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89화 (189/200)

189.야 인마!

기자회견이 열렸다.

도엔터가.

마침내 정식으로 출범하는 것에 대한 기자회견이었다.

도윤은 이제부터 다르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질문마다 적당히 둘러대며 잘 모르겠다, 아직 확정된 게 없다, 긍정적으로 고려 중이다, 뭐 이런 대답들을 이어가며 어느 정도 회피했지만.

이미 세 명의 배우를 영입하고.

연기 선생님까지 모신 데다.

직원들 채용도 어느 정도 끝나,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최도윤 배우, 지금 소문이 무성한 ‘도엔터’에 대해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제 배우 활동과 기업 활동을 동시에 진행하겠다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일정상 가능한가요?”

“이번에 영입했다던 세 명의 신인 배우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도윤은 쏟아지는 질문이 멈추길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도엔터는 연기를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배우들을 위해 만들어진 회사입니다.”

그리고.

도윤이 도엔터를 세운 이유가 설명되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연기를 꿈꾸는 수많은 배우 지망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 데뷔하는 건 극소수죠. 그게 이 바닥의 순리이고, 어쩔 수 없는 난제입니다.”

웅성임이 일었다.

약간의 논란이 생길 수도 있는 말.

하지만 도윤은 이에 대한 질문이 들어오기 전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실력이 충분하고 연기에 대한 열망도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이유로 배우의 꿈을 접고 스스로 탈락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웅성임이 서서히 잦아들고.

“제가 도엔터를 설립한 목적은 바로 그겁니다.”

도윤의 끝맺음에.

방금까지 질문하려 아우성이었던 기자들의 웅성임이 완전히 사라졌다.

누구나.

어떤 이야기를 할 때 거창한 목표나 원론적이고도 추상적인 말들을 꺼내놓을 수 있다.

하지만 도윤이 한다면 조금 의미가 달라진다.

지금까지 항상 모든 인터뷰에서 두루뭉술하기보다는 확실한 대답을 해 왔던 도윤이.

자신이 오래도록 생각해 왔던 포부를.

이토록 확고하게 밝힌 것이다.

“그럼…… 신인 배우들을 위한 회사를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선순환을 바라고 있습니다. 신인들로 시작해서, 그 신인들이 성장해 새롭게 들어오는 신인들을 보살피고 함께하는 구조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 맞습니다. 적어도 이미 완성된 배우들과 도엔터가 배우 계약을 맺을 일은 없을 겁니다.”

상당히.

놀라운 발언들이었다.

이미 성장해서 규모를 갖춘 회사들도 실력 있는 배우들을 영입하려 애쓰고 또 애쓰는데.

신인들만 받겠다?

그리고 그 신인들을 키워서 쓸 만한 배우들로 만들겠다?

이건.

축구 구단이 즉시전력감이 아니라 유망주들만 영입해서 성적을 내겠다는 것과 비슷한 말이었다.

물론 축구 구단과 엔터 회사를 비교하긴 어렵지만.

제각기 보유한 선수와 배우가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추어야 집단의 경쟁력도 커지는 걸 고려하면.

너무도 이상적인 발상이었다.

아주 불가능한 발상은 아니지만…….

‘미쳤군.’

‘유망주만 영입해서 회사를 꾸리겠다고?’

‘연예인 병은 안 걸린 것 같던데, CEO 병에라도 걸렸나.’

아무리 봐도.

기자회견장에서 말하기엔 굉장히 이상적이다.

최도윤처럼 철저하게 관리하는 사람이.

이게 다 기사로 나가서 조롱당할 걸 과연 모르고 있을까?

덕분에 최도윤이니까, 라고 생각하며 집중했던 기자들은 하나둘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기 시작했고.

“그럼 지금 존재하는 엔터 회사들과 다른 방식을 취하겠다, 뭐 이런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다른 회사와 다른 길을 걷기 위해 그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모든 게 원하는 대로 돌아가면 참 좋겠지만 시장은 냉정합니다. 혹, 이런 발언들로 색안경을 끼고 도엔터 배우들을 더 엄격하게 볼 수도 있습니다.”

“글쎄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것 같진 않습니다.”

점점.

수렁에 빠지는 듯한 기자회견.

이런 가운데.

도윤을 제외하고 전혀 당황하지 않는 표정으로 이 기자회견을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도엔터 설립을 지금까지 쭉 지켜봐 왔던 사람들이다.

성호.

민주.

두칠.

정수.

그리고.

