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귀국(3)
오랜만에 ‘모임’이 있었다.
차정수와 회사 설립과 관련해 이야기도 할 겸 이야기를 나누던 중.
‘모임’의 멤버들이 마침 모두 한국에 있어서 모이기로 한 것.
어쩌다 보니 모이게 된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야, 신수가 훤하네.”
“드라마 잘 보고 있어. 볼 시간이 없어도 네 거는 챙겨보고 있지.”
다들 도윤을 반겨주고.
오랜만에 만나 서로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쁘다.
도윤도 마찬가지.
몇 번 만나지 않았지만.
‘모임’에서 나눈 이야기 덕분인지-
이들 사이에선 묘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다.
“도윤이 회사 만드는 건 좀 어떠니? 저번에 나한테 말한 전문경영인은 내가 알아보긴 했는데.”
“아마 곧 구체적으로 나올 것 같아요. 부탁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고맙긴. 능력 좋은 애가 한다는데. 그래서 말이야, 이번에 거기 투자 좀 할까 하는데.”
“청진도 엔터 만드시게요?”
“네가 우리 투자금 잘 쓰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도윤은 씩 웃었다.
주안나는 스스로 항상 여성이기 이전에 자신은 기업가라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즉.
손해 보는 투자는 하지 않을 거라는 뜻.
주안나가 전문경영인을 물색해 준 건 일종의 호의로 볼 수도 있지만.
지금 꺼낸 ‘투자’ 이야기를 위한 포석일 가능성이 높은 셈.
“얼마까지 알아보고 오셨어요?”
그래서 도윤이 꺼낸 농담은.
주안나를 꽤 유쾌하게 만들었다.
“얼마까지라……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든 돈이 부족해서 못 할 일은 없을 정도로?”
주안나는 기업가다.
그래서.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도윤이 지닌 기업가로서의 자질을 믿기보단-
여차하면 청진에서 직접 엔터를 운영할 생각일 수도 있다.
주안나는 도윤이 전문경영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도윤에게서 청사진을 들은 바 있으니까.
아마.
거기서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까.
신인 배우들을 위한 엔터 회사, 라는 말.
‘어차피 나중에 가면 신인들은 없겠지만.’
여하튼 빛을 보지 못하는 신인들을 위한 회사를 만든다는 건, 도윤이기에 가능한 생각이다.
대부분의 엔터 회사는 주력으로 삼을 연예인이 적어도 몇 명은 있어야 굴러가니까.
하지만 이번 경우는.
도윤 혼자서도 충분하다.
일당백, 아니 일당천도 가능한 배우니.
“좋네요. 청진의 투자를 받았다고 하면 성장도 금방일 테니까. 그런데 저한테는 돈보다 다른 게 더 필요해서요.”
“이를테면?”
“청진의…… 인력?”
그 말에 주안나가 눈을 반짝였다.
“인력?”
“때로는 CEO의 이름값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진 않더라구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파리가 꼬이기도 하고.”
주안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수많은 연예인들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하는 사업을 망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이름값에‘만’ 기대려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연예인이 하는 사업에 예나 지금이나 관심을 가지지만.
요즘은 오히려 그래서 더 깐깐하게 보는 편이었다.
물건을 팔든, 음식을 팔든, 아니면 다른 사업을 하든.
그래서 도윤은.
자신이 없는 사이 경영에 몰두해 줄 전문경영인과.
그 외 관리인력 이야기를 꺼낸 것.
“본격적으로 하려나 본데.”
“나도 국회의원 그만두고 장사할까.”
“네가? 퍽이나.”
“도윤이는 부럽다. 나 시작할 때는 저런 거 생각도 못 했는데.”
덕분에 ‘모임’의 관심은 어느새 둘의 대화에 쏠려 있었고.
주안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투자할 거면 제대로 해야지. 전문경영인에, 그 외 인력에, 투자까지. 그럼 내가 얻는 건?”
“최도윤이 대표로 있는 엔터 회사의 2대 주주죠.”
“좋아.”
청진 정도라면 조금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많이 투자할 테고.
주안나는 지금 도윤이 원하는 거라면 다 들어줄 기세.
