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87화 (187/200)

187.얘가 진짜 걔야?(3)

최도윤.

이미 톱배우의 위치에 올라섰고.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연출에도 어느 정도 재능이 있으며.

신인 고르는 데엔 탁월한 실력을 가졌다는 게 이미 증명된 사람.

그리고.

일단 선택한 사람과는 거의 끝까지 가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한 배우.

그런 도윤이 믿고 고른다는 건.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진주섭 PD.

아니, 이제는 실장 직함을 단 진 실장이 그랬다.

“전체적으로 괜찮네요. 으음…… 지금까지 듣기만 했는데, 정말 신인 보는 눈이 뛰어나시네요.”

“그런가요?”

“네. 제가 필드에 있었다면 이유 불문하고 카메라 앞에 세웠을 겁니다.”

탁.

며칠을 검토한 서류를 내려놓은 주섭이 내린 평가였다.

이유 불문하고 카메라 앞에 세웠을 것.

수많은 드라마를 연출하며 베테랑인 주섭이 한 말이니.

더 검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거, PD 때려치우고 다시 넥타이 맨다고 했을 때 마누라한테 엄청 욕 먹었는데…… 나중에 할 말 좀 있겠는데요?”

“잘만 되면 섭섭지 않게 챙겨드리겠습니다.”

“지금도 전혀 섭섭지 않은데요, 뭘.”

씩 웃는 주섭은.

흥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신생 엔터로 뭘 하나 싶었는데.

청사진을 들으며 생각이 달라졌고.

며칠 전.

회사에 데려올 신인 배우 명단이라며 도윤이 건넨 서류를 봤을 땐.

확신할 수 있었다.

잘하던 PD 일을 때려치우고 여기 온 게 틀린 선택이 아니었음을-

‘뭐…… 이제 현장에서 일할 체력이 없어 보인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주섭은 안 그래도 고민하던 차였다.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

급변하는 촬영 환경.

슬슬 힘에 부치는 스스로의 모습까지.

하지만 일을 놓을 수는 없는 마당이었는데.

마침 도윤이 좋은 제안을 한 것이다.

캐스팅 전반과 배우들의 연출 관련 지도를 부탁한다면서.

주섭은 일단 도윤이 이런 제안을 한 것에 놀랐고.

무엇보다 ‘연출’ 쪽에서 지도를 해달라는 말에 놀랐다.

배우는 보통 연기를 먼저 배우는 쪽이지.

연출을 우선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도윤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연출을 이해하고 연기에 접목시키면.

분명히 좋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고.

특히, 현장에서 오래 일한 주섭의 말이라면 강력한 힘을 가질 거라면서.

놀라운 제안을 해 왔던 것.

그래서 주섭은 망설임 없이 제안을 수락할 수 있었고…….

‘아깝긴 해도, 이만하면 충분하지.’

막 제안이 들어왔던 드라마 제안을 과감히 포기하고 여기 오게 된 셈이다.

“보시기에 나쁘지 않다면, 아카데미 쪽으로 제안 넣겠습니다.”

“이 친구들은 노났네. 이거, 여기 둘은 조금만 다듬으면 곧 데뷔도 가능하겠어요. 아카데미 쪽에서 보내 온 연기 영상 보니까 그렇더라구요.”

고개를 끄덕이던 주섭이 나머지 한 명의 배우 지망생을 언급한 건 그때였다.

“그런데 말이에요, 여기 있는 이한영이라는 친구는…… 조금 애매하던데요? 아주 못 하는 건 아닌데, 둘에 비하면 조금 떨어져요. 그래도 대표님이 픽한 친구니까 뭐 이유가 있겠지 싶었는데…….”

“좋은 말입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뭘 말이에요?”

“의문을 가지는 거요. 저는 제가 하는 말이라고 모두 믿고 무조건 따라주는 사람보다는, 이렇게 제 의견에 제동을 걸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도윤의 그 말에.

주섭이 고개를 끄덕여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도윤의 말이 이어졌다.

“다시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 이한영이라는 배우는 제가 다시 한번 검증해 볼 생각입니다.”

