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83화 (183/200)

183.할 거면 제대로

도윤은 조금 달라졌다.

작품을 할 때는 작품 외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과거와는 달리-

이젠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하고 있었다.

사진을 찍고 다니고.

틈이 나는 대로 영주에 가서 가족들을 만나고.

심지어 촬영을 마친 날, 동료 배우들과 만나 술병을 기울이기도 한다.

도윤은 깨달았다.

딱 하나에만 집중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게 살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나날들이다.

미국에서 비슷한 걸 깨달으며 카메라를 대뜸 구매한 것처럼.

도윤은.

스스로를 위한 삶을 서서히 살아가기 시작한 것.

그래서.

도윤은 아직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라 여겼다.

예를 들자면-

회사 설립에 더욱 박차를 가하는.

지금처럼 말이다.

“대단하시네요. 제가 알기로, 방금 촬영 마치고 오신 거 아닌가요?”

“그렇죠. 근데 이건 다른 일이죠. 피곤하진 않습니다.”

“한국 갔다가 미국 갔다가 다시 한국에 이제는 곧 일본에…… 어우, 저는 상상도 안 되네요.”

도윤은 너스레를 떠는 전문경영인의 모습에 빙그레 웃었다.

“그나저나 이거, 엄청 떨리네요. 제 딸내미가 그러는데, 최도윤 배우 만나면 바로 그날 로또 사야 한다고. 하하하. 제가 차라리 대기업 회장님 앞이었으면 덜 떨었을 것 같은데. 하하.”

“좋은 따님을 두셨네요.”

오늘은.

‘도엔터’의 본격적인 설립을 논의하는 자리.

그리고 앞에 앉은 사람은 청진그룹과 꽤 긴밀한 관계에 있는 전문경영인이다.

여하튼.

도윤은 가급적 일본에 가기 전 어느 정도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만들어두려고 한 것.

상대가 협조적인 만큼 일은 편하게 진행되겠지만.

도윤은 만만하게 보이거나.

적당하게 일을 진행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까지 함께한 이엔 엔터에서 나가면서까지 계획한 일이니까.

그렇다고 배수진을 치는 등, 매우 처절한 마음으로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까지나.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딱.

그 마인드였다.

“일단 본격적으로 설립을 시작하는 건 다음 주부터입니다. 언론 대응에 대해서는 생각해두신 바가 있을까요?”

“알려져도 상관은 없습니다. 하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약간의 대응은 필요하겠죠. 보도자료 배포도 필요할 테고, 기자 간담회나 기자회견도 필요할 겁니다.”

“시작부터 아예 판을 크게 벌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물론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최도윤 배우, 아니 대표님과 관련된 기사 한 줄이라도 뜨면 난리가 나겠지만…… 불은 지를 거면 크게 지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다.

기왕 하는 거.

제대로 홍보하고.

제대로 각인시키는 게.

나쁠 이유가 없다.

중국에 업체 차려서 도박 사이트 운영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홍보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

“크게 가시죠, 대표님.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일단 한번 각인되면 잊기 힘듭니다. 요즘 말로 빌드업이라고 하나요?”

도윤에게 요즘 말은 아니다.

회귀 전부터 줄창 들어왔고.

회귀 후에는 최근에야 듣기 시작했으니까.

“그런 ‘빌드업’을 통해서 대중들에게 회사를 각인시키고, 이를 발판 삼아서 차근차근 해 나가는 겁니다. 물론 대표님 이름 석 자만 대면 올 신인 배우들 널리고 널렸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이 ‘도엔터’라는 이름을 얼마나 더 알리냐는 거죠. 사업의 세계는 냉정합니다. 연예인들이 자기 이름 걸고 하다가 망한 사업 한두 개가 아닙니다. 서류들 줄 세우면 지구 몇 바퀴는 돌리고도 남아요.”

여하튼.

전문경영인이 이야기하는 건 확실한 홍보.

그리고-

“체계를 잡을 사람도 필요하죠.”

인력이다.

물론 인력 부분은 주안나에게 이미 요청한 바 있고.