그래서 궁금함을 느낀 차정수가 물었다.
“어깃장 놓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안나 네가 보기에 잘 될 것 같아?”
“네. 도윤이 눈은 틀린 적이 없으니까요.”
“뭐?”
“알아봤거든요. 도윤이가 연예계에서 어떤 위치인지. 대중들은 최도윤이라는 배우를 좋아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어떤 평가를 받는지 모르니까.”
뒷조사라면 뒷조사다.
하지만 도윤은 전혀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주안나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그래서 알아봤는데…… 아주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리더라구요.”
“어떤?”
“지금까지 최도윤이라는 배우가 찍은 신인은 단 한 명도 실패하지 않았다, 뭐 이런 이야기?”
정수는 놀랐고.
도윤은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작품 보는 눈도 좋은데, 배우 보는 눈도 좋다. 뭐 이런 거겠죠? 음, 저는 데이터를 가급적 신뢰하는 쪽이지만, 이런 경우는 또 달라서.”
주안나는 그렇게 말하더니 싱긋 웃었다.
“그래서 투자 결정했어요. 청진그룹 계열사들 관리하는 사람치고는 꽤 무책임했나요?”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은 도윤 외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다 제가 잘 못하면요?”
“글쎄, 내가 아는 도윤이는 그럴 사람이 아니라서.”
역시, 영리한 사람이다.
스스로를 전혀 내세우지 않고 상대를 높인 뒤.
자신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설명하다니.
“아무튼 그래서, 투자받을 거야?”
도윤은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네. 받을게요, 투자.”
“이거 원, 내가 애원해서 받는 것처럼 들리는데?”
“어, 아니었나요?”
도윤의 그 말에 주안나는 기어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투자 건이 해결되면서.
‘도엔터’ 설립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청진미디어 경영전략팀 홍철우 팀장입니다.”
“최도윤입니다. 아직 대표라는 칭호가 어색하네요.”
“곧 익숙해질 겁니다.”
도윤은 주안나의 추천으로 도엔터 파견이 잠정 확정된 홍철우와 만나 설립 및 운영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가 하면.
“눈여겨본 신인 있으면 추천해 달라고?”
“네, PD님이 보시기에 괜찮은 배우 있으면요. 가능성만 있어도 좋습니다.”
“흐음…… 그럼 나보다는 내가 아는 후배한테 연락을 좀 해 봐야겠는데. 걔가 상수동에서 배우 아카데미 운영하고 있거든. 한 3년 됐나?”
<그대 내 품에>로 인연을 맺은 진주섭 PD를 만나 배우 추천을 부탁했다.
정확히는.
도윤에게는 부족하다고 할 수 있는 방송계나 관련 업계 인맥의 도움을 받고자 한 것.
“근데 배우 추천? 왜, 이엔에 배우 부족해? 요새 잘 나가던데. 신인들도 엄청 데려오고. 하긴, 다다익선이긴 하…….”
“회사 만들어 보려구요.”
“……이거 엠바고냐?”
도윤은 어깨를 으쓱였다.
“상관없어요. 이제 곧 알려질 텐데.”
“너 회사 운영할 시간은 있니?”
“만들어야죠. 대충대충 할 생각도 없구요.”
“미국 다녀오더니 자신감이 생긴 거야, 아니면 그냥 도전하는 거야?”
“둘 다죠. 아, 자신감은 예전부터 있었구요.”
“……무섭다, 무서워.”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진주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회, 회사?”
“도윤이 네가 드디어…….”
“형님, 회사 운영이 얼마나 힘든데요.”
만나는 사람마다 이야기를 꺼내면 만류하거나, 혹은 아주 놀란다.
반면.
“선배님, 그럼 거기 저 갈 수 있는 거지 말입니다?”
도윤바라기 유준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눈을 반짝이며 소속사 이적을 시사해버렸다.
“너 기간 얼마나 남았는데?”
“재계약 2년 했으니까 이제 1년 남았지 말입니다!”
1년.
그쯤이면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테니.
유준이 와 준다면 분명히 큰 도움이 되겠지.
“전 무조건 가는 거지 말입니다, 선배님.”
