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서부극의 전설
서부 개척시대.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시대이자 이제는 하나의 아이콘이 된 시대.
물론 ‘개척시대’라는 건 어디까지나 ‘개척자’들의 입장에서 풀이한 단어라 반감을 지닌 사람도 있으나-
어쨌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서부극(western)으로 기억하는 그 장르는 수많은 명작들을 낳았다.
본고장 미국도 있고.
다른 나라는 자신들의 역사를 나름대로 재해석하고 변주시켜 서부극의 특성과 느낌을 살려 여러 작품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말한다.
그래도 미국이야말로 서부극을 가장 잘 만드는 나라라고.
그리고 지금 여기 서 있는 그랜트 윌리엄스라는 배우는-
그 미국에서 만들어진 명작 서부극에 여러 편 출연한 것으로 이미 전설 대우를 받고 있는 인물이다.
‘서부극의 전설.’
서부극 좀 봤던 사람이라면 안다.
젊은 시절의 그랜트 윌리엄스가.
코트를 걸치고 흰 모자를 쓴 채.
번개처럼 몸을 돌려 리볼버의 방아쇠를 당기는 그 모습을.
타앙-!
총성이 울리고.
짚단처럼 쓰러진 적을 뒤로한 채.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걸어가는 장면은…….
그랜트 윌리엄스를 대표하는 씬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런 의미에서.
지금 그랜트 윌리엄스를 본 순간 모두가 그 장면을 떠올렸다.
젊은 시절의 그 모습이 진하게 남아 있는, 백발의 노인을 보면서 말이다.
“늦어서 미안하군. 이거,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인데.”
“원래 주인공은 늦게 등장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잘 왔습니다, 그랜트.”
그리고 빌은 여기 있는 배우들 대부분이 본 적 없던 환한 미소로 그랜트를 맞이했다.
백발의 신사는 빌과 가벼운 포옹을 나누더니.
배우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염치없지만, 이 노인네(Old man) 좀 잘 부탁하지.”
노인네.
이보다 안 어울리는 표현도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랜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전설적인 아우라가 그렇게 보이지 않게 만들었으니까.
패션만 따져 보면 대충 입고 온 것 같은데.
당당한 걸음걸이.
여유로운 표정.
깊은 눈에서 느껴지는 위엄.
이 모든 것들이.
그랜트 윌리엄스라는 배우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빌은.
‘역시.’
누가 오든 말든 신경조차 안 쓰던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배우들이 그랜트의 등장만으로 긴장하는 걸 보며-
자신이 옳은 선택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처음에는 그랜트를 시즌2에만 등장하는 소모적인 악역으로 캐스팅하는 데 주저했다.
고작 한 시즌에만 쓰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배우였고, 자칫 잘못하면 시즌1 내내 쌓아 올린 다른 배우들의 서사가 묻힐 수 있었으니까.
그랜트는 그런 배우다.
아무리 나쁜 역할을 맡고.
극 중 무슨 짓을 하든.
배우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시청자들에게 설득력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
이를테면-
배우라는 직업의 정점에 선 남자라고 해야 할까.
거기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는 건 물론.
배역을 가리지 않고 받는다는 점에서 제작자들이 무척이나 사랑하는 배우이기도 했다.
다만.
몸값이 조금 비싼 게 흠이라면 흠일까.
물론 이 정도 되는 배우가 합류하며 일으킬 이슈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걸 고려하면…….
‘사실 얼마를 주든 손해 보는 장사가 아니지.’
이런 가운데.
제작 회의가 시작되었고.
크리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데드 로드> 시즌2의 주제는 바로 ‘그룹’입니다. 시즌1에서는 한 개의 그룹이 ‘생존’이라는 공통의 목표로 뭉쳤다면, 시즌2에서는 우연한 사건으로 그룹이 두 개로 나뉘게 되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이 두 그룹을 교차로 보여주고, 새롭게 등장하는 적에게 맞서며 다시 뭉치는 그룹을 보여줄 겁니다.”
시즌2의 핵심 내용.
칼.
그리고 도윤이.
각각의 그룹을 이끌게 된다.
그 두 개의 그룹은 제각기 생존해 나가는 한편.
