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81화 (181/200)

181.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명불허전.

최도윤의 연기는.

리딩장을 압도하고 있었다.

카메라가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아니, 카메라가 있긴 하다.

하지만 평소에 보는 영상 촬영용 카메라가 아니라 기자들의 카메라다.

물론 여기가 기자회견장은 아니지만 말이다.

“들려요? 들리냐니까! 당신 뭔데 장난질이야! 어디서 걸었어!”

‘미래의 나’에게서 걸려온 전화.

폐인처럼 살아가는 ‘과거의 나’는 그 전화에 불같이 화를 낸다.

딱.

책상 위에 대본 하나만 두고.

눈을 감고 있으면.

무슨 보이스피싱이라도 당한 줄 알 정도로 강렬한 분노였다.

이런 가운데.

도윤은 감정을 빠르게 전환시켜 ‘미래의 나’를 연기한다.

“너도 네 꼴이 우습잖아. 부모는 어릴 때 너 버리고 도망갔고, 기껏 고아원 나와서 처음 당한 건 사기고, 간신히 만난 여자 친구도 너 버리고, 이제 뭐냐? 그래? 취객 하나 구해주고 도둑으로 몰렸지? 인생 참 고달파. 안 그래?”

방금까지 끓어 넘치던 분노는 온데간데없이.

듣기만 해도 화가 절로 치미는 조롱과 비아냥이 술술 튀어나온다.

한 사람 안에.

두 명의 인격이 존재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물론 도윤에게는 별달리 어려운 일도 아니다.

이보다 훨씬 더 격한, 그리고 훨씬 더 내밀한 감정의 변화를 오가야 했던 <그 남자의 메모리>의 ‘이다한’ 연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한국에서 수많은 작품을 하고 미국을 두 번이나 거친 도윤의 연기는-

더 이상 누군가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영역을 완벽히 구축한 것.

덕분에 도윤의 원맨쇼를 지켜보던 배우들의 머릿속엔.

경외감과.

불안함이 깃들었다.

과연 내가 저 연기 앞에서 두각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 드라마가 있지.’

마찬가지로 지켜보던 홍진아는 생각했다.

배우 여럿이 돋보이는 드라마와.

배우 한 명만이 보이는 드라마.

후자의 경우는 다시 둘로 나뉜다.

다른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안 좋은 나머지 한 명의 배우만 어쩔 수 없이 주목받는 경우.

다른 배우들의 연기도 좋았지만.

한 명의 배우가 너무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유한 경우.

지금이 바로.

그 경우가 될 것 같았다.

하지만.

‘해봐야지.’

그렇게 안 되도록 만드는 게 바로.

작가와 PD의 역할.

드라마 제작에서 둘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어떻게 연출하고, 어떻게 대사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조연급이 주연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주연급이 조연보다 못한 존재로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

여하튼.

둘의 또 다른 역할은 도윤이 지금 보여준 연기로 정해진 셈.

주연 배우, 도윤을 위한 연출은 당연하고.

이런 도윤의 연기에 묻히지 않도록.

다른 배우들을 살릴 연출과 대사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는 도윤이 뛰어나다는 사실에 기반하는 만큼…….

아주 긍정적인 신호였으며.

신인 PD 오상학이.

도윤이 기억하는 것보다 조금 더 일찍-

자신 특유의 연출 기법을 확립하는 계기가 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런 도윤의 연기는 배우들을 서서히 자극하기 시작했으며.

“좋습니다. 역시…… 더 말이 필요 없겠네요.”

도윤의 독주가 끝난 뒤.

마침내 시작된 다른 배우들의 차례에선 오상학과 홍진아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열연이 펼쳐졌다.

덕분에.

사각, 사각.

수첩에 송고할 기사의 얼개를 짜 내려가는 기자들의 손놀림도 덩달아 바빠지기 시작했으며.

어지간한 리딩 현장에서도 볼 수 없는 열정적인 분위기 속.

<미래의 너에게> 첫날 리딩은, 그렇게 시작부터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 * *

[<미래의 너에게>, 시작부터 강렬했던 리딩!]

[최도윤, 명불허전 톱배우의 연기…… 이게 바로 ‘연기’다]

[(현장포토)‘출구 없는 매력’ 최도윤, 리딩에 집중!]