“계약 조건도 안 듣고?”
“선배님 밑에서는 무급으로도 일하지 말입니다!”
“나중에 나 감옥 보내려고?”
순간 회귀 전 미결수로 구치소에 있었던 기억이 난 덕분에 트라우마가 치솟았지만-
도윤은 간신히 억누르고 흥분한 유준을 진정시켰다.
“아직 1년이나 남았어. 이상한 생각 말고 일단 기다려.”
“당장이라도 가고 싶은 걸 어떻게 하지 말입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도윤은 유준의 말투를 따라 하며 결국 말리길 포기했고.
기왕 이렇게 된 거.
신인들만 뽑을 게 아니라 귀감이 될 만한 배우 한두 명 정도는 데려오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전에-
지이이잉.
[도윤아, 내일 2시. 잊지 않았지?]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국내 복귀’ 였다.
* * *
강미나의 어깨는 오늘따라 유독 으쓱거렸다.
촬영장이 평소보다 바쁘게 돌아가고, 평소보다 훨씬 더 소란스러웠지만.
강미나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늘은.
마음껏 그래도 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강 작가님 저런 표정 처음 보는데.”
“요새 완전 히스테릭했었잖아.”
“기껏 뽑은 주연이랑 리허설에서 한바탕 싸웠었으니까.”
강미나는 이번 작품, <로맨스는 두 번째>에서 캐스팅한 배우와 한바탕했다.
흔한 의견 차이였다.
나름 경력 있던 주연 배우 한 명이 물러서지 않았고, 기어이 리허설에서 서로 언성을 높이며 싸운 것이다.
물론 PD와 한 원로 배우의 중재로 사태가 아주 커지진 않았지만.
모두가 알았다.
둘의 사이가 완전히 파탄 난 것을.
자존심 강한 두 사람 중 어떤 사람도 의견을 굽히지 않으니 당연한 일.
제작사와 투자사 때문에 캐스팅이 취소되는 일은 없었지만.
덕분에 촬영장 분위기는 시작부터 개판이었다.
차차 나아지고 있긴 해도…….
두 사람이 마주치는 순간에는 사방에 정적이 흐를 정도.
‘이래서야 원.’
PD도, 다른 어떤 배우도 둘의 관계를 개선시킬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는 배우가 적당히 굽히고 들어가는 게 관례라면 관례다.
강미나는 스타 작가고, 스타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참여하는 배우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오히려 강미나가 무던히 참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위해서.
하지만.
오늘만큼은 강미나도 그 배우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어제까지는 인내하고 참으며 대사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다면.
“네, 마음대로 하세요.”
오늘은 마치 네가 어떻게 하든 난 전혀 신경 안 쓸 테니 너 알아서 하라는 태도였다.
덕분에 강미나와 냉전 중인 배우, 하성철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의 의중이 도대체 뭔가 싶어서.
그 이유는.
곧 밝혀졌다.
“PD님. 곧 도착한다네요.”
“그래? 그럼 마중 나가야지. 참, 다른 배우들은 아직 모르지?”
“그럼요. 우리 조연출이 다른 데 말한 거 아니면, 지금 아는 사람은 셋뿐이죠, 아마?”
“배우들 놀라 자빠지겠네.”
강미나는 PD의 말에 씩 웃었고.
마침.
-최도윤 배우 촬영장 들어왔습니다.
들려오는 무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든든한 응원군을 마주하는 기분으로 말이다.
그리고 곧.
촬영장에 들어온 카니발 한 대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사람 한 명이 내리자.
“세상에! 저기, 저기!”
“뭔데? 누가 왔…… 어, 어어?”
“미친! 진짜야? 최도윤이라고!”
촬영장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최도윤.
국내에서 정점을 찍고.
미국에서 두 번의 성공을 거둔 뒤.
다시 한국으로 입국했다던-
국내 최고의 배우가 지금 이 <로맨스는 두 번째> 촬영장에 도착한 것이다.
“도윤아.”
그리고.
강미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가.
도윤과 포옹했다.
마치.
보란 듯이 말이다.
도윤은 생각했다.
참.
무서우면서.
투명한 사람이라고.
개과천선 배우님 175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