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싸게 먹히는 장사
소문이라는 건 늘 그렇듯.
빠르고, 어딘가를 거칠 때마다 살이 붙는다.
이번 소식은 특히 그랬다.
도윤이 후 아카데미를 방문했다는 소식은 지망생들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고-
이는 곳 현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귀에도 들어갔으며.
마침내 도윤과 서로 알고 지내던 사람들도 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우와…… 진짜야? 진짜로? 도윤 오빠가 회사 만든다고?”
“진짜라니까? 나도 들은 건데, 아카데미에 와서 학생들 연기 오디션 보고 갔다잖아.”
“대박. 그럼 신인들 영입하려고 하는 건가?”
대체로 놀랍다는 반응과-
“너무하네. 우리한테 말해줬으면 무조건 거기 갔을 텐데.”
“회사가 무슨 동아리냐? 돈은 얼마나 챙겨줄지 어떻게 작품 꽂아줄지 알고?”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도윤이 정도면 솔직히 같이해 볼 만한데…….”
“내가 도윤이 싫어하거나 그러는 건 아닌데, 그거 엄청 힘들어. 계속 활동해도 모자랄 애가 회사는 무슨 회사.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든 거야?”
의문과 아쉬움이 섞인 반응이 주를 이뤘다.
특히.
유나는 거의 절규하고 있었다.
“너무해…… 진짜 너무해…….”
“너무할 것까지야.”
“오빤 알고 있었지? 차정수, 말해!”
“어허, 나도 몰랐…… 미안. 알고 있었어.”
“다들…… 나 따 시키는 거야?”
도윤이 미국으로 떠나고.
한동안 보지 못하면서 마음을 접은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도윤이 회사를 세웠다는 말을 들은 순간 몰려오는 서운함이.
자신이 아직 도윤을 마음에 품고 있음을 깨닫게 해준 것.
물론 어떻게 할 방법은 없었다.
도윤이 유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유나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으니까.
“유나야, 때로는…….”
“알아, 그만 말해. 이모!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여하튼.
유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와, 오빠 진짜…… 행동력 대박. 어떻게 하려고 하는 거지?”
“해영아. 나 거기 갈까? 나 재계약 1년도 안 남았는데.”
“나는 6개월. 오빠한테 전화해 볼까?”
“너희들 다 미쳤구나. 회사 옮기는 게 무슨 동호회 탈퇴하고 가입하는 건 줄 아냐?”
“왜요! 그러는 석준 오빠는 계약 만료되자마자 이엔으로 옮겼으면서!”
사방에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고.
곧바로.
“이거, 장난 없는데요.”
도윤을 통하든.
아니면 주변 사람들을 통하든.
그도 안 되면 도대체 어떻게 알아낸 건지 도엔터 사무실로 전화를 거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예상했잖아요. 그대로 움직입시다.”
“네, 대표님.”
“죄송해요, 필드에서 뛰시다가 이렇게 전화 받고 하시려니 쉽지 않으실 텐데.”
“어유, 무슨 그런 말씀을. 오히려 재미있는데요. 필드에서 뛰면서 수십 명이랑 부대끼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주섭이 말이라도 이렇게 해주니.
참 다행이었다.
지금 외부 커뮤니케이션은 주섭이 거의 모두 담당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 아래 팀원들을 몇 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경험이 쌓이려면 시간이 꽤 걸릴 테니.
“네, 네. 아직 영입 계획은 없습니다. 네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당분간 신인급 배우들을 캐스팅하는 건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아이고, 육 배우. 오랜만이야? 어떻게 들었대? 응, 응. 나 여기서 일하게 됐지. 아, 이쪽 조건? 급해? 내가 알기로 재계약 1년 넘게 남았잖아? 우리 아직 신생이야. 뭘 벌써부터 그렇게 급하게…….”
“어이구, 후배님. 어인 일로 전화까지. 응? 드라마 들어가는데 우리 배우들 캐스팅하고 싶다고? 아이고, 마음은 감사한데 벌써부터 무슨. 우리 아직 세팅도 안 끝났어. 매니저랑 스타일리스트들 면접도 안 봤다고. 배우들 짐도 안 옮겼는데 무슨.”
그런 이유에서 주섭은 오랜 현장 경험을 잘 살려 걸려오는 전화를 능수능란하게 쳐 내고 있었고.
“그럼, 전 이제 우리 배우들 좀 만나러 가겠습니다.”