그 외 많은 사람들.

그들은.

도윤이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봐 왔기에.

지금 기자들과 대조적으로 편안하게 도윤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쟤들이 뭘 알긴 알까요.”

“그냥 좀 있어. 들릴라.”

“들으라죠 뭐.”

“그러다 오빠한테 또 죽지.”

물론.

성호는 성호답게 지금 저렇게 전혀 믿지 못하는 기자들에게 너희들이 뭘 아느냐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말이다.

여하튼.

“운영 방식에 변화는 없을 겁니다. 이상입니다.”

도윤은 도윤답게 질질 끌지 않고 할 말을 모두 마친 뒤 몇 가지 질문에 답하며-

기자회견을 종료시켰다.

이번만큼은 기자들도 도윤에게 추가적으로 질문을 던지며 다급하게 붙잡지 않았다.

왜냐하면.

오늘 기자회견을 어서 기사로 내보내고 싶었으니까.

드디어.

완전무결해 보이던 배우를 무너뜨릴 틈을 찾은 것 같았다.

‘CEO병 최도윤, 배우로 쌓은 명성 모두 무너뜨리나? 이거 좋네.’

‘국산차 타고 다녀서 돈 번 거 다 어디 쓰나 했더니, 이러려고 그랬구만. 그거 다 PD한테 접대 비용으로 넣으려는 건가?’

‘하여간 이래서 젊은 애들은 안 된다니까.’

제각기 생각을 품은 채.

기자회견장을 빠져나가는 기자들.

그리고 그런 기자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돌아온 도윤은 기다렸던 사람들을 보며 피식거렸다.

“뭘 그렇게들 봐?”

“그거야 뭐…… 예상했던 반응이긴 한데 막상 들으니까 좀 빡쳐서?”

성호의 말에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기자들 좋자고 한 기자회견 아니야. 중요한 건, 홍보지. 이렇게 하겠다는.”

애초에 도윤이 기자들을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면.

대외적으로라도 평범하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하지만 도윤은 당당하게 포부를 밝혔고.

기자들에게 좋은 소스를 제공해 주었다.

이제 남은 건.

이 소식이 널리 알려지는 것뿐.

도윤이 노리는 건 바로 그것이다.

“아무튼 고생했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성호는 그 말에 기다렸다는 듯 얼른 대답했다.

“오늘은 돼지 어떠세요? 저기 기가 막힌 볏짚구이집 찾아놨는데.”

“그럼 거기로 가든가.”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오늘따라.

유독 신나 보이는 성호.

“쟤 왜 저러냐.”

“오빠가 드디어 회사 시작해서 그렇겠죠.”

“나보다 더 신난 것 같은데.”

“원래 그런 애잖아요.”

도윤은 민주의 그 말에 피식거렸다.

하기야.

원래 그런 녀석이긴 했었다.

* * *

[최도윤, 도엔터 출범 공식화…… 배우에서 CEO로.]

[최도윤, ‘CEO 병’ 걸렸나? “신인들만 영입하겠다”]

[도엔터에서 아스날의 향기가 난다]

기사가 나가고.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진짜 회사 만든다고? 진짜로? 와, 배우 생활까지 하면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말이냐고 묻는가 하면.

정말 신인들만 영입할 거냐면서, 내가 아는 배우는 어떠냐며 은근히 꽂아주길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도윤아, 얘 어때? 얘 연기 괜찮거든. 나중에 한번 시간 날 때 연락이라도 해봐.”

물론.

도윤은 적당히 받아넘겼다.

선을 넘는다 싶으면.

단호하게 철벽도 치고 말이다.

“기사 나가고 더 바빠졌네요. 대표님은 더 바빠지셨고요.”

이런 와중.

도엔터의 거의 모든 일들을 커버하는 주섭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간단하게는 전화를 받는 것부터.

복잡하게는 투자를 문의하는 회사와 미팅을 가지는 것까지.

도윤은 그런 주섭을 돕기 위해 필요한 자리마다 동석했다.

아무리 주섭을 믿는다지만.

이제 시작하는 회사에서 대표가 얼굴을 감추는 것도 안 될 일.

“그러게요. 오늘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무래도 이쪽 회사 투자는 안 받는 게 좋겠네요.”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하셨군요. 속내가 뻔히 보입니다. 적당히 지분 잡아먹고 나중에 뭔가 요구하려는 것 같은데, 이 회사 대표랑 숨 엔터 대표랑 아는 사이라는 것도 꺼림칙하고요.”

