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개과천선 배우님-179화 (179/200)

179.모범생의 일탈 선언(3)

때로는.

인생이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

회귀한 도윤의 경우가 그랬고.

그런 회귀한 도윤이 이제 와서 ‘일탈’을 선언하는 바람에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이엔 엔터가 그랬다.

이엔 엔터는 도윤의 독립 선언 이후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했다.

도윤의 공백을 모두 메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배우 한 명이 나간다는 이유로 휘청거리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한 작품 더 한다니.

“도윤이가 마지막에 선물 주고 가는 느낌인데요.”

“본인은 아니라고 해도, 우리한테는 선물이지.”

덕분에 이엔 엔터에는 무시할 수 없는 자금이 추가되었고.

이걸로 이엔 엔터는 도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각종 투자에 속도를 낼 수 있게 되었다.

도윤의 ‘일탈’이.

회사에는 큰 도움이 된 셈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에.

도윤은 여러 배우에게 이엔 엔터를 추천해 주기까지 했다.

지금 <미래의 너에게> 합류가 전격 결정된 ‘이주아’가 바로 그런 케이스.

“솔직히…… 도윤이는 배우 안 했어도 캐스팅 디렉터로 엄청 날렸을 것 같습니다.”

“동감해. 어우, 무슨 보는 눈이…… 데려오는 배우들마다 포텐이 S급이야, S급.”

뭐, 도윤이 들으면 슬며시 웃겠지만.

도윤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정말로 ‘눈’을 키워가고 있었다.

단순히.

회귀 전에 알고 있던 미래만이 아니라.

정말 배우를 보는 눈을 기르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더 아쉬웠다.

배우로서 활동하는 것 외에도.

정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던 도윤이 나간다는 사실 말이다.

하지만 어쩌겠나.

결정된 지도 한참 지난 일.

아쉬워할 게 아니라.

하던 대로, 계속 준비해야 한다.

“그럼…… 도윤이는 <미래의 너에게> 찍고 일본으로 넘어가는 거지?”

“네, 아마 거기서 드라마 한 편 찍고 영화까지 촬영하고 올 것 같은데…… 요새 일본어 열심히 공부한다고 합니다.”

“바쁘겠네. 그래서 사장 노릇 하려나 모르겠네.”

“도윤이잖아요. 잘하겠죠.”

경후의 말에.

동민은 이엔 엔터를 막 일으키던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힘든 과정이었지만.

어쩐지.

도윤이라면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도윤이니까, 라는 단순한 이유밖에 없었지만…….

그것만큼 충분한 이유가 또 있을까?

여하튼.

준비는 척척 되어가는 모양이다.

종종 만날 때마다 표정이 밝고.

뭔가 진행되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들려주는 걸 보면 말이다.

확실히.

일탈이라면 일탈이다.

안 하던 ‘짓’의 연속.

하지만.

어째서인지 기분은 좋다.

함께한 최고의 배우가.

이제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것 같아서.

‘기사 어떻게 낼지나 고민해 봐야 하나?’

동민은 아직 멀지만, 곧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며 미소를 지었다.

* * *

“누구? 최도윤? 이야, 좀 친다? 이런 드립도 치고?”

처음에는 아무도 안 믿었다.

별로 기대도 안 하는 작품 주연이 누구?

최도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최도윤이 이번엔 국내에서 작품을 하지 않겠다고 말한 건 꽤 유명한 사실.

“제작비 부족한 건 이해해. 근데 말이야,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진짜 최도윤이 온다면 모를까.”

“그럼 진짜 제작비 추가 지원해 주시는 겁니까?”

제작사 대표는 그 말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지금 이 새파랗게 어린 PD가 도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걸까.

나름대로 당차고 실력이 있는 것 같아 적당히 기대 안 하는 작품을 맡겨봤더니.

지금 주연으로 누굴 데려온다고?

‘패기야? 아니면 오기?’

아무래도.

전자는 아닌 것 같았다.

패기라 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한 대상을 이야기하고 있었으니까.

제작사 대표는 그래서 오상학을 조금 놀려주기로 했다.

“오면 해줄게. 오게 만들어봐. 할 수 있다면.”

그럴 일은 절대 없겠지만 말이다.