도윤도 나름 알아봐 두었다.

엔터 쪽에서는 잔뼈가 굵은 사람과.

제작사에서 구를 대로 구른 사람까지.

“대표님께서 말씀하신 두 분과는 미팅을 마쳤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의욕도 있고 나름의 계획도 있더군요. 그래서 대표님께서 저에게 제시하신 청사진을 일부 공유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둘은 도윤이 이전부터 알고 지냈던.

이엔 엔터의 서강호 실장.

<그대 내 품에>로 인연을 맺은 진주섭 PD였다.

“그래서 두 분을 데려오는 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연봉은 적정선으로 협상할 예정이고요. 원하는 대로 주라고 하셨지만, 그렇게 됐다간 나중에 어떤 일이 될지 모릅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까요.”

“그 부분은 뜻에 따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일단 시작은 두 분과 저로 하고, 아마 차차 직원을 늘려갈 것 같습니다. 인사권을 주신 만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권.

어떻게 보면 돈줄을 쥐고 있는 것 이상으로 기업에서 중요한 권력.

지금 이 사람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도윤은 자신이 가지지 못한 ‘눈’을 가진 이 사람의 능력은 믿었다.

여하튼 중요한 건.

지금 미리 청사진을 그려놓고.

어느 정도 실현시킨 뒤 일본으로 가는 것.

배우와 대표이사.

이 두 개의 아이덴디티를 양립시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만-

그래도.

하고 싶었다.

이전부터 꿈꿔왔던 일이니까.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완벽하게 해 놓겠습니다. 일본에 계신 동안에도 신경 안 쓰이게요.”

“신경 안 쓰면 어디 그게 대표이사일까요.”

전문경영인은 웃음을 터뜨렸고.

도윤 역시 그를 바라보며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럼, 홍보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시작부터 크게 하진 않겠습니다. 조금씩 불씨를 키워가다 나중에 쾅! 터뜨리는 게 중요하죠.”

“이를 테면요?”

“혹시 찌라시라고 들어보셨습니까?”

* * *

<미래의 너에게>는 반 사전제작으로 흘러가는 중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완전히 완성시킨 후 드라마를 방영하는 게 아니라.

절반 이상의 회차를 쌓아놓은 뒤 방영에 들어가기로 결정된 것.

이건 방송국의 편성 사정이 끼어 있었다.

하지만 반 사전제작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한국 방송국 드라마에 즐비한 쪽대본 드라마를 찍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자자, 조금만 힘냅시다!”

그런 이유로 스태프들이 지친다거나, 배우들이 무리한 일정을 강요받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럴 수가 없었다.

배우들 중에는 최도윤이 있었고-

최도윤은 주연답게 가장 많은 씬을 소화하고 있는데.

그런 배우한테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촬영해달라고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 악독하다는 방송사들도 설설 기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그 덕분에 다른 방송사에서 쪽대본이며 추가 촬영이며 촬영일자 변경이며 온갖 일을 다 겪어본 다른 배우들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뭐 이렇게 널널하냐. 난 무슨 엑스트라 알바 뛰는 것 같은데.”

“진짜 한 씬 찍고 무슨 며칠을 쉬냐. 이래서 종방까지 다 찍겠어?”

“원래 이게 맞긴 한데…… 이거 영 적응이 되어야 말이지.”

이 상황이 너무 어색한 나머지.

이게 드라마 촬영인지 아니면 1분짜리 단편 영화를 찍는 건지 헷갈리기 시작한 몇몇 배우들.

물론 그들은 알고 있었다.

촬영 일정 빡빡하기로 유명한 지상파 방송국 드라마 촬영 현장이 이렇게 여유로운 이유 말이다.

“다 최도윤 덕이지. 톱스타가 괜히 톱스타야.”

“방송국 놈들이 설설 기는 게 어디 흔한 일이야? 우리야 꿀이나 빨자고. 아, 이참에 한 작품 더 할까? 여기 안 그래도 스케줄 널널한데.”

“나도 하나 알아보는 중.”