새롭게 등장한 적의 공격에 와해될 뻔하다 극적으로 뭉치게 되어 반격을 가하게 되는 스토리를 펼친다.
쉽게 말해.
여기 있는 배우 세 명이 시즌2의 핵심 주인공이 되는 셈.
도윤.
칼.
그리고.
그랜트.
이런 가운데 도윤은-
“‘강석’은 다른 리더와 다르게 새롭게 합류한 몇몇 그룹원들의 도전에 직면하게 됩니다. 동양인이니까요.”
크리스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강석’은 시즌1에서 기존 그룹원들에게 이미 리더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새롭게 합류하는 인원들에게는 아니다.
그들 중에는 백인우월주의자도 있고.
같은 소수자로 차별받았음에도 동양인을 혐오하는 흑인도 있다.
도윤이 시즌2에서 벌어지는 대강의 내용을 듣고 예상한 바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진 셈.
“도윤. 잘 알겠지만, ‘강석’은 미국 내 동양계 사람들의 아이콘이 됐어. 때문에 우리가 이런 역할을 부여하는 건 어쩌면 필연적인 일일지도 모르지.”
빌이 슬쩍 끼어들어 한 말처럼.
‘강석’은 이제 단순히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 드라마의 주연 배우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그런데.
도윤은 여기서 확실히 못 박아두었다.
“압니다. 전체 스토리에 크게 방해되지도 않고, 저로서도 만족스럽군요. 하지만 제가 맡은 배역이 어떤 프로파간다를 설파하는 데 사용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빌은 그 말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차별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강석’이라는 배역을 통해서 드러낼 뿐, 이를 통해서 역차별을 역설할 생각은 추호도 없어.”
프로듀서의 말에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는지.
도윤도 마주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크리스는-
도윤이 역시나 영리한 배우임을 깨달았다.
단순히 겸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자신이 맡은 역할을 철저히 분석하고 필요하다면 요구까지 하는 이런 모습은 크리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 것.
또한.
그랜트 역시 꽤 진지한 태도로, 그리고 상당히 유창한 영어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도윤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아직은 딱 거기까지다.
그랜트는 같이 연기하는 배우가 누구든 신경 쓰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연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쪽.
그래서 그랜트는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조차 바꿔버리는 배우라 알려져 있다.
너무도 압도적인 연기를 펼치는 나머지.
다른 배우들이 여기에 맞추지 않고선 못 배기게 만드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랜트는 도윤에게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그럼, 일단…… 가볍게 대사 몇 개 쳐봅시다. 느낌 보고, 수정할 거 있으면 수정하고, 다음 리허설에 반영해옵시다.”
크리스의 제안에서 시작된.
가벼운 대본 리딩이 이어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따르지 않을 거면 나가야지. 저기, 죽은 자들이 가득한 세상으로. 이제 더 이상 민주주의는 없어. 알아들어?”
‘강석’.
시즌1에서는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로 어떤 상황에서든 그룹에 솔루션을 제공하던 캐릭터가-
하나의 그룹을 이끌게 되면서 바뀌었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대사.
그 대사를 친 순간.
제작 회의장에는 싸늘한 분위기가 감돌았고.
크리스는 도윤이 자신의 생각 이상으로 배역 분석을 철저히 해 왔음을 깨달았다.
“좋군요.”
그리고 이어서 다른 배우들의 대사들이 이어졌고.
마침내.
그랜트의 차례가 되었다.
“네가 우리 사람을 죽였으니…… 우리도 너희 쪽 사람 하나를 죽여야겠는데. 부디, 골라주겠나?”
공기가.
바뀐다.
“천천히 고민해 봐. 이 무리에서 누가 가장 쓸모가 없는지, 누가 가장 문제를 일으키는지, 평소에 누구를 저 죽은 자들의 먹이로 던져주고 싶었는지.”
‘강석’의 그룹을 코너로 몰아넣고.
“한 명이면 돼. 그럼 간단하게 보내주지.”
‘강석’에게 그들의 그룹원 중 한 명을 ‘강석’ 스스로 골라 이쪽으로 보낼 것을 종용하는 장면.
그룹의 리더에게 그룹원 한 명을 직접 택하게 함으로써 향후 분열을 유도하고.
