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몰입에서
몰입.
과한 그 몰입을 피하기 위해.
도윤은 저렇게 자신을 깎아 먹으면서까지 준비했다.
그럼.
그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
도윤은 여전히 ‘강석’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분리해 내는 것에 성공했을까?
‘이제는 케케묵은 방법이지.’
제작자마다 생각은 다르지만.
크리스는 배역에 온전히 몰입해서 그 배역 자체가 되는 연기법을 배우를 위해서라도 써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몰입이 과한 나머지.
폐인이 된 배우조차 있었으니까.
한 작품,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고 죽은 뒤 모두에게 추앙받는 별이 될 게 아니라면-
그래선 안 된다.
뭐, 다소 극단적인 생각이지만.
경험에 근거하여 생각하는 사람의 기본적인 특성을 생각했을 때…….
크리스는 부디.
도윤이 컷 사인이 떨어진 순간 ‘강석’에게서 벗어났길 바랐다.
빌도 마찬가지.
‘촬영장 밖에서도 강석이면 곤란하지.’
빌 역시 크리스와 다른 의미로 그런 연기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배역에 몰입한다는 이유로 공식 석상에서 멍청하게 굴거나 무례하게 행동하는 머저리들을 수없이 많이 봐 왔고.
그런 놈들 때문에 위약금을 물기도 했었다.
여하튼.
역사적인 첫 촬영을 보러 왔다가 긴장만 잔뜩 하고 있는 빌은.
부디 도윤이 목표한 바를 이뤘길 바랐다.
이런 가운데.
도윤은 마침내 긴 숨을 토해내며 몸을 일으켰고.
달려간 성호에게.
씩.
웃어 보였다.
“형.”
“괜찮아.”
그러더니 맥이 풀린 듯, 성호의 어깨를 빌려 일어나다 휘청였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마체테를 조심스레 내려놓은 뒤 크리스에게 다가가.
“괜찮은 것 같습니다.”
덤덤하게 한 마디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잘 되었다는.
증거였으니까.
“다행이군.”
“덕분입니다.”
“다시 겸손한 모습으로 돌아온 건가?”
“이번만큼은 그럴 수밖에 없겠네요.”
도윤은 진심이었다.
고민이라는 건.
생각보다 다른 사람의 가벼운 말 한마디에 해결될 때가 많다.
그토록 치열하게 고민하고 머리를 쥐어뜯었던 문제가 남의 말 한마디에 풀리는 이상한 일.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은.
오늘 도윤을 바꿔놓았고.
도윤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앞으로 촬영 문제없겠나?”
“배가 좀 고프긴 하지만, 아마 문제없을 것 같네요.”
“초반부 파트를 빨리 끝내야겠군. 이러다 쓰러지면 나와 빌은 소송 걸린다고.”
반쯤은 농담이지만, 진심이기도 했다.
저러다 쓰러지면.
정말 난리도 아니다.
누가 봐도 아슬아슬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씬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뽑힐 것 같았다.
초췌한 몰골.
그 몰골로 죽은 자를 난도질하고.
분노에 찬 얼굴로 바라보는 모습.
나중에 공개될 시즌2 1부를 볼 시청자라면.
궁금해서 안달이 안 나는 게 이상할 정도.
결과적으로.
아주 좋은 효과를 낸 셈.
단.
도윤이 이 비쩍 마른 몸으로 촬영을 이어가는 동안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근데 형 곧 다시 찌우셔야 할 텐데, 저렇게 반복해도 되는 건가요?”
“당연히 몸에 안 좋지. 예전에 몸 만들 때 저렇게 몇 번 했다가 죽을 뻔했어.”
사실 이건 아주 위험한 일이다.
프로페셔널한 모습으로 보이는 건 좋지만.
한편으로는 이건 건강을 도외시한 방법.
도윤이 하겠다고 나서면 말릴 재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말이다.
어쨌건.
잘 해결됐으니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이런 가운데.
도윤에게 이전보다 더 큰 흥미를 느낀 사람 한 명이 다가왔다.
“좋더군. 한 달 사이에 이렇게 된 건가?”
바로.
그랜트였다.
* * *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던 스윙 도어(Swing door)였다.
도윤은 촬영을 마치고 그랜트가 직접 운전하는 지프(jeep)에 올라 여기 도착할 때까지 감탄을 연발했다.
그랜트의 행동 하나하나에 남자다움이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주 가는 펍(pub)이라며 소개해 준 이곳에 도착한 순간, 도윤은 남자의 로망을 이룬 듯한 기분에 멍하니 그랜트를 바라봤다.