리딩부터.

본촬영까지.

모든 과정은 일사천리였다.

도윤이 합류하며 엄청난 관심이 쏠린 것도 사실이나-

이제 더 이상 그게 방해가 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PPL 제안과 광고 문의 등으로 제작사와 방송사는 행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작품이었던 만큼.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미래의 너에게>는 동시간대 방영이 예정된 다른 모든 작품들을 제치고 가장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으며.

이엔 엔터는 지금.

또 한 번 도윤에게 몰려드는 광고 제안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

“진짜 딱 1년만 더 하면 좋을 텐데.”

“제 말이요.”

“한번 이야기해 볼까?”

“도윤이가 이미 결정한 거 뒤집는 거 봤어요?”

“……없었지.”

물론 동민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선 욕심을 낼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정중하게 거절해. 배우 사정으로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다고.”

“알겠습니다. 아, 그 전에 먼저 도윤이한테 광고 들어온 업체 리스트 넘길까요?”

“그렇게 해. 도윤이 이제 계약 끝나고 법인 출범하면 그쪽으로 해야 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대답한 경후는 문득 한숨을 쉬었다.

“이제 진짜 이별이라는 게 실감 나네요.”

“이별은 무슨. 어디 은퇴하는 것도 아니고.”

“그래도요. 계속 같이한 배우가…… 이렇게 떠나는 게 좀 마음이 이상합니다.”

동민도 아쉽기는 매한가지.

아니, 이엔 엔터의 그 누구보다 아쉽다.

도윤이니까.

이 회사를 여기까지 끌어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었으니까.

‘어쩌겠어.’

동민은 나오려던 한숨을 도로 삼키는 한편.

<미래의 너에게>에 대해 물었다.

“참, 드라마는 좀 어때?”

“편성 시각도 변경됐고, 제작비도 거의 몇 배 이상 증액해 줬다고 합니다. 확실히…… 대우가 달라졌다는 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렇게 해야지. 도윤이가 왔는데.”

“그것도 그렇고, 그쪽 PD가 꽤 강단이 있다고 합니다. 오상학 PD라는데, 들어보셨습니까?”

“아니, 처음 듣는데. 흠, 내가 처음 들어 봤으면 거의 경력 없는 PD일 테고…….”

그때 문득 웃음을 터뜨리는 경후.

“도윤이 녀석, 이제 배우가 아니라 PD까지 발굴하나? 아니다, 너무 비약인가?”

“그럴지도 모르죠. 사람 보는 눈이 좋은 녀석이니까.”

“무슨 20대 후반밖에 안 된 녀석이 뭘 그렇게…… 나도 그 나이에 그랬으면 어땠을까 싶다.”

“지금도 좋으신데요. 절 알아봐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앞으로 더 열심히…….”

“어라? 혹시 채용 공고 못 봤어? 어제 올리라 그랬는데.”

“아 대표니임!”

“농담이야, 농담.”

그래도 뭐.

나쁘진 않다.

요 몇 달 사이 동민과 경후, 심지어 수철까지 뼈 빠지게 뛰어다닌 끝에 이엔 엔터는 배우들을 대거 영입했고.

이제 슬슬 도윤이 없는 미래도 그릴 수 있었다.

물론 아직은 까마득하지만…….

첫발을 떼었다는 게 중요한 사실.

“아무튼 일하자, 일. 오늘 미팅 있지?”

“네. 신태규 배우입니다. 도윤이 소개로…….”

“또 도윤이네. 진짜 내가 1년, 아니 3개월 만이라도 더 하자고 말해 봐?”

“그냥 포기하세요.”

“오케이.”

* * *

<미래의 너에게>.

리허설을 마친 드라마는.

본촬영이 시작되었고.

도윤은 현장에서 꽤 즐거운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기가 좋다.

그래서 회귀 전 아득바득 버텼던 거고.

돌아와서도 다른 곳엔 일절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도윤은 이번 작품에 들어가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한번 결정한 일을 후회하지도 않는 성격이지만 말이다.

“선배님, 선배님. 혹시 저 여기 이 부분 한 번만 받아주실 수 있을까요?”