“거기까지 알아보셨습니까?”

“그럼요. 이 바닥에서 정보 빼면 시첸데.”

도윤은 주섭의 철저함에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눈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급한 건들은 다 해결됐습니다. 미팅도 거의 다 끝났고, 자잘한 경우는 제가 다 마무리할 수 있고요.”

“그래서 안 그래도 힐링하러 가려구요.”

“힐링이요?”

“네. 하루 정도 고향 내려갈 생각입니다.”

주섭은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까…… 예전에 같이 촬영할 때도 고향이 어딘지를 못 물어본 것 같네요.”

“뭐, 연기하는 데 중요한 사실은 아니니까요.”

“그렇긴 하죠. 제가 맞춰볼까요? 음…… 서울? 아차, 내려간다고 하셨지.”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영주로 갑니다.”

“영주…… 아. 입봉작 찍을 때 가 봤었는데. 하하. 그럼 언제 내려가십니까?”

“오늘요. 이따 차 끌고 내려갈 생각입니다.”

“운전 조심하시고, 잘 다녀오세요. 안 계시는 동안 별일 없이 잘 처리해두겠습니다.”

“네. 잘 부탁할게요.”

이제 도윤은 곧.

일본으로 간다.

그래서 가기 전, 잠시 가족들을 보고 싶었다.

주섭에게 말한 것처럼.

약간의 힐링도 더해서 말이다.

그래서 주섭과 헤어져 집에 잠깐 들른 뒤 고향에 내려가는 길은 아주 즐거웠다.

평일이라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휴게소에서 통감자와 핫도그도 사 먹고.

지나가다 풍경이 괜찮은 곳이 보이면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사진을 찍는 등.

이제는 이전과 다르게 능숙하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영주로 내려와선.

가족들의 질문 세례를 받아냈다.

“오빠. 나 나중에 졸업하면 오빠 회사 가도 돼?”

“이력서 넣어. 엄격하게 판단해 줄게.”

“너무해.”

“야, 도윤아. 배우 계약은 안 받냐?”

“말하지 않았냐? 행인 전문 배역으로는 받아줄 용의 있다고.”

리나와 동하.

“어유, 이제 그럼 대표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거냐?”

“네. 나중에 언제든 놀러 오세요. 어머니도요.”

“됐다. 어디 가서 도윤이 엄마라고 말하고 다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는 더 힘들어지게 생겼어.”

아버지와 어머니.

가족들을 보니.

그간 바쁘게 움직이며 쌓였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다.

일본에 가기 전.

마지막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근데 말이다, 도윤이 네가 하는 일이니까 뭐 잘하겠지 싶다가도…… 힘들지 않겠어?”

어머니의 말에 도윤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혹시 힘들면 영주 내려와서 쉬다 갈게요.”

어머니가.

무슨 말을 원할지 이미 아는 아들.

“그래, 와서 동하랑 리나한테 잔소리도 좀 하고 그러렴. 쟤들 둘 쫓아낸 거 잘했다.”

참고로.

도윤은 집을 옮기면서 객식구들을 내보냈다.

위치도 위치거니와.

저 둘을 그냥 저대로 뒀다간 학점이 답이 없을 정도로 추락할 것 같아서였다.

도윤이 한국에 있는 동안에도 친구들을 불러 술판을 벌이는가 하면-

서울에서 놀러 다닌다고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니.

도윤은 이 둘에게 기댈 곳을 제공하고 싶긴 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의존하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

그나마 둘 다 요새는 정신 차리고 공부 좀 하면서 취업 준비도 하니 다행이라지만…….

“니들 혹시 도윤이한테 용돈 달라, 뭐 사 달라 하면 엄마한테 죽는다. 알았어?”

“우리가 무슨…….”

“아, 유리나 얼마 전에 도윤이한테 가방 가방 노래를 불렀던 것 같…… 아, 왜 때려!”

“야! 내가 언제 사 달라고 했냐?”

그새 투닥거리는 둘의 모습에 슬며시 웃던 도윤은.

문득 생각 났는지 어머니에게 물었다.

“근데 정말 서울 올 생각 없으세요?”

“엄마는 됐어. 여기서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니 아빠랑 늙어 죽으련다. 정 안 되면 나중에 남편 바꾸고.”

“뭐, 뭐라고?”

아버지가 경기를 일으키는 가운데.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야, 도윤아! 인마!”

아버지의 절규 속.

도윤과 어머니는 약속이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한가로운 낮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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