“대부분 여기 오면 다들 그런 표정을 짓지.”
그랜트는 능숙하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더니, 마치 서부 시대 바텐더를 연상시키는 콧수염을 기른 사내에게 다가갔다.
“늘 마시던 걸로.”
이 대사를.
여기서 들을 줄이야.
그랜트가 출연한 영화에 숱하게 등장한 대사를 현실에서 직접 듣자.
도윤은 온몸이 찌르르한 느낌이었다.
탁.
곧 그랜트와 도윤 앞에 이름 모를 칵테일이 놓였고.
바텐더는 쿨하게도 어떤 설명도 없이 가 버렸다.
“이 펍의 장점은 누가 오든 돈을 내고 주문만 하면 말을 걸지 않는다는 거지.”
“영화에서 보던 것과 많이 다르네요.”
“뭐, 그런 펍도 있겠지만…… 알잖나? 우리는 괜히 말을 하다가 피곤해질 일이 많은 족속이라는 거.”
틀린 말은 아니다.
유명해진다는 건.
그 유명세를 감내해야 한다는 뜻이니까.
특히 요즘처럼 기술이 발전한 시대에선.
펍에서 혼자서 떠드는 소리조차 촬영당해 어디론가 퍼질 수 있고.
그걸로 인생이 끝나기도 한다.
도윤이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이전처럼 대학 동기를 만나거나 술자리에서 편하게 술 한잔하는 게 어려웠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곳을 미리미리 알아둬야 할 필요가 있지. 뒤에 봐. 저기, 모자를 쓰고 있지만 이 바닥에서는 꽤 유명한 가수야. 자기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헝가리 남자 모델이랑 만난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도윤은 돌아보는 대신 고개만 끄덕이곤 칵테일을 한 모금 머금었다. 혀끝으로 전해지는 알싸함과 단맛이 훌륭하다.
“관심이 없는 모양이군?”
“제가 안다고 달라지는 건 없죠.”
“보통 이런 ‘정보’를 알려주면 다들 흥분하던데.”
“미국인이 아니라서 그럴지도 모르죠.”
그랜트는 그런 도윤의 모습에 흥미를 느낀 듯하다.
연기 외.
그 무엇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 젊은 배우에게.
그리고.
연기를 위해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 가며 준비하고 그야말로 완벽한 연기를 선보인 배우에게.
“연기는 언제부터 했나?”
“스물이 넘어서부터입니다.”
“그 전에 관심은 없었고?”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건 좋아했지만, 제가 연기를 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랬었지. 아마 스물한 살인가 그랬을 텐데. 난생처음으로 산 포드(FORD)를 막 세우고 내려서 야외 테이블에 앉아 있는데, 누군가 다가와 묻더군. 혹시 영화에 나오는 거에 관심 없냐고.”
흔히들 말하는 ‘캐스팅 비화’는 이렇듯.
별달리 특별할 게 없다.
도윤이 다른 강의를 듣기 위해 달리다가 수철에게 붙잡혀 캐스팅을 당한 것처럼.
사실.
성공했기에 특별해 보이는 것뿐.
성공하지 않은 배우의 캐스팅 비화에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까.
배우의 성공이.
그 배우의 모든 것들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셈이다.
“그래서 시작됐지. 자네도 비슷한가?”
“아주 다르진 않습니다.”
이야기는 깊어지고 있었다.
그랜트는 도윤에게 꽤 흥미가 생긴 듯했다.
이런저런 성장 배경을 묻는가 하면.
배우로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미국에서, 아니 이 할리우드에서 살아남고 싶나?”
“살아남겠다는 목표로 온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 이름을 남기고 가겠다는 각오로 온 거죠.”
시작부터 높은 목표라.
나쁘지 않은 포부다.
보통의 아시아계 배우들이 단역 하나라도 따 내려 애를 쓰다 실패하고 돌아가거나.
투자사의 자본으로 따낸 배역으로도 그리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걸 생각하면-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은 도윤은 확실히 특별한 캐릭터다.
지금껏 많은 배우들을 봐 온 그랜트가 보기에도, 분명히 그렇다.
하기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 능구렁이 같은 프로듀서 빌이 데려왔을 리 없지.
속으로 주억거리던 그랜트는 다른 질문도 던졌다.
“그럼 호텔방에서 지내며 뭘 하지?”
“제 대답으로 아시아계 배우들에 대한 편견이 생길까 걱정입니다.”