‘강석’의 정신을 극한으로 무너뜨리려는 계략이 돋보이는 캐릭터.
그게 바로.
그랜트가 맡은 ‘가즈’라는 악역의 모습이다.
“아직도 못 정했나? 하는 수 없군.”
그리고 ‘가즈’가 직접 칼을 들고 그룹원 중 한 명에게 다가가려는 장면 직전.
“와우. 완벽합니다.”
크리스가 감탄하며 대본 리딩을 종료시켰다.
그리고 사방에서 참았던 숨을 토해내는 소리가 들려온다.
단순히 대사를 읊는 것만으로.
이런 공포를 유발할 수 있다니.
여기 있는 사람들이 대본에 몰입했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랜트가 가볍게 툭툭 내뱉는 대사마저 사람들을 몰입시키는 힘을 지녔다는 증거.
그리고 무엇보다-
어지간해서는 누군가의 연기에 반응하지 않는 도윤이.
그랜트에게서 시선을 못 떼고 있는 게.
가장 큰 증거였다.
* * *
도윤은 이번에도 호텔에 머물렀다.
빌이 제작 회의가 끝난 뒤 원하는 집이 있으면 렌트도 가능하다고 했지만.
도윤이 정중하게 거절했다.
굳이 넓은 집에서 살 이유가 없고.
호텔 스위트룸이면 충분하다고 답한 것.
그 덕분에 도윤을 이참에 미국에 눌러앉게 만들려던 빌의 계획은 시원하게 실패한 셈.
뭐.
아직은 잘 모른다.
빌은 아직 몇 가지 방법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도윤을 이번 촬영과 일본 촬영이 끝난 다음 미국에 다시 오게 해 다른 작품을 찍게 만들 방법 말이다.
하지만 아직 모르는 일이고.
그런 빌의 계략을 모른 채 호텔로 돌아온 도윤은.
“안 좋은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갑자기 방에 처박히더니 계속 노트북만 붙들고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로 봐서는 뭔가 계속 보는 것 같은데…….
뭐, 평소와 다를 게 없는 대본 및 작품 분석이긴 하다.
다만.
오늘은 느낌이 좀 다르다.
“표정이 좀 뭐라고 해야 하나, 뭔가 홀린 느낌? 형님 그런 표정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전 본 적 있던 것 같아요.”
“언제?”
“아마 <그 남자의 메모리> 준비할 때였던 것 같은데…… 그게 연쇄살인마 주인공이잖아요. 그래서 레퍼런스 찾을 때…….”
“어우, 연쇄살인마라니 좀 무섭다.”
-고양이가 내긴 했지만-얼굴을 가로지느는 흉터가 난 두칠이 그런 말을 하니.
뭔가 어울리는 것 같진 않았다.
물론 성호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할 만큼 눈치가 없진 않았다.
“아무튼 저럴 때는 안 건드리는 게 상책이에요.”
“그럼 밥은?”
“룸서비스 적당한 거 시켜서 앞에 놔주면 나중에 빈 그릇 나와 있어요.”
“무슨 죄수 같은데.”
“틀린 말은 아니죠. 작품 준비할 때는 저런 식이니까.”
하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한 성호조차도.
오늘 호텔로 돌아온 도윤의 표정이 마음에 걸렸던지 방문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오빠 무슨 일 있어?”
의상을 잔뜩 짊어지고 나타난 민주는 방 앞에서 속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민주는 곧 성호의 설명을 듣더니.
슬쩍, 도윤이 있는 방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그리고 물었다.
“오늘 뭐 현장에 특별한 일 있었어?”
“어, 음. 특별한 건 아닌데…… 아! 시즌2 악역 배우 현장에 처음 왔다던데요. 이름이 아마…… 그랜트…….”
“윌리엄스?”
“네! 그랜트 윌리엄스! 되게 유명한 배우라던데.”
“맞아. 유명한 배우.”
민주는 방문 쪽을 바라보더니.
도윤이 왜 그러는지 알만하다는 듯 피식 웃더니.
“가자. 오빠 방해 그만하고.”
“네?”
옷을 내려놓곤 두 사람을 데리고 호텔방을 나섰다.