등 서류들 메일로 보내주세요.”

-네, 바로 포워딩드리겠습니다. 근데 이거 제가 처리할 수 있는데, 괜찮으시겠어요?

“한국 떴다고 신경 거두면 쓰나요. 괜찮습니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도엔터는.

이제 막 시작했고.

그래서 사무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거나, 벅차진 않다.

외려 즐겁기까지 하다.

이걸 원했었으니까.

“형님, 이번에 일본 가시면 제 친구들 한번 만나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그거 듣던 중 무서운 말인데.”

이런 와중.

두칠의 제안에 살짝 몸을 떠는 도윤.

도윤의 시선은.

두칠의 얼굴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흉터에 집중되어 있었다.

“에이 참, 제 친구들 그런 애들 아니라니까요.”

“시간 나면.”

여하튼 뭐.

일본에 가서.

할 일이 참 많아 보인다.

‘잘 되겠지.’

그래서 도윤은.

이전처럼 무조건 잘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편안한 마음으로 임했다.

이제는.

그래도 될 것 같았으니까.

“슬슬 시간 됐네요. 가시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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