“오, 그렇지 않아. 나는 아시아계로 배우를 구분하지 않지. 설령, 호텔방에서 나가지 않고 매일 연습만 한다고 해도 말이야.”
그랜트는 킬킬거리며 칵테일을 쭉 들이켰고.
그 앞엔 귀신같이 새 칵테일이 놓였다.
그랜트는 칵테일을 살짝 들어 보이며 고마움을 표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재미있군. 이런 대화들이. 오랜만이야.”
도윤도 마찬가지라는 듯.
마침 새롭게 받은 잔을 들어 보였다.
처음에는 서부극의 전설과 한잔 기울인다는 사실이 못내 긴장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편안한 마음이다.
물론 아직 영어를 완벽히 구사하는 게 아닌지라 약간의 어려움은 있다만-
뭐 어떤가.
같은 배우로서 마음이 통하는 걸 느꼈는데.
“흐음. 이러면 시즌2에만 출연하는 게 좀 아쉬워지겠는데.”
“뭐라고 하셨습니까?”
“별말 아니야. 한잔하지.”
쨍.
두 사람이 든 칵테일잔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 * *
도윤이.
미국에서 한 단계 성장하며 <데드 로드> 시즌2 본촬영에 돌입한 사이.
한국에선 드디어 <악의 재림>이 공개되었고.
1화부터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사적제재 옹호?’ <악의 재림>, 첫화부터 논란 불렀다]
[모 정치인, <악의 재림> 내용에 불쾌감 표시]
[시청자, ‘사이다 가득’ <악의 재림> 첫방에 환호!]
[<악의 재림>, 부조한 사회에 던지는 통렬한 메시지!]
시작부터 바질란테 ‘석주’가 정부를 대신해 부패한 이들을 벌하는 장면들에 대해.
한쪽에서는 우려스러움과 불쾌감을.
다른 한쪽에서는 기쁨과 통쾌함을 드러낸 것.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도윤이 주연을 맡았고.
지플릭스에서 대대적으로 광고를 한 덕인지 첫방부터 여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오죽하면.
너무 화제가 된 나머지 정치인들이 언급하고.
유명인들이 시청 인증을 하며 SNS에 앞다퉈 인증을 할 정도.
하지만.
모두 예상했던 일이고.
그래서 외려 제운은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이 정도면 아주 완벽하지.”
“괜찮을까요? 지금 전화통에 불 난 것 같던데.”
“상관없어. 촬영이랑 편집도 다 해놨고, 지플릭스가 압박 좀 받는다고 안 내보낼 것도 아니고.”
제운은.
지플릭스를 택하길 천만다행이라 생각했다.
만약 한국의 방송국이었다면 어떤 식으로든 압박을 받아 내용을 수정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을지도 모르는 일.
그게 사전제작이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플릭스 드라마인 이상 그럴 일은 없다.
뭐라 하든.
배 째라는 식으로 적당히 버티면서 하나씩 공개하고 반응을 지켜보면 될 일이다.
이런 한편.
이엔 엔터는 약간 곤란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걸 보고도? 진짜?”
“네. 중국에서…… 출연 제안이 왔네요.”
동민은.
할 말을 잃었다.
당연히.
중국 쪽은 생각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중국에서 영상 검열 및 발매를 담당하는 미디어 감시 기구 광전총국(廣電總局)에서 <악의 재림>의 내용을 접하고도.
출연 제안을 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악의 재림>은 내용으로만 따지면 개인과 정부의 대립이다.
안 그래도 점점 통제를 심하게 하고 있는 중국에서.
이런 작품에 출연한 배우에게 출연 제안을 한다?
“잡아가서 고문하려는 거 아닐까요?”
“가능성 있어.”
“아니, 이건 도대체 왜…….”
아무리 생각해도.
체제에 위협이 될 만한 어떤 요소도 용납하지 않는 중국에서 도윤에게 출연 제안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얘들 설마 <악의 재림> 모르진 않겠지?”
“한국 드라마라면 일단 챙겨보는 애들이요? 그럴 리는 없을 텐데요.”
“그럼 도대체 왜…….”
그러던 순간.
동민의 눈에 띈.
계약금 액수.
한화로.
무려 200억.
“…….”
“……일단 연락 넣겠습니다.”
“그, 그래. 도윤이가 할지는 모르겠지만…… 200억이면…….”
“으음…….”
둘의 생각이.
깊어지는 순간이었지만.
“도윤이는 안 할 거야.”
“그렇겠죠.”
“무조건.”
동시에.
또 한 번.
도윤이 얼마나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