“검증이라면…….”

“그때 제 앞에서 펼친 연기가 진짜였는지, 아니면 그냥 한순간의 실력이었는지 말이죠.”

“으음…… 연출가적 입장에서 봤을 때 순간적인 연기력이 진짜가 아니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렵습니다. 배우들마다 기복이 있는 법이고, 맞는 배역이 있는 법이니까요. 좋은 생각 같습니다. 한번 준비해 보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그럼 일단 일정대로 진행해 주세요.”

“네.”

주섭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현장에서 봤을 때도 배우로서 대단하다고 느끼고, 나아가 최도윤이라는 한 사람을 좋게 보고 있었지만.

‘대표’로서의 도윤도 만만찮다.

이미 준비를 마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여하튼.

무섭다.

이 ‘도엔터’가 어디까지 성장할지 가늠이 되지 않아서.

그런 한편으로는.

흥분됐다.

그렇게 성장할 도엔터에서…….

자신이 어떤 역할을 맡게 될지 상상하니까 말이다.

“그럼 지금 바로 아카데미 쪽에 연락하겠습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도윤은 적극적인 주섭의 모습에 씩 웃었고.

역시.

자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 * *

이한영은.

도엔터가 위치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서울 한복판의 거대한 오피스 건물.

여기 두 개 층을.

‘도엔터’가 사용한다고 한다.

꿀꺽.

그냥 올려다보고만 있어도 절로 넘어가는 마른침.

서울 생활을 몇 달이나 했지만.

여전히 이런 커다란 건물 앞에서는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

‘무슨 촌놈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속으로 투덜대던 이한영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는 최도윤이라는 배우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다.

물론.

완벽한 선택은 아니다.

오늘 한번 얼굴을 보고.

‘테스트’를 한다고 한다.

그럼 그 ‘테스트’에 통과할 경우…….

자신은 마침내 도엔터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꿈에도 그리던.

엔터 회사의 배우로 계약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한 걸음이야. 빨리 성공해서 아부지 호강시켜 드려야지.’

이한영이 배우의 꿈을 꾸게 된 데엔 여러 이유가 존재하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아버지였다.

농사일로 매일매일 힘겨워하시는 아버지를 위해.

하루라도 빨리 성공해서 호강시켜드리고 싶다는 마음.

저벅, 저벅.

마침내 결심을 마친 이한영은 로비로 들어섰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 뒤.

떨리는 손으로 13층을 눌렀다.

그리고.

엘리베이터가 올라가는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띠잉!

정신을 일깨우는 듯한 소리에 이한영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내, 내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허겁지겁.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 있던 이한영은 간신히 몸을 비집고 13층에 내렸고.

내리자마자 보이는 도엔터의 간판에 다시 한번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떨어지지 않을 듯했던 발이 서서히 움직이고.

마침내 도엔터 앞에 선 순간.

띠릭.

문이 열리며 누군가 나왔다.

“아, 타이밍 좋네요. 이한영 배우, 맞죠?”

“네, 네? 네!”

엉겁결에 대답하는 이한영 앞에서 씩 웃고 있는 사람은 바로.

주섭이었다.

물론 이한영은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사람이 수많은 히트작을 연출한 PD였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예능이면 모를까.

드라마 PD의 얼굴을 아는 경우는 드무니까.

“일단 들어가죠. 오는 데 어려움은 없었고요?”

“아, 그. 네! 잘 알려주셔서 괜찮았습니다.”

“좋네요. 대표님 안에 계십니다. 가죠.”

주섭은 싱글거리며 이한영을 안으로 안내했고.

꽤 넓은 사무실엔.

이미 몇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었다.

“아직 좀 텅 비어 보이죠? 앞으로 곧 채워질 겁니다. 회사가 설립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요.”

“그, 그렇군요.”

“앞으로 좋은 기회를 잡은 거라 믿게 해드리겠습니다.”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이한영의 머릿속은 지금 주섭이 하는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의미를 생각할 만큼 한가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금 저기 보이는.

대표실만이 눈에 들어왔다.

