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이제 시작이지만
배우에게 이미지라는 건 상당한 이점을 준다.
평소 이미지를 어떻게 형성하느냐에 따라 대중들이 받아들이는 방식이 달라지며.
때로는 어떤 실수를 해도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미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아니, 그냥 평소 이미지만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종종 놀라움을 선사하곤 한다.
지금처럼 말이다.
“다시.”
원로 배우.
유광섭의 싸늘한 목소리가 연습실에 울려 퍼지고.
그 차가움이 세 배우 지망생의 귓가에 파고들며 오한이 찾아온다.
“뭐가 잘못됐는지 잘 모르겠지?”
광섭의 물음에.
대답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있을 턱이 없었다.
무슨 대답을 해도 지금 이 눈앞에 있는, 푸근한 줄로만 알았던 대선배를 만족시킬 수 없을 것 같았으니까.
세 사람은.
적어도 최소한의 눈치는 갖춘 셈.
“발성이 틀렸어. 여기서는 배에서 끌어올리듯 들어가는 거야. 속삭이듯 말한다는 지문에 속아선 안 돼. 너희는 속삭여야겠지만, 듣는 사람은 그 속삭임을 모두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이들은 아직 현장 경험이 별로 없다.
정윤아, 서강우는 그나마 아역을 몇 번 거치고 현장 구경이라도 해보긴 했다.
하지만.
이한영은 논외였다.
그래서 도윤에게 인상을 남겼을지언정, ‘트레이닝’을 하러 온 유광섭에게는 아니었던 것.
“한영이라고 했지? 이런 식으로 가다간 평생 제자리걸음이야.”
유광섭은 다소 강하게 말했다.
이한영을 자극시킬 요량으로.
그리고 그건.
생각보다 잘 먹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당신…… 그거 알아? 사실 5년 전에 다이아 반지…… 그거 내가 훔쳤다?”
유광섭의 엄포 때문인지.
아니면 느낀 바가 있는지.
이한영의 ‘속삭임’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발성으로 전달되었고.
“하니까 되는군.”
흡족한 미소까지는 아니어도 아까보다는 풀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
그리고 유광섭은.
도윤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경험은 없으나 흡수가 빠르다…… 왜 그렇게 말했는지 알 것 같군.’
정말.
흡수가 빠르다.
조언하는 족족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걸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낸다.
쉽게 말해.
자신의 연기에 접목시킨다고 해야 하나.
유광섭은 그간 수십 년을 연기하며 여러 유형의 배우를 봐 왔다.
당연히 이한영처럼 체득이 빠른 배우도 본 바 있는데-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받아들인 나머지 자신의 색을 찾지 못하거나.
받아들인 것을 적절히 취사선택해 장점만 쏙쏙 골라내거나.
전자가 될지.
후자가 될지는.
앞으로 그가 하기에 달린 셈.
‘뭐, 최고의 선생들이 붙었으니.’
하지만 엇나갈 일은 없어 보인다.
이런 가운데.
“자, 이제 다음.”
서강우와 정윤아가 차례로 정해진 대사를 선보였고.
당연하게도.
“이거, 아주 실망인데.”
유광섭을 실망시켰다.
정말 실망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적어도 이 두 햇병아리 배우 지망생의 가슴을 덜컥 내려앉게 만든 것만은 분명하다.
“다시.”
그렇게 ‘다시’가 수십 번씩 반복되는 가운데.
지옥의 트레이닝 1부가 끝나자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축 늘어졌다.
“너무…… 빡세…….”
하지만.
쉴 틈은 없었다.
이미 입금된, 생전 만져보지도 못한 억 단위의 계약금을 받기도 했거니와.
지금 이들의 머릿속엔 온통 ‘데뷔’뿐이었기 때문이다.
데뷔.
데뷔만 할 수 있다면.
배우를 꿈꾼 이후로 지금까지 그 생각만을 하며 살아왔기에.
지금 이건 그들을 아주 잠시 지치게 했을 뿐이다.
“다들 만나서 반가워요. 류해영이라고 해요.”
이런 가운데.
천사가 등장했다.
“우와…….”
서강우는 저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오늘 트레이너로 나선 해영을 퍽 즐겁게 한 모양이다.
