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해보자고
다음 일정까지는 시간이 조금 남았고, 그 시간은 생각보다 꽤 길어 여유를 부릴 법하건만-
도윤은 오늘도 호텔방에 처박힌 채 나올 줄을 몰랐다.
물론 도윤이 지금 있는 호텔방은 ‘방’이라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을 만큼 넓은 곳.
운동 시설이 딸린 건 물론, 세 사람이 자도 남아돌 만큼 넓은 침대와 거대한 TV까지 있었고.
매 끼니 전화 한 통이면 날아오는 룸서비스의 존재도 있었다.
물론 문 앞까지 온 룸서비스를 도윤이 있는 곳까지 배달해 주는 건 성호의 몫이었지만 말이다.
“형.”
“거기 두고 가.”
“오늘은 좀 나가서 드라이브라도 하는 거 어때요?”
“바쁘다.”
“에이, 그래도.”
“드라이브하고 싶으면 거기 키 가져가.”
“에이, 형이랑 하고 싶다는 거죠.”
도윤은 아양을 떠는 성호의 모습에.
고개를 돌린 뒤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뭐 잘못 먹었냐?”
“아니, 그게…… 형이 며칠 동안 나오질 않으니까…….”
“내 일이 이거잖아.”
“그래도요. 하루 정도는…….”
도윤은 결국.
“그래.”
“네?”
“그러자고. 씻고 나올 테니까 기다려. 아니면 내려가서 시동 걸어놓든가. 드라이브나 하자. 운전은 네가 하고.”
“지, 진짜요?”
“가짜겠냐? 싫으면 말고.”
“싫긴요!”
그리고 30분 뒤.
성호는 시동을 걸자마자 들리는 우렁찬 소리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미쳤냐?”
“형, 형은 몰라요. 제가 이런 차 어디 자주 탈 수나 있는 줄 알아요?”
“나 방에 있는 동안 안 몰고 다녔냐?”
“그동안 민주 누나가 타고 다녔는데요.”
“…….”
상상해 보니.
슈퍼카를 타고 질주하는 민주의 모습이 꽤나 멋질 것 같았다.
미안한 말이지만.
성호보다 훨씬 더 어울릴 것 같고 말이다.
여하튼.
성호가 운전하는 R사의 슈퍼카는 빠르게 하이웨이로 진입해 달리기 시작했고.
그 빠른 속도 속에서도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눴다.
“형, 근데요. 요새 좀 어떠세요?”
“뭔 소리야?”
“그렇잖아요. 다른 작품보다 더 많이 고민하시는 것 같던데.”
“그야 당연히…….”
대답을 멈춘 도윤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내가 며칠이나 그러고 있었더라.’
정확히는.
일주일이다.
확실히.
다른 작품을 준비할 땐 사나흘에 한 번 외출을 하든 술을 마시든 뭔가 하긴 했었는데.
이번에는 좀 길었다.
미국이라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충격을 받아서 그랬을 뿐.
‘그랜트.’
그랜트 윌리엄스라는.
전설적인 배우의 연기에 말이다.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건 참.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다.
어지간해서는 자신의 연기가 그 누구의 연기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자존감 높은 도윤이었지만…….
이번에는 조금 경우가 달랐다.
너무 압도적인 나머지.
이제는 막연한 목표만이 남았던 ‘연기’에.
활력을 불어 넣어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아주 기뻤다.
소리라도 치고 싶을 만큼.
목표로 삼을 명확한 무언가가 생겼다는 것.
그것만큼 기쁜 일이 또 있을까.
“들어갈 때마다 보니까 서부 영화 보시는 것 같던데.”
“어. 그 배우가 나온 영화 전부 다 보고 있어.”
“형도 독해요. 전 영화 연속으로 못 보겠던데. 보고 나면 생각이 많아져서.”
“보면서 정리하면 되는 거 아니야?”
“……네, 뭐. 그렇겠죠.”
성호는 대화하기를 포기하려다 다시 물었다.
“아무튼 형 고민이 많아 보여서요. 그래서 드라이브 이야기한 건데요.”
“네가 가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아, 진짜…….”
“농담이야, 농담.”
도윤은 드물게도 성호를 달래주더니.
풍경이 순식간에 스쳐 가는 창밖을 바라봤다.
‘이제 거의 다 봤군.’
그랜트 윌리엄스가 출연한 작품은 거의 다 감상했다.
그의 연기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대략적으로 파악했고.