그래서 본의 아니게 부작용도 일어나고 있었지만.

대충대충 하는 배우는 적어도 없었다.

최도윤이 함께하는 드라마다.

안 그래도 시청률이 보장되는 상황에서.

단 한 컷이라도 제대로 연기하면 눈앞에 길이 열릴 수도 있었다.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상위 1%가 독점하는, 이 냉혹한 시장에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

그래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차례가 올 때마다 눈에 불을 켜고 연기했고.

덕분에 오상학과 홍진아의 입가에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굳이 화를 내지 않아도.

알아서들 잘하고 있었으니.

이걸 두고.

‘선한 영향력’이라 표현하면 맞을까?

이런 가운데.

홍진아는 잠시 쉬는 동안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네?”

“음…… 톡방에 정보 물어다 주는 언니 한 명이 있는데…….”

홍진아는 윗입술을 아랫니로 잘근잘근 씹더니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다-

“톱스타 누가 회사 만든다는데?”

“그게 이상한 일인가요? 연예인들 사업하는 거야 뭐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니, 그게 아니라…… 엔터 회사를 만든다는데?”

놀라운 이야기를 꺼냈고.

그 말에 오상학도 흠칫했다.

“엔터 회사면…….”

“뭐, 연예인이 엔터 회사 만드는 것도 흔한 일인데…… 톱스타가 만드는 건 좀 결이 다르지.”

말 그대로.

어떤 연예인들은 재산과 연차가 적당히 쌓이면 인맥을 이용하든 생돈을 쓰든 해서 회사를 차린다.

처음에는 1인 기획사로.

나중에는 그 1인 기획사에서 여러 배우들과 함께하며 차근차근 성장시켜 나가는 것.

그런데 그게 톱스타라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이름만으로도 여러 기업의 투자를 유치할 수도 있고.

이름값 있는 연예인들도 여럿 몰리겠지.

그런 의미에서 아주 중요한 정보다.

홍진아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후보군을 떠올렸다.

하지만.

‘도대체 누굴까?’

마땅히 알맞은 사람은 안 보였다.

정확히는.

한 명으로 특정할 수 없었던 것.

“톱스타면…… 도대체 누굴까요?”

떠오르지 않기는 오상학도 매한가지.

도대체 누굴까?

감조차 잡히지 않는데.

알고 싶었다.

이 바닥에서 정보를 미리 아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으니까.

실제로 이런 정보들 덕분에 하루아침에 떼부자가 된 사람도 즐비하다.

어느 연예인이 회사를 크게 만들 건데, 거기 투자했더니 대박이 터졌다더라.

어느 엔터 회사에 어떤 연예인이 들어간다고 해서 주식을 샀는데, 그 이후 주가가 하늘을 찔렀다더라-

같은 이야기들 말이다.

톡톡톡.

[언니, 찌라시 이거 끝?]

[ㅠㅠ 나도 더 알고 싶다]

그래서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물어봤는데.

돌아온 건 그보다 더 아쉬운 대답.

그러다 문득.

홍진아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작가님?”

“아, 아니에요.”

바로 도윤이었다.

속으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온다.

말도 안 된다.

취미 하나 없이 연기에 미쳐서 다른 건 쳐다도 안 보는 사람이.

회사?

‘그럴 리가.’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홍진아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최도윤 배우님.”

“네?”

“이엔 엔터랑 꽤 오래하셨죠?”

“그쵸. 음, 데뷔 때부터 함께했으니까.”

“그럼 배우님은 나중에 회사 차릴 생각 없으세요? 왜요, 연예인들 중에서 그런 사람 많던데.”

짐짓, 모른 척 물어보는 그 모습에.

도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연기하기도 바쁜데, 회사라뇨.”

역시나.

“하, 하하. 그렇죠?”

그럴 리가 있나.

홍진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고.

옆에 있던 오상학 역시 도윤이 엔터 회사를 차릴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몸을 돌려 성호에게 다가가던 도윤의 입꼬리는.

아무도 볼 수 없는 사이.

슬쩍, 말려 올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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