“살살하세요. 애들 긴장해서 죽으려고 하던데.”
“뭐, 그것도 나중에 익숙해지겠죠. 그럼.”
덕분에 도윤은 그런 주섭을 믿고 편안하게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진심으로 영광입니다.”
바로.
자신의 손으로 직접 발탁한.
도엔터 최초의 배우들과 계약 후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였다.
정윤아.
서강우.
그리고.
이한영까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회귀 전 막 캐스팅되어 이엔 엔터 사무실로 들어선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추억을 곱씹기엔 꽤나 진지한 자리였다.
“진심으로 기쁘고, 행복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이라는 점을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네엡!”
대선배이자.
자신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대표 앞에 있다 보니.
절로 나오는 우렁찬 대답.
도윤은 굳이 고개를 젓기보단.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딱딱하게 안 굴어도 된다고 말해 봤자.
지금 이들의 귀엔 들리지 않을 테니까.
도윤은 말을 이어갔다.
“다들 어제 일자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뒤, 정식으로 도엔터 소속 배우가 되었습니다. 그렇죠?”
“네!”
“그럼 이제 우리의 목표는 하납니다. 데뷔죠.”
데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세 병아리의 눈이 번쩍 뜨였다.
꿈에도 그리던 그 말.
어디든 좋다.
데뷔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릴 수 있다면.
평생 꿈꿔 온 연기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걸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준비가 되어 있던 셋.
어쩌면.
그 간절함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걸지도 모른다.
“여러분들은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제가 직접 선택했으니까요. 믿어도 좋습니다. 그러니 앞으로 무슨 일이 있든, 전 여러분들의 편이 되겠습니다. 절 믿고, 열심히 해주신다면 좋은 결과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여기가 군대였다면.
아마 목소리 좋다며 누군가 한 명은 칭찬받지 않았을까.
물론 도윤은 이런 딱딱하고 수직적인 분위기를 썩 반기지는 않는다.
주섭과 전문경영인의 조언에 따라.
대표로서 최소한의 위엄만 갖추려고 한 것뿐.
다만.
이름값이 이름값이다 보니.
최소한으로 갖춰보려고 했던 위엄이 의도치 않게 너무 커져서 문제인 셈.
“이제부터 여러분들은 트레이닝에 들어가게 됩니다. 가능성과 현재의 능력은 별개기 때문이죠. 이후 트레이닝 결과에 따라…… 여러분들의 데뷔가 결정될 겁니다.”
도윤은 차근차근.
세 초짜에게 청사진을 설명했다.
“그럼…… 오디션을 보러 가는 건가요?”
이런 가운데 마침 들려온 좋은 질문.
도윤은 씩 웃으며 답했다.
“오디션이라뇨. 뭐, 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요식행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세 사람의 눈이.
번쩍 뜨인다.
신인들을 오디션 한번 거치지 않거나, 거친다 해도 요식행위로 만든다는 건-
작품에 다이렉트로 꽂겠다는 뜻.
그런데.
도윤이 말한 건 의미가 조금 달랐다.
“그렇게 되도록 제가 여러분들의 실력을 끌어올릴 테니까요.”
실력을 끌어올리겠다.
다시 말해서.
굳이 오디션을 볼 것도 없이 압도적인 실력으로 만들어내겠다는 뜻.
꿀꺽.
긴장감과.
부담감에.
마른침이 넘어갔지만.
도윤은 이미 알고 있는 이 셋의 미래를 떠올리며 속으로 웃고 있었다.
‘뽑아 보니 얘들일 줄 알았겠어.’
정윤아.
도윤이 회귀한 시점에서 이미 주목받는 신인으로 주가를 높이며 무쌍의 독특한 마스크를 ‘주류’로 끌어올린 장본인.
서강우.
지금 살이 조금 쪄서 그렇지.
이른바 ‘안 긁은 복권’이라는 말을 데뷔 초부터 들어왔고.
살을 뺀 이후로 청춘 드라마에 미친 듯이 캐스팅되었던 배우.
물론 연기력도 출중하다.
마지막으로 이한영.
매년 ‘괴물 신인’이라 불리는 배우들이 출현하지만.
이한영은 조금 특별했다.
그들 중에서도.
압도적인 연기 스펙트럼을 선보이며.
대중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던 것.
아마.
도윤이 회귀하던 해에 데뷔해서.
연말에는 신인상까지 거머쥐었던 괴물.