이를 본 주섭이 옅게 웃으며 이한영을 안내했다.

“이거, 어서 가야겠네요.”

“네?”

“아닙니다. 아, 마침 나오시네요.”

그때.

도윤이 대표실 문을 열고 나오더니.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이한영을 맞이했다.

“두 번째네요, 이한영 배우.”

“아, 그, 아,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우렁찬 인사와.

선배님이라는 호칭.

도윤은 굳이 그걸 바로잡기보다는.

웃으며 악수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많이 긴장한 것 같은데.”

“아, 아닙…… 그, 그렇습니다!”

“그래도 그때 그 모습, 기대해도 좋겠죠?”

이런 와중.

날아온 질문에 이한영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신인 특유의 패기인지.

아니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내지른 건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이제 ‘테스트’가 진행될 것이다.

완벽한 방음이 이루어지는.

대표실에서.

저벅, 저벅.

몇 걸음 걷지 않아 대표실 안으로 들어선 이한영은.

주변을 살필 틈도 없이 소리 나지 않게 목을 가다듬었고.

이내 도윤과 주섭이 맞은편에 앉자.

자연스럽게 반대편에 서서 그 둘을 바라봤다.

“방법은 자유롭습니다. 이전에 했던 연기도 좋고, 다른 연기도 좋습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면 됩니다.”

들려오는 도윤의 목소리.

이한영은 고개를 끄덕였고.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자신이 서울로 올라왔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그,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선언하듯.

읊조리고.

자신의 연기를 시작했다.

“그냥 니가 참 거슬려.”

느껴지는.

섬뜩함.

달라진 눈빛에서 보이는 건-

“그게 지금 죽는 이유야. 미안.”

도윤이 <그 남자의 메모리>에서 연기했던.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다한’의 눈빛이었다.

‘오호.’

당연하게도 그 드라마를 봤던 주섭의 눈이 이채를 띠었고.

그 드라마에서 ‘이다한’을 연기한 도윤은.

무표정했지만.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흥미롭다는 듯이.

“자…… 여기 보여? 여기 있잖아, 여기. 아, 너는 못 보겠구나. 손이 뒤로 묶여 있으니까. 이거 네 손가락이야. 대충 1시간 전? 그때 잘랐는데. 혹시 알고 있었어?”

이어지는.

‘이다한’의 대사들.

도윤은 <그 남자의 메모리> 촬영 당시를 추억하는 한편.

자신이 만약 ‘이다한’의 상대역이었다면 어땠을까 하며 상상해 보았고.

대략적인 결론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하나씩 자를 거야. 대답이 마음에 안 들면, 두 개씩 자를 거고. 쉽게 말해서…… 질문 다섯 번 만에 손가락이 전부 사라질 수도 있는 거지. 알아들었지?”

그리고 마침내.

“그럼, 시작해 볼까?”

클라이막스에 다다랐을 때.

“좋네요.”

도윤이 한마디 툭 던졌다.

아주.

덤덤하게.

하지만.

그 한마디가 지닌 의미는 남달랐다.

“어…….”

이한영은 말문이 막힌 듯할 말을 잃었고.

주섭은 이제야 도윤이 애매하기 짝이 없던 지망생을 여기까지 불러 ‘테스트’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렇게나 잘할 줄이야.

‘근데 그럼 왜 지금까지는 두각을 못 드러냈던 거지?’

물론 의문은 아직 남아 있다.

사람마다 계기가 다르지만.

이한영의 경우, 우상 앞에서 연기한다는 그 사실 자체가 계기였다는 걸.

주섭은 모르고 있었으니까.

“진 실장님, 어떠십니까?”

그때 들려온 도윤의 물음.

주섭에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네. 저도 좋네요. 미사여구가 더 필요할 것 같지만…… 이 정도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도윤은 그 대답에 씩 웃었고.

“네. 그럼…….”

이한영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한영 배우, 저희랑 계약하시겠습니까?”

당연하게도.

이한영 역시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네! 하겠습니다!”

우렁찬 대답 속.

세 사람은 각자의 이유로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