제작사 대표는 싱글싱글, 얄밉게도 웃으며 오상학 PD 앞에서 팔짱을 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뭐, 내기라도 걸까?”

“좋죠.”

씨익.

웃는 모습이 조금 불안하긴 했는데.

워낙 말도 안 되는 일이라 제작사 대표는 전혀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좋아. 최도윤 캐스팅해 오면 회사 기둥뿌리 뽑아서라도 제작비 지원해 줄게. 방송사에도 이야기해서 따블로. 근데, 못 하면…….”

“다음 작품 무보수로 하겠습니다.”

“이야, 꽤 세게 나온다?”

다시 한번.

불안이 고개를 내민다.

하지만 아직 위험한 수준은 아니다.

누가 봐도 이건 신인 PD가 무리한 패기를 부리는 거다.

누굴 데려와?

‘최도윤?’

웃기지도 않는 소리.

그때 불현듯.

최도윤이 작품만 좋으면 일단 하고 본다는,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소문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신인 PD에.

한물간 작가.

심지어 제작비도 충분하지 않은 작품.

아무리 조합해도 좋은 결과가 나오기 힘들다.

“무조건 캐스팅하겠습니다.”

“좋아. 해봐. 한번.”

그래서 제작사 대표는 자신 있게 오케이할 수 있었다.

‘실력 좋은 녀석이라고 추천받아서 고용했더니만…….’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만약 정말로.

최도윤을 데려온다면?

그럼 정말 내기한 것처럼 기둥뿌리라도 뽑아서 지원해 줘야 할까?

‘그럴 이유는 충분하지.’

어디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화제를 뿌리는 배우다.

당장 출연한다고 하면.

들어오는 광고의 가짓수만 해도 수십, 아니 수백 가지가 될 텐데.

못 해줄 이유가 전혀 없다.

이래저래.

남는 장사인 셈.

그런데.

“……누구?”

-지, 지금 진짜 최도윤 배우가 왔습니다! 로비에 있어요! 진짜라니까요!

“무슨 소리야?”

정작 정말로 다음날 최도윤이 오자.

제작사 대표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해버렸다.

그리고 오상학 PD와 함께 들어서는 최도윤을 본 순간.

제작사 대표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그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오상학은.

거 봐라, 라는 표정을 짓는 대신.

무표정하게 제작사 대표를 바라보며.

어깨만 살짝 으쓱거렸고 말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도윤이라고 합니다.”

“어, 그, 예! 예에! 올픽처스 서상민입니다! 아, 앉으시죠! 이, 이쪽으로! 커피, 아니 커피 잘 안 드시면 물로…….”

“물로 부탁드리겠습니다.”

덕분에.

제작사 대표가 밖으로 달려나가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오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고.

직원들은 업무를 하는 둥 하는 둥, 방금 막 최도윤이 들어간 대표실을 힐끗거리며 재잘거리기 바빴다.

“리얼 최도윤이야?”

“와…… 말이 돼? 우리 작품 어떤 거에 나오는 거야?”

“방금 들어간 PD 신인이잖아. 그럼…… <미래의 너에게>?”

“말도 안 돼! 최도윤이 왜 거기 나와?”

“야, 우리 회사 주식 사라고 해야겠다.”

온갖 이야기들이 오가는 가운데.

대표실에서는.

항상 자신만만하고 몇몇 직원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던 서상민 대표가 잔뜩 긴장해서 이야기하는.

신기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저…… 정말로 저희 회사 작품에 출연해 주시기로 하신 겁니까?”

“네. 출연하기로 했습니다. 각본도 좋고, PD님과 작가님 두 분 다 실력이 좋으셔서. 안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쩍 벌어지는 입.

이게 몰래카메라가 아니라면.

아니, 세상에 어디 최도윤을 앉혀놓고 몰래카메라를 할까?

자기가 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라고.

꿀꺽.

마른침이 넘어가는 가운데.

“제가 알기로는 국내에서는 이번엔 작품을 하지 않으신다고…….”

“네, 그렇게 이야기했었죠.”

도윤은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좋은 작품을 보니까 또 참기가 어렵더라구요.”

“아…….”

서상민은 문득 정신이 번쩍 들어 물었다.

“그, 그럼 오늘은…….”