원래대로의 미래라면 이들 모두 서로 다른 소속사에 있을 테지만.
도윤이 회귀한 미래엔.
모두 ‘도엔터’에 모인 것.
주목받을 신인 셋 모두가 말이다.
“트레이닝은 저를 비롯한 총 세 명의 배우가 참여합니다. 여러분들이 데뷔한 이후에도 관리를 해줄 사람들이니, 이 사실 잘 알고 계시면 될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잘 알고 계실 테니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지금 말씀드리는 두 분의 이름을 잘 기억해 두시길 바랍니다.”
이런 가운데.
도윤은 트레이닝을 언급하며 이들의 실력과 잠재력을 터뜨려 줄 연기 선생님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모두가 긴장했다.
과연 누굴까?
그런데.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유광섭, 그리고 류해영 선생님입니다.”
쩍 벌어지는 입.
유광섭이면.
원로 배우들 중에서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는 대선배.
류해영은 그 이름값에 못 미친다지만.
어디까지나 유광섭에 비해서지.
아역부터 쌓아 온 탄탄한 연기력을 2년 전부터 만개시키며 청춘 드라마 주연으로 호평을 받았고.
이제는 명실상부한 주연이 된 배우.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을 가르친다고?
“특별히 모셨으니 잘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이상입니다.”
모두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계약금 각 1억씩.
아직 대외적으로 아무것도 검증되지 않은 신인을 데려오는 데 이만한 거금을 주고.
이 셋을 데려온 이유가.
이제야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몰려오는 공포.
돈이야 아무래도 좋으니.
도윤의.
제대로 굴리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 * *
“각 계약금 1억에 유광섭, 류해영, 최도윤…… 도윤이 너야 대표니 그렇다 치는데, 저 둘은 어떻게?”
“뭐, 그냥 여쭤봤죠.”
“나 참. 물어본다고 될 사람들인가. 류해영 그 친구는 너랑 예전에 드라마 같이 찍었으니까 어지어찌 됐다 쳐도, 유광섭 선생님은…….”
“뭐, 잘 부탁드렸죠.”
“하여간.”
정수는.
피식거리며 도윤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거 원.’
자신이 JS 엔터를 세울 때와 비교하면.
출발부터 다르다.
그때는 뭐가 뭔지도 제대로 몰라 시행착오를 겪고, 하마터면 회사가 날아갈 뻔한 순간도 종종 겪었는데.
도윤은 전혀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주안나가 먼저 흥미를 보이긴 했다지만, 그래도 대기업의 투자를 이끌어낸 것도 대단한데.
‘연기 선생님’이라며 데려온 사람 둘의 면면도 훌륭하다.
아니, 훌륭한 수준이 아니다.
‘이 정도면 도엔터로 오려고 난리도 아니겠는데?’
신인 배우들이.
기를 쓰고 들어오려고 할 테지.
이런 와중에.
홍보도 착실히 준비한 모양인지.
“아, 네. 기자님. 지금은 제가 좀 바빠서. 네네, 그 내용 맞습니다. 그대로 내주시면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전혀 안 잊고 있죠. 그럼, 조만간 식사 한번 하시죠. 네, 들어가세요.”
기자들과 ‘정겹게’ 통화도 나눴다.
“기자들이랑 친해 보인다?”
“몇 명이랑만요.”
“그게 어디 쉽냐. 나 참. 연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뭘 이렇게 해놓은 게 많냐?”
정수의 말에 도윤도 피식거렸다.
“그러게요.”
생각해 보면.
회귀 후 연기만 한 건 아니었다.
연기를 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일에 손을 대고,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회귀 전.
오만함 일변도로 나가며 서서히 주변과 멀어지던 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거침없이 회사를 열고 당당히 걸어갈 수 있는 거겠지.
“근데 곧 일본 가잖아. 이렇게 확확 추진해도 괜찮겠어?”
“상관없어요. 어차피 거리도 가깝고.”
“너 진짜 마음 제대로 먹었구나.”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제대로 마음먹은 게 맞으니까.
물론.
누가 봐도 과한 계약금 베팅은 딱히 다른 사람에게 설명할 길은 없었지만.
저 셋이 미래에 차지할 위치를 고려한다면…….
‘싸게 먹히는 장사지. 그것도 아주.’
몇 년 지나지 않아 펼쳐질 미래를 상상하는 도윤의 입가에는.
그야말로 미소가 가득했다.
아주 행복해 보이는 미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