“오늘은 살살 해야겠네요.”
류해영.
도윤과 광섭에 비하면 커리어나 필모그래피가 조금 달릴지 몰라도-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 특히 여자 배우들 중에서는 드라마든 영화든 주연급으로 꼽히고 있었고.
결정적으로…….
“오늘 트레이닝은 꽤 복잡하고, 어려울지도 몰라요. 하지만 잘 따라와 줄 거라 믿어요. 왜냐하면 최도윤 대표님이 직접 뽑으신 분들이니까.”
‘잘’ 가르쳤다.
만약 해영이 교육자의 길을 걸었어도 잘 됐을 만큼 말이다.
거기다.
생글거리는 상큼한 미소는 덤.
덕분에 서강우는 저 잔잔한 아우라에 벌써부터 푹 빠진 모양이다.
안 그래도.
도윤은 촬영 현장에서 신인들에게 친절히 대해주고 필요하다면 연기 지도까지 해주던 해영의 모습을 듣고 본 바 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트레이너로 모신 것.
물론 해영은 처음 도윤의 제안을 듣자마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케이했다.
안 그래도 곧 현 소속사와의 계약이 끝나는 데다.
결정적으로.
해영은 도엔터에 들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뭐.
가르치는 쪽에도 흥미는 있었지만 말이다.
“오늘의 주제는 사랑고백입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드라마를 찍게 되면 한 번쯤은 반드시 로맨스 장르를 거칠 수밖에 없죠. 그 과정에서 맡은 배역이 누군가에게 고백하거나, 고백받는 씬은 아주 흔해요. 하지만 중요하죠. 그 고백 씬을 위해서 그간의 모든 씬들을 쌓아 올라가니까요. 그래서 오늘은 이 주제를 통해 여러분들의 기초를 점검하고…….”
조곤조곤.
작지만 강하게 파고드는 발성.
저게 바로 배우의 발성인가 싶었다.
“이번에 준비한 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에요. 군화와 고무신이죠. 먼저, 윤아 씨부터 해볼까요?”
정윤아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앞에 나섰고.
“긴장 풀고, 대본 그대로 천천히 가세요. 두 개의 씬을 연기할 거예요. 전화로 이별을 고하는 장면, 그리고 그 이별을 고한 사람이 전역한 뒤 다시 만나는 장면.”
해영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연기를 시작했다.
“미안. 나…… 다른 사람 생겼어. 우리, 그만하자.”
덤덤하면서도.
약간의 떨림이 섞인.
애써 태연함을 가장하는 이별 연기.
그러나 해영의 마음에 들 턱이 없다.
“자, 지문을 다시 볼까요? 여기 지문에는 덤덤한 척, 그러나 간신히 말한다고 적혀 있죠? 너무 태연했어요. 중간에 약간 망설이긴 했지만, 여기서는 조금 더…….”
해영은 과연.
광섭과는 달랐다.
단짠단짠이 이런 기분일까.
광섭의 폭풍과도 같은 갈굼에 넋이 나가 있던 세 사람은 트레이닝 중임에도 힐링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데.
“으음, 다시 해볼게요. 아니다, 여기서는 제가 하는 걸 잘 볼래요? 상대역으로는…… 강우 씨가 좋겠네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주윤아. 미안한데, 우리…… 그만두자.”
군대에 간 남자친구가.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하는.
흔치 않은 상황이었는데.
“너 정말…… 나빴다.”
뭔가.
조금 이상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적당히 시범이나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
살짝.
과했다.
그러니까.
정말 이별 선언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뚝, 뚝.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어?’
덕분에 서강우는 필요 이상으로 당황해 버렸다.
그런 한편으로는 마음을 다잡고.
“미안…… 진짜 미안…… 너 지금까지 힘들게 기다려준 거 아는데…… 모르겠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모른다고? 어떻게……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나는 내일 너 면회 갈 생각에 하루 종일 고민했는데!”
이런 해영의 연기에 화답하듯.
“전화…… 끊을게.”
매몰찬 대사를 간신히 해낸다.
덕분에.
지켜보던 두 사람은 좌불안석이었다.
해영의 연기는 너무 리얼해서.
그리고.
강우는 너무 당황한 것 같아서.
그 증거로.