도윤 자신이 어떤 걸 빼 와 자신의 연기에 접목시켜야 하는지도 유추해 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늘 그래왔듯.
이를 이식시켜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 남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성호의 말처럼.
조금 쉬어야 할 시간인 것 같았다.
“아무튼 어디 갈까요? 형 가고 싶은 곳 있어요? 적당히 아무 데나 찍고 그냥 호텔로 돌아와도 될 것 같고요.”
“너 가고 싶은 곳.”
“그럼 센타바버라는 어때요? 거기 해변이…….”
“거기 가자.”
“너무 빠르게 오케이하셔서 불안한데요.”
“싫으면 이거 타고 시애틀까지 가든가.”
시애틀이라는 말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여기는 미국 서부 끝에서도 아래쪽.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 끝쪽.
대충 잡아도.
차로 15시간은 걸리는 거리다.
“아, 아무래도 센타바버라가 좋겠죠?”
“그래. 가서 술도 한잔하면 좋지. 너 빼고 나만.”
“……가서 한숨 자고 오는 선택지는 없나요?”
도윤은 그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고민해 보겠다는 나름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생겼다.
“……저, 형.”
도윤은.
뭔가 잘못했을 때 보이는 성호의 표정을 보고 설마 싶었다.
“기름 없다는 소리는 하지 마라. 휴게소까지 아직 50마일 남았어.”
“…….”
“……진짜야?”
도윤은.
대답 없이 식은땀을 흘리며.
슈퍼카 엔진이 부끄럽게 속도를 줄이는 성호를 보며 한숨을 쉬었고.
“연비운전해라.”
“옙.”
“브레이크 밟으면 나한테 밟히는 거야.”
“형, 근데 이거 원래 연비가…….”
“그럼 니가 휴게소까지 밀래?”
“연비운전하겠습니다!”
곧바로 민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지금 두칠 오빠랑 바로 갈게요.
“그래, 미안하다.”
-뭘요. 어차피 오빠 차 쓰는 건데. 구글지도 위치 찍어서 보내주세요.
민주는 역시나 쿨하게 오케이했고.
도윤은 아까 막 밟아대던 게 무색하게 조용한 차 내부를 둘러보며 한숨을 쉬었다.
“넌 휴게소에서 보자.”
아무래도.
팀 최도윤 전원이.
오늘 하루 산타바버라에서 지내게 될 것 같았다.
* * *
도윤이 미국으로 떠난 사이.
이엔 엔터는 상장을 마쳤고.
첫날부터 큰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마냥 파티를 열 수는 없었다.
“어, 주주총회 일정? 야, 이제 상장했는데 그걸 왜 벌써…….”
“투자 제안? 무슨 구멍가게냐? 메일로 제안서 보내라고 해!”
상장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엔 엔터는 이제 막 상장한 회사답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고.
미리 충원해둔 인력들로도 부족해 각 부서에서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물론 언젠가는 지나갈 일이긴 하나.
원래 인간은 보이지 않는 미래의 보상보다는 당장 눈앞에 닥친 현실에 더 신경을 쓰는 법.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아무리 핑크빛 미래를 그려봐도.
쉽게 그릴 수 없었다.
당장.
도윤이 빠진 자리를 메워야 할 상황이 왔으니까.
때문에 <악의 재림>의 PD 제운이 직접 전화를 걸어 동민에게 감사를 표했음에도 웃을 수는 없었다.
“도윤이가 스태프들한테 패딩이랑 운동화 돌렸다는데.”
“그래요? 아직 <악의 재림> 공개된 것도 아닌데.”
“성공을 확신하는 걸 수도 있고, 그냥 까짓거 돌린 걸 수도 있고.”
“<악의 재림> 공개가…… 한 달 후네요. 도윤이 녀석, 미국 갈 준비만 해도 바빴을 녀석이 뭘 그렇게 이것저것 다 하고 갔는지.”
“내 말이.”
여하튼.
도윤과의 계약 기간이 채 1년이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엔 엔터는 이제 새로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셈이다.
솔직한 말로 회사 수익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던 도윤이 빠지게 되면.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신인 배우들은?”
“지속적으로 모집 중입니다. 그리고…… 도윤이가 소개해 준 배우 두 명과도 계약을 마쳤고요.”
“아, 배주호 씨와 이주아 씨. 박 본부장이 보기엔 어때?”
“좋습니다. 포텐도 높고, 아마 <악의 재림>이 끝나면 본격적으로 활동 시작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나마 다행이네.”
