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누가 그 드라마를 한다고?
도윤은 미국에서 갖기 시작한 사진 취미를 꽤 즐기고 있었다.
오늘도 그렇다.
“잘 나오네.”
도윤은 새로 산 렌즈로 갈아 끼운 뒤 찍은 사진들을 보며 만족스레 웃었다.
“오, 진짜 잘 나왔네요.”
옆에 있던 두칠이 슬쩍 거든 건 덤.
“구도가 진짜 좋네요. 형님 원래 사진 좀 찍으셨다고 했었죠?”
“예전에. 대학 시절에 사진 동아리에서.”
“부럽습니다. 전 대학을 안 다녀서.”
“그렇게 말하면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냐?”
“이런 반응 보려고 말씀드린 건데요.”
“성호가 여럿 망치는구나.”
여하튼 확실히.
취미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몰두하던 일을 잠시 잊을 수도 있고.
취미를 통해 이뤄낸 것들을 보며 뿌듯해할 수도 있다.
나름대로 소소한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그리고.
-오늘도 짧은 하루.
#감성스타그램 #사진취미
생전 하지도 않던 SNS에 재미를 붙이기까지.
-와! 사진 너무 예뻐요!
-맞팔 부탁드릴게요!
-사진 구도 되게 좋네요 ㄷㄷ
-사진초보라고 적어놓으셨는데 기만같다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예전에 경험이 있어서인지 사진을 찍고 보정도 적당히 한 도윤의 피드는 나름대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물론 이게 도윤의 계정이라는 게 알려지면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좋아요’가 찍히고 댓글이 달리겠지만-
도윤은 그걸 원하지 않았다.
그냥 지금처럼.
적당히 취미를 즐기고 싶었다.
예전에 없던 여유를 가지면서 말이다.
다만.
여유를 즐기기엔 도윤이 너무 많이 알려져서.
지금처럼 사람들이 잘 안 오는 곳에 시간대도 잘 골라서 움직여야 하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
‘장소가 뭐 중요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사진은 자고로 뭐든 찍는 데 의미가 있는 것.
흔히 말하는 인기 ‘스팟’에 못 가는 게 가끔 아쉽긴 해도.
조용히 취미를 즐기는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은 일이다.
특히.
지이이잉.
지금처럼, 업무상의 전화가 걸려올 때는.
이곳이 조용한 곳이라는 사실이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네, 전화 받았습니다.”
누가 들을까 굳이 어디 몸을 피해서 통화할 필요가 없으니까.
-도윤 씨? 어떻게 된 거예요? 아니, 갑자기 드라마 출연이라뇨!
“아, 그렇게 됐습니다.”
도윤은 난데없이 걸려온 기자 한 명의 전화에도 웃으며 여유롭게 대답했다.
기다렸던 전화.
“네, 마음이 조금 바뀌어서요. 네네. 기사 내셔도 상관없습니다. 곧 알려질 테니까요.”
도윤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최 배우! 무슨 일이야!
-드라마? 혹시 내가 들은 이거 진짜야?
-급이 너무 안 맞는 거 아니에요?
이어서 걸려오는 기자들의 전화에도 모두 비슷하게 답했다.
거기에.
-오빠! 진짜 <미래의 너에게> 나가요? 나도! 나도!
-선배님? 드라마 안 하신다면서요!
-와, 도윤아. 내가 같이하자고 할 때는 안 하더니!
다른 배우들의 전화에는 어쩔 수 없었다는 식으로 답했다.
틀린 건 아니다.
오히려 진짜다.
원래 할 생각이 없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으니까.
여하튼.
작품 하나 출연하기로 한 것뿐인데.
이렇게나 연락이 오는 걸 보면.
다들 아닌 척하면서 신경을 쓰긴 썼던 모양.
하기야.
도윤 정도 되는 배우인데.
어떻게 신경을 안 쓸 수 있겠냐만.
심지어 몇몇은 떼를 썼다.
“선배님! 저도 거기 합류하고 싶지 말입니다!”
“지금 하는 거나 좀 끝내고 말해.”
“투잡 뛸 수 있지 말입니다!”
“퍽이나. 그리고 자리 다 찼어.”