“해봐.”

“넵!”

그리고 현장에서 신인 배우, 혹은 알고 지내던 배우들의 연기를 봐 주는 건 덤.

덕분에 오상학과 홍진아가 편안하게 자기 할 일을 할 수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다.

“최도윤 배우님 말이에요, 연기도 연긴데 다른 사람 가르치는 것도 잘하시네요.”

“강미나 선배한테 들었는데, 다른 현장에서는 더 했대. 신인들한테 가끔 연기 지도해 주고, 심지어 연출에 도움도 주고.”

“연출까지요?”

“내가 알기로 어지간한 감독이나 PD보다 영상 많이 봤을걸?”

“와…….”

오상학은 감탄했다.

물론 수많은 배우들이 틈만 나면 다른 작품을 감상하고 분석한다.

하지만 도윤은 결 자체가 아예 다른 것 같았다.

며칠 전이었나.

‘그래서 그때 그렇게 해박하게…….’

도윤이 출연하는 씬에 대해서 이야기할 게 있어 잠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오상학은 그때 도윤이 예시를 들며 설명하는 방식이 마치 선배 PD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에도 쉬지 않고 엄청 공부한다는 거지. 어떻게 보면…… 저렇게 연기를 잘하는 것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고.”

“이미 그걸 초월한 건 같은데요.”

“그것도 그렇지.”

여하튼 도윤은.

이 현장에서 단순한 주연 배우의 역할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배우들에게는 매 순간 동기부여를 해주는 존재이며.

연출자들에게는 생각지도 못한 방식의 연출과 대사를 제공해 준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최도윤이라는 배우가 지금까지 쌓아온 여러 요소 덕분에 가능한 일.

최도윤이니까.

이 한마디로 모든 게 설명되는 셈.

그래서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저런 배우가.

편성도 표류하고, 주연 하남 못 구해서 빌빌대던 작품에 합류했다는 사실이.

“근데 작가님은 요새 좀 어떠세요? 전 요새 하도 주변에서 최도윤 배우 한 번만 만나게 해 달라고 난리도 아니던데.”

“나라고 안 그렇겠어. 근데 그런 거에 휩쓸리면 끝도 없으니까 최대한 자제하는 거지.”

그래서 주변의 ‘유혹’도 있었지만.

둘은 잘 인내하며 작품 촬영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하튼 뭐.

한 가지는 알겠다.

앞으로 눈이 높아질 것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건 도윤과 함께한 제작진들이 모두 공통적으로 겪는 문제.

그래서 도윤과 비교당해 본의 아니게 도윤을 싫어하게 된 사람도 있을 정도니까.

그렇다고 그게 도윤의 잘못은 아니지만 말이다.

“아무튼…… 앞으로 이렇게 제작비 지원받는 작품 할 수 있을까 의문이네요.”

“힘들겠지. 근데…… 이번 작품 잘되면 몸값도 오르고 할 테니까. 열심히 하자.”

“네, 작가님.”

둘은 이제는 익숙해졌다는 듯 부담스러움을 즐기며 결의를 다지고 있었고.

도윤 역시.

이에 호응하듯 씬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며 연기를 펼쳐 나갔고…….

“죄송합니다. 제가 전속 계약이 된 몸이라.”

“아뇨. 언제까지 한다고 정해놓은 그런 건 없어요.”

이런 와중.

도윤과 마찬가지로.

오랜만에 국내 촬영장에 들어온 ‘팀 최도윤’의 일원들은 그야말로 열화와 같은 관심을 받고 있었다.

두칠은 예전에 한올을 경호하러 촬영장에 왔을 때 받았던 관심보다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었다.

미국에서.

헬스에 몰두한 덕분에 안 그래도 크던 덩치가 더 커진 것.

민주는 명불허전-

스타일리스트의 로열 로드를 걷는다는 평가 그대로 은밀한 제안을 받고 있었다.

물론 둘은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네?”

“제가 좀 비싼 몸이라. 왜냐하면 이건 비밀인데…… 최도윤 배우님이랑 종신계약을 맺었거든요. 그걸 깨려면 아마…….”

“조, 종신계약…….”

성호는.

성호답게 이 관심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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