도윤은 소속사 없이 캐스팅되었던 배주호와 이주아에게 이엔 엔터로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추천했고.
둘은 도윤의 제안을 수락하며 이엔 엔터 소속 배우가 되었다.
둘 모두 도윤이 캐스팅 단계부터 직접 관여했던 배우고, 그만큼 포텐도 있으니 이엔 엔터로서는 확실히 행운이 맞긴 하다.
거기다.
“몇몇 배우들도 도윤이 이야기를 꺼내면서 조건을 타진해 왔습니다. 도윤이가 우리 현금 많다는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단순히 가능성 있는 신인 배우들만 소개시켜 준 게 아니라, 현재 계약 만료가 다가온 몇몇 배우들도 소개시켜 주었다.
“주선우 씨, 류해영 씨, 그리고…… 이승원 씨도 있고요. 현재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 중입니다.”
“셋 중에 한 명이라도 오면 대박이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도윤만큼은 아니라지만.
제각기 각자의 분야에서 어느 정도 입지를 구축한 배우들이고.
특히 이승원은 현재 명실상부한 주연급 배우.
이들이 모두 이엔 엔터로 올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어쨌건, 다리를 놓아줬다는 점에서 도윤은 너무도 큰일을 해준 것이다.
지금까지.
이엔 엔터를 키워준 것처럼.
“그런 의미에서…… 우린 매번 도움만 받는 것 같네요.”
도윤은 끝까지 이엔 엔터를 도와주려 하고 있었다.
자신이 나간 뒤.
이엔 엔터가 마주할 어려움을 알았기에.
“그래. 도움만 받고 있지…… 도움은 못 줄지언정…….”
도윤은.
늘 이야기한다.
그때 자신을 캐스팅해 준 덕분에.
여기 있을 수 있었던 거라고.
하지만 동민도 그때마다 말한다.
그때 오케이해 준 덕분에.
이엔 엔터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라고.
때문에.
동민은 정신을 차렸다.
“그래. 이럴 때가 아니지.”
사실 상장 전에 청사진은 그려두었다.
지금처럼 ‘최도윤 엔터’라 불리는 신세에서 벗어나-
여러 사업들을 벌이고 규모를 키운 뒤, 진정한 의미의 ‘자립’을 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 청사진.
최도윤이라는 기둥은 이제 사라지겠지만.
그렇다고.
이엔 엔터가 흔들려서는 안 될 일이다.
“도윤이가 연결해 줬다던 배우들 말이야.”
“네.”
“내가 직접 만나서 이야기해 보지.”
“대표님이요?”
“내가 언제 뭐 사장실에만 처박혀 있던 사람도 아니고.”
동민은 뭘 새삼스레 묻느냐는 듯.
몸을 일으키더니 경후가 들고 있던 파일을 건네받아 꼼꼼히 살폈다.
“뭐, 사실 볼 것도 없이 다들 데려와야 하지만…… 적어도 대표가 나서면 생각이 달라지겠지. 그리고 여기 이 이승원이라는 배우는 지금 대형 소속사지?”
“네, 아무래도 그쪽 조건이랑 저희 조건이랑 조율 중인 것 같은데…… 전속으로 묶으면 저희 쪽에서는 좀 더 조건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자고. 할 수 있다면. 조건은 최대한 원하는 대로 세팅해 주고, 나머지 배우들도 그렇게 맞춰.”
“그래도 될까요?”
토끼눈을 뜬 경후의 모습에 동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렇게 해야 해. 그렇게 해야, 1년 뒤에 도윤이 없어도 돌아가는 회사가 될 테니까.”
경후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희의 1차적인 목표죠. 대표님이 직접 나서주신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습니다.”
“오케이. 연락처 달라고. 연락해서 직접 만나볼 테니까. 이거 원, 수철이랑 박 본부장이 일을 워낙 잘해놔서…… 거의 1년 만에 필드로 돌아가는 건가?”
동민은 옛 생각에 피식거리더니.
휴대폰을 바라보며 결의를 다졌다.
지금 미국에 있을 도윤을 위해서라도.
이엔 엔터는 이대로 서서히 무너져서는 안 된다.
그래야.
도윤이 온 힘을 다해 끌어올린 회사의 의미가 있는 거니까.
쉽게 말해.
도윤을 위해서라도.
이엔 엔터는.
계속 성장해야 한다.
‘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