“세상에…… 이제 선배님 마음에 제가 들어갈 월세방도 없는 거지 말입니다.”
“하숙집도 없다. 미안.”
언제나 도윤과 함께하려고 하는 유준은 오늘도 눈물을 삼켰고.
“선배님…… 그럼 혹시 거기 자리 있을까요?”
“있긴 한데, 비중이 좀 적어.”
“저 얼마 전까지도 데뷔 한번 못했는데요. 할래요, 꼭 할래요!”
한올은 고작 한 화 정도만 출연하는 단역 자리 하나에 큰 욕심을 보였다.
도윤과 함께해서라는 이유가 가장 크겠지만.
한올은 이미 주연급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배역을 전혀 가리지 않는 배우.
“진짜로?”
“네, 꼭 할게요!”
“그래, 그럼 PD님 연결해 줄게. 가서 오디션 잘 봐.”
여하튼.
예상치 않게 한올도 합류한 가운데.
이제 준비는 거의 다 끝났다.
찰칵.
도윤은 방금 찍은 풍경 사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그래도 뭐, 생각보다 빠르게 결론이 났으니.’
한 달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 * *
올픽처스와 출연료 협상을 마쳤고, 방송사 간부와의 미팅도 진행했다.
출연 결정은 일사천리였다.
도윤의 급이 급이었던지라 만나는 사람마다 놀라고 어이가 없다는 반응을 보여 나름대로 설득시키는 데 고생했지만.
결론은 이랬다.
출연은 결정되었고.
도윤은.
<미래의 너에게> 단독 주연으로 합류한다.
그리고…….
이주아와 신강수를 비롯한.
신인급, 혹은 빛을 보지 못했던 중고 신인들도 대거 합류하는 등.
거의 모든 캐스팅이 완료되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도윤의 주연 캐스팅 사실을 모른다는 것.
오늘 소식이 알려지기 전.
오상학과 홍진아가 대대적으로 지원된 제작비를 무기 삼아 열심히 돌아다녀 낸 성과였다.
덕분에 뒤늦게 소식을 접한 배우들과 엔터 회사들이.
지금 <미래의 너에게> 출연을 타진하는 모양이다.
-야, 도윤아. 난리도 아니다. 다들 <미래의 너에게> 출연하겠다고 하던데. 근데 왜 우리 회사로 전화를 걸어서 물어보냐?
도윤은 경후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웃음을 터뜨렸다.
몸이 꽤 달았는지.
도윤이 <미래의 너에게>에 주연으로 출연한다는 소식에, 알고 지내던 경후와 이야기해 보면 뭔가 될 줄 알고 연락을 해 온 모양.
그들 중에는 당연히-
도윤이 합류하기 전, 홍진아와 오상학의 제안을 거절한 곳도 포함되어 있었다.
* * *
사람은 간사하다.
이전에는 검토해 보겠다, 고려해 보겠다 등으로 일관하던 배우들이나 엔터 회사들이 속속 연락을 취해오는 걸 보며 오상학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도 된다.
별 볼 일 없고, 지상파 드라마치곤 제작비도 애매해서 출연료 맞춰주기도 힘든 드라마에 무려 최도윤이라는 별이 합류했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을까.
체면 따위는 잊고 이렇게 연락해 오는 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아주 안타깝게도…….
“죄송합니다. 지금 그 배역은 모두 캐스팅됐습니다.”
“캐스팅이 완료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이미.
모든 배역에 대한 캐스팅이 끝나버린 것.
덕분에 도윤과 함께 연기할, 정확히는 도윤이 골랐기에 ‘떡상이 예약된’ 드라마에 출연할 기회를 놓친 이들은.
땅을 칠 수밖에.
도윤이 고른 작품이 무조건 성공한다는 건 이 바닥에서 이제 유명하다고 말하기조차 민망한 사실이었으니까.
여하튼.
‘급’이 서로 맞지 않는 배우와 작품이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 연예계를 달구고 있었고.
이미 소식을 들은 일부 팬들은.
도윤이 일단 국내 작품으로 복귀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아주 기뻐했다.
세상이 많이 바뀐 나머지 도윤이 어느 나라의 작품에 출연하든 보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국내 작품은 확실히 의미가 남다른 법.