해영은 잠깐 보고 따라 해보라 한 말이 무색하게도 연기에서 바로 빠져나오지 못했고.
강우는 그런 해영을 보며-
‘대박…….’
그만 착각을 하고 말았다.
참 선생님이라고.
사실 이건…….
해영이 과거의 경험 때문에 너무도 실제처럼 연기한 나머지 이렇게 된 거였다.
선우가 군대를 간 사이.
모종의 이유로 이별을 고했고.
그 일을 겪은 해영은 지금과 거의 비슷하게 힘들어했던 것.
하지만.
전달은 아주 잘 됐다.
필요 이상으로 말이다.
‘열심히 해야겠다.’
‘나도 저렇게만 할 수 있으면…….’
‘진짜 같았어.’
유광섭에 이어.
류해영이라는 뛰어난 선생님을 모시게 된 세 사람은.
그야말로 폭풍같은 감동을 받으며.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게 된 것.
“그럼, 계속해 볼까요?”
덕분에 해영은 편안하게 트레이닝을 진행할 수 있었고.
“류해영 배우님, 좀 어떠세요?”
“아, 오…… 최도윤 대표님!”
막 들어온 도윤에게 활짝 웃어 보일 수 있었다.
“잠깐 쉬고 있었어요. 잘 다녀오셨어요?”
“응. 여권도 해결했고, 오랜만에 혼자 밥도 먹고.”
도윤은 해영에게 씩 웃어 보이더니 세 사람을 바라봤다.
녹초가 된 모습이.
지쳐 보이지만 그렇다고 힘들어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본 순간 잔뜩 긴장하며 자세를 바로잡는 모습이 참 뭐라고 해야 할까…….
귀엽다고 해야 할까?
‘나는 저런 신인 시절이 없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자신은 저렇게 연기 아카데미를 다니거나.
아역 시절부터 촬영장을 드나들지 않았다.
배우가 되는 방법은 여러 가지지만.
도윤은 배우들이 흔히 거치는 길 대부분을 건너뛴 셈.
단역 다음 조연, 그다음은 주연급 조연, 그 이후로는 쭉 주연만 해 왔으니.
그래서 저런 모습이 익숙지는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귀엽기도 한 것.
“잘 부탁할게. 이제 시작이지만.”
“아무렴요. 다들 잘하는걸요.”
립서비스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칭찬은 사람을 기쁘게 만드는 법.
도윤은 그런 해영을 보며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처음, <알고 있는가>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생기발랄하고 연기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참 많았던 신인이었는데.
고작 몇 년 사이에 이렇게 성장할 줄이야.
어쩌면.
도윤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미래를 바꾼 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함께했던.
당장 떠오르지 않는 사람들의 미래까지도.
“참, 이따 선우도 온다고 했었는데.”
도윤은 이런 와중 해영과 여전히 잘 사귀고 있는 선우를 언급했다.
선우의 이름이 나오자 해영은 흠칫했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마 좀 늦을걸요? 촬영 끝나면 9시라 그랬는데.”
그리고.
셋은 혼란에 빠졌다.
‘선우? 우리가 아는 그 배우?’
‘대박. 역시…….’
참고로.
선우 역시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인지도를 갖췄다.
군대를 다녀온 후 처음으로 맡은 주연 배역이 호평받고 있었으니까.
“그래? 뭐, 그때까지는 뭐든 먹고 마시고 있겠지. 아무튼 나 간다. 녹음 있어서. OST.”
“또 녹음이요? 대표님 이러다 가수 하겠어요.”
“그러게. 아무튼 다들 고생해요. 저랑 트레이닝은 다음 주니까, 벌써부터 긴장들 하지 마시고. 그럼.”
그렇게 도윤이 연습실을 나서고.
남겨진 세 햇병아리들은.
도윤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해영을 경외감 어린 눈빛으로 바라봄과 동시에.
‘녹음’을 하러 간다는 도윤의 말을 떠올렸다.
‘역시, 만능 엔터테이너.’
‘이러다 나중에 뮤지컬도 하시겠지?’
‘노래 되게 잘하신다던데…….’
도윤이 의도치 않게.
세 사람이.
도엔터에 들어왔다는 걸.
뿌듯하게 느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