“인사도 드릴 겸, 출연료 이야기를 좀 나누러 왔습니다. 원래는 회사에서 하는데…… 오늘은 제가 직접 하고 싶어서요.”

마침내 나온 아주 중요한 이야기.

출연료.

과연.

얼마를 줘야 할까?

물론 서상민의 회사, 올픽처스가 돈이 없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서 실제로 기둥뿌리를 뽑는다는 표현은 좀 그렇다만…….

‘도대체 얼마를 줘야 하는 거야?’

최도윤 급의 배우에게 얼마를 줘야 할지 감이 안 잡히는 것도 사실.

이 바닥에서 특A급 배우들은 거의 회당 1억 5천만 원 이상을 챙겨간다.

하지만.

도윤은 특A급을 넘어선 유일무이한 ‘S급’ 배우다.

한국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도 이미 주연으로 드라마 촬영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쉽게 말해.

부르는 게 값이라는 건데…….

실제로 도윤이 입국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여러 제작사들이 회당 2억 이상의 출연료를 싸 들고 찾아와 도윤을 섭외하려 했다는 건.

이 바닥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사실.

물론 도윤은 모두 거절했고.

그런 의미에서.

서상민은 그런 도윤이 직접 찾아오는, 말도 안 되는 행운을 눈앞에 마주한 셈.

그래서 내린 결론은-

“원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평소 서상민이라면 절대 꺼내지 않았을.

공수표였다.

도윤은 그 모습에 씩 웃었고.

“정말이십니까?”

“네. 제 이름을 걸고 약속드립니다. 방송국은 제가 책임지고 설득하겠습니다.”

사실.

설득이고 말고 할 것도 없다.

최도윤이 합류한다는 소식만 들리면.

어마어마한 PPL이 타진될 테고 전후 광고 경쟁도 엄청나게 치열해질 테니까.

당연히.

도윤의 출연료 문제도 해결될 것이다.

아니.

현시점에선 ‘문제’라 부르기도 민망하다.

‘최도윤이 합류하면 그때부터는…….’

이제 드라마의 ‘떡상’은.

예정된 거나 다름없으니까.

“좋습니다. 시원하셔서 좋네요.”

물론 서상민은 시원과는 거리가 먼 사람.

단역 배우 한 명조차 깐깐하게 따져서 출연료를 결정하고.

출연료 문제로 얼굴을 붉힌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지금 눈앞에서 웃고 있는 저 배우는.

최도윤이 확실했으니까.

오상학이 최도윤이랑 아주 닮은 사람을 데려와 몰래카메라를 하는 게 아니라면.

<미래의 너에게>는 이제 확실히 뜨게 되었다.

‘가만, 각본이 좋다고 했었지…….’

그래서 서상민은 간사하게도 각본을 다시 한번 읽어보기로 했다.

대충, 그냥 한물가긴 했어도 짬이 있는 작가니까 어지간히 썼겠다 싶어서 적당히 읽고 넘어갔는데.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기왕 쓰는 거 더 써서 아예 최소 A급으로 채워봐?’

각본이 좋단다.

그것도 최도윤이 직접 그렇게 말했다.

그럼 다른 배우들도 분명히 관심을 보일 것이다.

그들 중 대다수는 도윤이 참여한다는 소식에 좀 더 관심을 보이겠지만-

뭐 어떤가.

어쨌건 작품에 관심을 보이는 건데.

하지만 서상민의 그 생각은 거기서 멈춰버렸다.

“아, 여기에 추가로 조건을 제안드리고자 합니다.”

“조건이요?”

“네. 이미 오상학 PD님께는 전달드렸지만, 대표님께도 전달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제가 지명하는 배우 두 명의 합류입니다.”

“배우 두 명이라면…….”

서상민은.

이주아와 신강수라는 이름을 듣고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에 고개를 갸웃거렸고.

이어서 도윤이 이야기한 배역과 그 배역에 대한 중요도를 오상학에게 들었을 땐.

경악했다.

“시, 신인인데요?”

“잘해낼 겁니다. 이 부분은 제가 보증하죠.”

“…….”

이참에 다른 A급 배우들로 라인업을 채우고.

화제성을 제대로 끌어보려 했던 서상민의 계획이 무참하게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