안 그래도 이제 해외에서만 활동하는 거 아니냐며 불안에 떨던 팬들은.
이제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여하튼.
도윤의 이런 결정은 지금 엄청난 반향을 부르고 있었다.
제작비 증액 같은 ‘사소한’ 일부터.
예상했던 대로 엄청난 관심이 쏠리며 들어오는 수많은 광고 문의들.
여기에.
도윤이 출연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판권을 비롯한 권리 구매를 해외 방송사들이 문의하기까지.
그야말로.
축제였다.
다만.
“진짜 장난 없네요.”
“그러니까 열심히 해야죠.”
이 드라마를 완성시킬 의무가 있던 오상학과 홍진아에게는…….
상당한 부담인 것도 사실.
“그래도…… 이거 성공시키면 우리 둘 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 생각했으니까.
“네, 네! 장소 섭외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네네, 직접 연락드렸어요. 아무래도 중요한 건 같아서. 네, 말씀드린 거기를 아마…… 한 달 정도…… 정말요? 두, 두 달이나요? 사, 사실 그렇게까지는…… 그래도 감사합니다!”
“네네, 아무래도 해외 로케가 필요할 것 같아서요…… 혹시 이 부분 긍정적으로 좀 검토를 해주시면…… 네에? 될 것 같다구요?”
그래서 둘은 열심히, 정말 열심히 일하며.
하루하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매진하고 있었고.
마침내.
꿀꺽.
‘미치겠네, 작가가 이렇게 긴장해서 어떻게 하냐고.’
‘리딩 참관은 해 봤는데 내가 직접 주관하는 건 처음이라…….’
리딩 날이 되자.
둘은 긴장감과 피로에 당장이라도 졸도할 지경이었으나.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배우들을 기다렸고.
“아,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이주아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신인 배우 오진철…….”
“처음 뵙겠습니다!”
신인급 배우들이 하나둘 들어와 인사를 하고.
“홍 작가님. 오랜만이에요.”
“오상학 PD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비교적 여유로운 얼굴의 중견, 혹은 연차 쌓인 배우들이 들어와 앉은 가운데.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최도윤이라는 배우를.
‘혹시 바이럴 아닐까?’
‘가짜라도 뭐…….’
‘각본은 진짜 좋으니까.’
이들 모두 캐스팅이 완료된 후에야.
도윤이 <미래의 너에게> 주연을 맡았다는 걸 알게 됐다.
몇몇은 이전에 제안받았다가 출연료 문제로 고사한 적이 있으며.
몇몇은 난데없는 제안에 놀라면서도 각본의 퀄리티와 현재로선 상상하기 힘든 배역의 비중에 오케이한 바 있다.
여하튼.
공통점은 모두-
기대하고 있다는 것.
특히.
최도윤이 주연으로 합류한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뭔가 설명하기 힘든 자부심 비슷한 것도 마음속에 자라나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철컥.
문이 열리고.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도윤은.
이들 모두를 흥분시켰다.
“아, 최도윤 배우님. 오셨어요?”
최도윤.
평범한 티셔츠에 면바지 하나만 입었는데도 아우라가 넘쳐흐르는 모습.
“안녕하십니까, 처음 뵙겠습니다. 배우 최도윤입니다.”
그리고 마치 당연하다는 듯.
PD와 작가에게 깊숙이 고개를 숙인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 모습에 오늘 들어와 둘에게 대충 인사하고 말았던 두엇 정도의 배우는 속으로 헛기침했고.
신인들은 어쩐지 자신보다 더 예의를 차리는 것 같은 도윤의 모습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
도윤은 배우들과 눈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자리에 앉아 대본을 펼쳐들었다.
<미래의 너에게>.
로맨스는 곁다리로.
미래와 과거를 오가는 시간 속에서.
미래의 자신을 바꾸기 위해,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이야기.
‘할 수 있다.’
오상학은 속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결의를 다졌고.
홍진아 역시.
이번 작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이제 모두 모인 것 같네요.”
마침내 모든 퍼즐이 맞춰진 가운데.
“그럼…… 이제 시작해 볼까요?”
<미래의 너에게>가.
시작되었다.
늘 그래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